추첨 민주주의 -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일구는 직접 정치
어니스트 칼렌바크 & 마이클 필립스 지음, 손우정.이지문 옮김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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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국민 거의 모두는,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자격은 25세 이상일 것, 중범죄를 저지른 후 집행유예기간이 남아있지 않을 것, 선거와 관련된 처벌을 받은 뒤 10년이 지날 것 등입니다.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준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입사기준은 물론이고, 중소기업이 요구하는 취업의 스펙 요구사항에 비하면 제로나 다름없습니다. 명문대를 나올 필요도, 토익 900점을 넘지 않아도, 어학연수나 자격증, 인턴경험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거를 통해 뽑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돈과 명성, 권위가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공천 경쟁에 나설 수 없고, 공천을 받더라도 본선 경쟁에서 이기기 힘듭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학벌과 직업, 경력이 없다면 선거에서 뽑히기 힘듭니다. 결국 선거는 버나드 마넹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적이라기보단 귀족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입니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뽑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선거가 중요합니다. 선거만 잘 할수 있다면 몇번이라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당선하려는 욕망과 재선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국회의원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보다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썰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재선에만 신경씁니다.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엘리트들만이 국민을 대표하는 현실을, 엘리트들의 활동이 정치 본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정치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것에만 집중하는 현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정치가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힘듭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은 과거부터 꾸준히 지적되어 왔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사회계약론》에서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기본 원칙'인 자유가 취해야 할 두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 자유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 《선거는 민주적인가》p.46


선거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저자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말하는 것은, 미국 상하원 제도에서 '하원 의원을 추첨을 통해 구성'하는 것입니다. 추첨제라는 아이디어는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부터 18세기, 19세기에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거론된 방식입니다. 추첨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 갓난아기나 연쇄 살인범에게도 국회의원의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네테의 추첨제를 기반으로 말하면, 추첨 대상은 자신이 하겠다고 신청한 모든 국민에 한합니다. 신청한 사람 중에서 랜덤으로 국회의원이 선출되며, 국민 누구라도 선출된 국회의원의 활동에 공개적으로 의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옳다면 직무를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무차별적 의의를 방지하기 위해 의의를 제기한 시민은 그 주장이 불합리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아테네에선 추첨제와 동시에 투표제도 실시했는데, 투표제는 대표적으로 군대를 이끄는 장군을 선발했습니다.

대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생겨난 제도이며, 추첨 민주주의 역시 대의적 성격을 가집니다. 추첨 민주주의는 추첨을 통해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직접적이지만,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인, 이중적 성격을 가집니다. 저자들은 추첨으로 선발된 의원들이 기존의 정치구조가 지닌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추첨으로 뽑힌다고 해서 부정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롭거나, 뽑힌 사람들이 모두 정치활동에 열정적이거나, 행정부와 싸울만한 충분한 역량을 다 갖추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단점들은 지금 선거를 통해 뽑히는 국회의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들은 추첨제도를 통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국민의 얼굴을 가진 국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재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 p.12


국회의 이상적 모습은 국민의 마음과 감정, 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의 구성원들은 국민 다수의 얼굴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국회의원들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며,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이고,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선호하는 의제와 국회가 선호하는 의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대부분의 시민과 다른 계급의 사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 정치를 멀리하는 참여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대표성의 문제를, 대표성이 낮아지니 그만큼 국회의원의 책임감이 결여되는 문제를 불러오게 됩니다.

캐나다의 경우 2006년에 단순 다수 대표제를 개혁하기 위해 추첨제를 통해 시민총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추첨 민주주의의 전통은 재판의 배심원 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작위 추출이 대표성을 가지기 위해선 통계학적으로 최소 500개 정도의 샘플이 필요하기 때문에, 추첨 민주주의가 국민의 대표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국회의원 자리도 최소 500석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저자들은 투표제의 상원, 추첨제의 하원이라는 절충적 개혁안을 주장합니다. 추첨제도를 통해 국회가 구성이 된다면, 지금처럼 대부분이 남자이고, 절반이 변호사이고, 대부분이 부유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사라질 것입니다. 대신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인, 공장 노동자와 비정규직 캐셔, 과학자, 선원, 교사, 의사, 광부, 변호사, 요리사 등으로 구성된, 시민의 얼굴을 한 국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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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첨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느 일본 기업이 생각납니다. 복지가 상당히 잘 되어 있고, 월급이 높아서 이직이 거의 없다는 회사인데 이 회사는 추첨을 통해 부장, 과장, 대리를 뽑습ㄴ디ㅏ. 입사 1개월인 신입사원이 운이 좋으면 전무도 될 수 있습니다.
전무는 전무가 해야 할 고유의 전문 스킬이 필요한데 이게 제대로 굴러가냐 ? 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지만
잘 굴러가더라고요....오히려, 전무가 되면 더욱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무였던 사람이 신입사원이 되면 한시름 놓는다고 하네요.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권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주기에...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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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한 사람을 물리적 힘으로 성폭행했다면, 그것은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협박해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것도 강간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억지로 성교를 하는 것은 모두 강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유형들입니다. 그러나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만이 강간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 역시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갔다가 강제로 당한 것도, 역시 강간입니다. 결혼한 부부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부했을 때 강제로 관계를 가졌다면, 강간입니다. 성폭행에 대한 통계는, 한 가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으슥한 밤에 자신을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사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여성의 '아는 오빠' 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잡지『미즈Ms』는 수천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혹은 성폭력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대학생들이 이런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었고, 소수의 남성 피해자도 있었는데, 남성 피해자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장 다루기 복잡하고 힘든 유형의 성폭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해자의 심리와 피해자의 심리에 있어서 낯선 사람에게 당한 강간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강간 피해자를 구분해서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계를 차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지갑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강도를 당할만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범죄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단지 가해자가 범행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강간 사건, 특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책임을 묻고, 심지어는 가해자보다도 오히려 피해자의 책임이 더 큰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 p.41

여성이 남성의 집에 가거나 차에 탔다고 해서, 그와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남성의 데이트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관계로 보상되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전에 어떤 행동을 했든 상관없이, 누구든 성적인 행동에 대해 거부할 권리가 있고 이 의사 표시는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강간입니다. 강간은 엄연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사건을 강간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해 강간당했을 때, 여성들은 안전한 피해자가 됩니다. 안전한 피해자란, 성폭력 피해 상황을 부정하고 사건을 자신과 분리시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한편 내면의 불안감을 외면하고, 피해 상황에 맞서 심각하게 저항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말합니다. 피해자가 이런 관계에 저항한다면, 피해자가 오히려 강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여성스러워지라고,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자기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직, 간접적으로 교육받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독립심과 자립심이 부족한 상태로 머물 것을, 그리고 신체적, 경제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갈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자에게 보호받는 대신 성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계입니다. 그 결과 여성의 성은 남성의 보호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이해되고, 많은 여성들을 안전한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적 문화와 관습은 여성은 은연중에 강간을 원한다던지, 집에 왔으면 성 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강간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매력 있다고 여겨지는 그런 남성들의 의지에 순응하도록 사회화되는 반면, 많은 남성들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성적 행동을 하도록 사회화됩니다. 물리적 폭력과 강제적 격리, 언어폭력과 통제, 여성의 거부반응에 대한 무시 등과 같은 공격성은, 아는 사람에 대한 강간에 있어서 남성다움으로 포장됩니다.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강간임을 알면서도 아무 죄책감 없이 행하거나, 강간임을 인지하지도 못하기도 합니다. 여성을 살살 꼬셔서 자신의 자취방에 들어오게 하거나 여성에게 술을 먹여서 성관계를 하는 것은 하나의 팁이자 노하우가 되었고, 다른 남자들에게 자랑거리로 말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문화는 여성을 꼬시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른바 '픽업 아티스트'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강간은 극소수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종의 정신병이 아닙니다. 사실 강간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남성들의 행동양식과 큰 차이가 없어요." 어떤 면에서 성폭력 가해자와 비가해자의 차이는, 소년들이 흔히 남자다움이라고 배우는 '마초성'을 얼마나 신봉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남성이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성적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이 대개는 남성들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 p.98

배은경 서울대 교수는, 남성의 성매매, 성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인 성적 욕구보다 오히려 군대나 회식, 접대로 이어지는 남성 집단의 문화와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남성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성관계를 하나의 성과물로 여기거나, 여성을 재화로 보는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홈런을 쳤다던지, 따먹었다던지, 나에겐 왜 안대주냐는지, 가져보고 싶다는 등의 언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공고히 합니다. 남성의 언어는 여성 그 자체를 아동이나 동물, 또는 성기로 표현함으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기도 합니다. 드라마『파리의 연인』에서 백마탄 왕자님인 재벌2세 한기주가 여주인공에게 말하는 "애기야 가자"와 같은 대사처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관계에서는 성적인 강요가 워낙 흔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강간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데이트를 먼저 신청했거나,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할 때, 영화를 보기보다 남자의 집에서 놀 때, 여자가 술을 마실 때 자신의 행동, 강간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친분 있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현실을,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이 남성의 집에 혼자 놀러가거나, 그 집에서 속옷바람으로 있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강간당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성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강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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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 - 세상의 작동 원리와 나의 위치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
아브람 더 스반 지음, 한신갑.이상직 옮김 / 현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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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그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성적 존재'라는 답변도 가능하고, 영화『매트릭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바이러스'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은 엄청나게 다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함축적으로 말하기 위해선 다의적이고 때론 추상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무난한 답변은 아마도 '사회적 동물'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를 거절하는 히키코모리 현상마저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아브람 더 스반은 유럽에서 저명한 사회과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정치학, 역사학, 심리학 등 인간과 관련된 학문을 연구했으며, 라디오 통신원, 다큐멘터리 제작 등 방송인으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고, 수필 등으로 문학성까지 인정받았습니다. 유럽 9개 의회에서 내각이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한 논문을 통해 모델과 역사를 조화시킨 공로로 왕립학술원에 선출되었고,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회 조직과 구조에서 인간의 합리성을 찾고 있습니다. 합리적 선택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할, 협력과 집단에서 등장하며, 그런 네트워크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람 더 스반은 사회학의 핵심 문제들이란 방대한 분석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살고있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인 로버트 네빌은,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적당한 산소와 온도, 식량, 거처, 지식이 있어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로버트 네빌에게 간섭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아브람 더 스반은 독립적인 사람이란 타인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받은 걸 갚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권력도 없고, 존경도 없으며, 재산도 없습니다. 규제도, 터부도 존재하지 않은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지만, 의미도 없습니다. 사람이 탐하는 모든 욕구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때문에 로버트 네빌은, 다른 사람을 원합니다.

타인의 영향력은, 그것이 고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매우 큰 것이다. -《인간, 사회적 동물》p.71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가족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등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해체합니다. 네트워크에 들어간 이상 누구라도 타인이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질 수 있으며, 재화를 타인이 쓰지 못하도록 배제함으로써 재산이 생겨나고, 각자 얻은 만큼에 따라 계층에 소속됩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경멸하며, 서로에게 합리적인 기대를 하며 살아갑니다. 사회화와 문명화 과정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며, 사회적 관계를 통해 언어, 종교, 법, 예술을 탄생시키고, 시장, 기업, 국가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됩니다.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권력관계의 우위성을 추구하는 자도 있고, 타인에게 존경만 받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더 많은 타인이 재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배제함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적 관계의 가치들은 다른 사람이 있기에 가치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불평등을 심화시킴으로서 네트워크가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과거엔 그런 사회적 관계에 대한 도전은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해제하거나, 죽창을 통해 해결했지만, 세계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글로벌화된 지금은 지역적 도피라는 해결책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회성원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빈곤에 개인적으로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기여하는 복지제도를 통해 국가가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사회의식을 낳았다. 풍요로운 나라들이 주변부에 사는 극빈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정책을 개발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에게도 이롭다는 의식이 번영한 나라 사람들에게 먼저 생겨야 한다. - p.226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사회적 관계를 구성해야 하며, 사회적 관계는 상호의존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상호의존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문제들,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등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결해야 합니다. 왕은 백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 통수권은 택도 아닌 수중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노동 대중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입니다. 사회 전반의 현상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학문인 사회학은 이런 구조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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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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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1년이 넘은 지금, 일각에서는 사건 초기의 동정적인 여론과 다른 여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가 너무 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역풍이 등장한 계기는, 정부가 보상 중 하나로 단원고 특별전형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미 보상금도 엄청난 금액인데, 대학특례는 과하다는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보상금은 국민성금의 금액과 보험금, 청해진해운의 배상금 등으로 이루어져있어 혈세 논란은 부적절하며, 특별전형 역시 기존에 다른 특별전형도 많았으며 유가족이 요구한 사항은 아니라는 점에서 유가족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부분입니다. 다른 특별전형인 서해5도 특별 전형을 통해 인하대와 인천대, 목포해양대, 동덕여대, 관동대 등을 가는 것은 아무런 이슈도 되지 못했지만 단원고 특별전형이 이슈가 된 것은, 어쩌면 그 특별전형의 혜택에 소위 SKY라 불리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초등학생들에게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 고 말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 이야기는《시크릿》이나《꿈꾸는 다락방》같은 자기계발서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 책들은 R=VD 같은 있어보이는 수식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꿈꾸면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희망을 줍니다. 이 논리에서 성공하는 것은 오직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며, 실패하는 것은 간절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계발 사상은 현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데 한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미키 맥기의 지적처럼, 자기계발 사상은 노동자들에게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며, 스스로 기업가이고, CEO이며, 하나의 브랜드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이름 석자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예술품이며, 누구나 원하는 상품이 되는 것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저자 오찬호는 이 자기계발의 사상 속에서 우리나라 이십대의 자화상을 봅니다.

오찬호는 이십대 청년들이 비정규직의 열악한 환경에 눈물을 흘리고, 노동자의 인권을 중시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비정규직들이 투쟁을 통해 정규직이 되는 것, 노동조합이 파업을 통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얻는 것에 대해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 반감의 근간에 자기계발의 이론이 있으며, 자기계발로 훈육된 이십대를 발견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비정규직 문제, 아르바이트생의 비인간적 환경,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들은 그 구조적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계발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비정규직들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비정규직이 된 것이니,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구는 분에 넘치는 요구가 되며, 아무 이유없이 실업자가 된 노동자의 문제는 평소 자기계발을 통해 실직 이후의 삶을 대비해놓지 못한 노동자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이십대가 보기에 공부도 안하고, 놀고먹던 그들이 요구를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기계발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들이 개인의 개성을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를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강요는 주로,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 이러저러하니 평소 거기에 맞춰 잘 준비하라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다이어트 해라, 밝게 웃어라, 심지어는 성형도 불사해라, 남이 화를 내도 참으라는 등 갖가지 주문이 나열된다. 이 모든 것은 '가장 상품성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시키는 대로 상품성을 갖추었는데, 판매는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p.149

이런 이십대들의 배경에는, 오직 취업이란 목표만을 위해 자기계발을 계속하는 이십대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십대는 취업을 위해 외국어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횔동, 공모전 참가, 외모 가꾸기, 자기소개서 작성 연습 등 엄청난 양의 자기계발을 해야 합니다. 평소 좋아하던 악기를 배워본다던지, 좋아하던 작가의 소설책을 읽는 것은 자기계발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고싶은 회사의 토익 기준이 900점 이상이라면, 890점이란 성과는 자기계발에 실패한 영역입니다. 이 모든 자기계발은 곧 자기 자신의 통제, 시간관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더 노력한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시간관리를 더 잘 해온 사람은 사회적 우대를 더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덜 노력한 사람에 대한 차별은 정당화됩니다. 이 노력의 영역은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사장님이 A라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 성희롱을 한다고 해도, B라는 아르바이트생이 성희롱을 이겨낸다면, A 역시 성희롱을 참아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희생하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의 박탈감과 불안감은, 모두를 가해자로 만들고, 또 그래서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불공정성이 유지되는것은 모든 사회적 구성원이 구조를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이런 구조를 접하고, 훈육될 수 있는 최초의 시스템은 수능입니다. 수능을 통해 학생들은 누구는 일류가 되고, 누구는 삼류가 된다고 재단당합니다. 대학교는 이름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고, 대학교 내에서도 학과별로 순위가 매겨집니다. 학벌의 낙인은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서울대를 나온 사람은 그 후에 공부를 안해도 평생 공부 잘한 사람이 되고, 지방대를 나온 사람은 그 후에 엄청난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아도 평생 공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매년 수능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이 있는 것처럼, 수능은 정말로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수능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서울대 학생들도, 하버드 유학파 앞에서는 별 수 없습니다. 수능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상처를 얻기 위해 새로운 재단 기준, 취업을 통해 달려갑니다.

간단히 말해 만약 모든 사람이 '그들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바쁘다면, 누가 집을 청소하고, 저녁을 짓고, 아기에게 귀저기를 채우고, 아이들을 양육할 것이며, 공장에서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누가 거리를 청소하고, 택시를 몰며, 쓰레기차를 채울 것인가? 모든 돌보는 일은 개인이 자기형성의 더 커다란 일, 즉 항구적으로 다듬어진 예술작품으로서의 삶의 비전을 추구할 때, 무의미하고 저열한 가치로 평가된다.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지배적인 자아에 대한 소설은, 그러한 이상이 노동에 대한 일의 우위를 내포하고, 타인의 노동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자아의 육체적 나약성까지 부정하는 이중부정을 함축하고 있다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기계발의 덫》p.269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하고, 취업도 더 잘된다는 연구결과는 분명 문제의 초점을 개인보다 환경, 사회에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의 논리 앞에서 모든 불공정함은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의 대학이름을 듣자마자 자신을 재단하는 현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대학을 듣자마자 다른사람을 재단하는 현실 앞에서 모든 아이들은 자기방어를 해야하고, 남을 비웃어야 합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쇠사슬을 자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십대들은 사회의 선택을 받기 위해 무가치한 자기계발들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쇠사슬을 갈고 닦고, 다른 노예의 쇠사슬이 더럽다며 자신의 상품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에겐 무자비한 멸시를, 차별당하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선 극한의 자기계발을 하는 이십대에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는 없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라 부릅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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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 - 발암물질에서 방사능까지, 당신의 집이 위험하다!
최병성 지음 / 이상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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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플라스틱을 이용해 국수를, 비닐로 미역을, 공업용 젤라틴으로 가짜 샥스핀을 만들어 파는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중국의 연금술이라 비아냥거렸고, '중국산'에 대한 이미지는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의 천시원 교수는 중국의 채소 총 생산량 4.4억 톤 가운데 약 70퍼센트가 버려진다고 말합니다.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중국의 식품 안전을 염려해 중국산을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나은 제품도 있습니다. 바로 시멘트입니다. 저자 최병성은 중국산 시멘트가 한국산 시멘트보다 압도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멘트의 이미지는 석회, 모래, 물로 만든 시멘트 모르타르일 것입니다. 워낙 단순한 조합이기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으리란 생각은 하기 힘들고, 특히 시멘트는 관급자재의 하나로서, 정부가 신뢰를 보증하는 상품입니다. 시멘트의 강도 규정은 문제가 없지만, 유해성분의 표시규정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산 시멘트를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들은 폐농약, 폐페인트, 폐타이어, 폐고무, 폐비닐, 폐유, 하수 슬러지, 공장 슬러지, 제철소 슬래그 등이 있습니다. 삼성전자, LG전자의 반도체 공장에서 나오는 슬러지들도 시멘트에 들어갑니다. 선진국일수록 소비자가 자신이 만들어낸 쓰레기들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쓰레기는 바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건설경기 약화로 죽어가던 시멘트 공장들이 쓰레기 처리비를 받아 연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습니다. 폐기물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시멘트는 쓰레기 소각의 새로운 해결책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시멘트는 제조 과정에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온갖 비가연성 산업쓰레기까지 원료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멘트 소성로를 소각시설의 한 종류로 인정해 줌으로써, 시멘트공장은 적법하게 처리비를 받고 쓰레기 시멘트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산 시멘트는 납, 크롬, 카드뮴 등 인체 유해 중금속 비율이 다른 나라의 시멘트보다 훨씬 높습니다. 중국산 시멘트에서는 발암물질 6가크롬이 검출되지 않았지만, 한국산 시멘트에서는 환경부 기준의 5배가 넘는 110ppm이 검출되었습니다.

대구 가톨릭대 산업보건학과 허용 교수는 "여러 가지 피부 알레르기를 중심으로 해서 시멘트의 내용물하고 원인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게 밝혀져 있다"고 강조했고, 동국대학교 이애영 교수는 "어린이들 같은 경우에 크롬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면, 집에 있는 시멘트 같은 것이 충분히 원인이 될 수 있다"며,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의 첩포검사에서 크롬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토피를 앓는 환자에게 크롬 반응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는 크롬을 다량 포함한 시멘트가 아토피의 한 원인임을 알려준다. - p.85

국민들이 살아가는 거주공간을 만드는 시멘트에 쓰레기들을 활용한다는 방안은 경제학적으로 완벽한 대책이었습니다. 시멘트 회사는 쓰레기 처리비를 받아 돈 벌수 있으니 좋고, 정부는 기업이 살아난다고 하니 좋고, 외국은 값싼 비용으로 자국의 쓰레기들을 한국에 버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국은 시멘트 재료로 폐타이어를 사용하기 위해 일본, 미국, 호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전세계에서 폐타이어를 수입하고 있으며, 일본의 석탄재를 수입해 시멘트를 만드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석탄재는 우라늄, 토륨, 라돈과 같은 방사성 원소 뿐만 아니라 비소, 붕소, 베릴륨, 크롬, 망간, 몰리브덴, 납, 인, 안티몬, 셀렌, 바나듐, 아연이 검출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회사들이 열정적으로 외국의 쓰레기들을 한국에 들여오는 이유는, 당연히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공장의 슬러지를 전문 산업폐기물 소각장으로 보내면 톤당 50~60만원이 들지만,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면 단돈 10만원에 처리가 가능합니다. 일본은 자국내에서 석탄재를 매립하려면 톤당 20만원의 처리비용이 들지만, 톤당 5만원만 주면 한국의 시멘트 공장들이 서로 쓰레기를 가져가기 위해 경쟁합니다. 일본은 한국에서 쓰레기를 치워주니 국토도 청결해져서 좋고, 쓰레기 처리비용도 절감해서 좋습니다. 한국의 시멘트 공장들도 돈을 벌수 있어서 좋습니다. 더구나 일본에서 쓰레기 처리비로 받은 돈은 그 성격이 오묘해 세법상 근거가 없어 세금도 내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습니다.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2013년 한 해 동안 일본 석탄재를 쌍용양회가 61만 톤, 동양시멘트 41만 톤, 한라시멘트 11만 톤, 한일시멘트 17만 톤 수입했다. 그리고 국내 시멘트 공장들이 일본에서 쓰레기 처리비용으로 받은 돈이 쌍용 296억 원, 동양시멘트 85억 원 등 총 443억 원에 이른다. 국내 시멘트 공장들은 시멘트를 만들어 팔기도 전에 일본에서 받는 쓰레기 처리비용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본 쓰레기를 수입하는 것이다. - p.158

아쉬운 점은, 일본에서 석탄재를 수입하지 않아도 이미 한국에는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석탄재들이 넘쳐나서 처치 곤란할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국내 화력발전소들은 석탄재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석탄재 매립비용으로 3000억 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왕 쓰레기를 사용할 거라면 국내산 석탄재를 사용해도 되지만, 시멘트 회사들이 열심히 일본산 석탄재를 사용하는 이유는 일본이 처리비를 더 많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기업 입장에선 가장 돈이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윤추구를 극대화했지만, 그것이 국가의 관점에서도 이익이 되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자국에 쓰레기가 이미 넘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수입하고, 자신의 쓰레기는 더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땅에 묻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쓰레기 시멘트가 허용된 1999년 이후부터 지어진 건물들, 특히 아파트들은 대부분 이런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고 보입니다. 쓰레기들 중에서도 따로 매립해야하는 유독성 지정폐기물 수준의 시멘트로 만든 아파트는 조사 대상의 60퍼센트에 달했습니다. 32평 아파트 기준으로 시멘트값은 평균 130만원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사용하지 않은 시멘트로 만들면 평균 160만원 정도가 듭니다. 설문조사 결과 87퍼센트의 국민들은 30만원을 추가로 지불하고서라도 깨끗한 시멘트로 지은 집에 살 의향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최근 지어지고 있는 몇몇 아파트의 경우 입주예정자들이 시멘트의 변경을 요구해 건설사가 반영한 적이 있습니다. 시멘트를 바꾸는 일은, 소비자들이 요구하기만 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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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구 2018-04-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로 정부가 하는 행정이 어이가 없네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국민 여러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