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
엘리자베트 바뎅테 지음, 최석 옮김 / 인바이로넷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현대사회에서 여성이 하지 못하는 일이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과거 남자들의 일이라고 여겨졌던 광부나 건설노동자는 물론이고 군인마저도 여성이 참여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기술의 발전, 민주주의의 등장 등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여성의 권리는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것은 곧 오랜 세월 동안 사회를 지배하던 체제인 가부장제가 붕괴할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여성의 도전에 남성들은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남성이 두려워하는것, 그것은 여성성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배척해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두려운 여성성이 여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 아니라,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라는 것입니다.

왠만한 욕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남자들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너는 여자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여자같다는 말은 외형적인, 생물학적인 개념에서 여성이 아니라, 문화로서의 여성성을 의미합니다. 가부장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 체제에서 남성이 남성취급을 받지 못하고 여성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남성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여성성을 부정해야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오줌 멀리싸기와 같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성들은 과격한 행동, 여성 멸시, 근육질 몸매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평생동안 남성성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남성들은 두 가지 형태의 여성성을 증오하는데, 하나는 여성이 지닌 여성성에 대한 증오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이 지니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증오입니다. 이 남성의 여성성은 곧 여성적인 남성, 동성애를 의미하며 동성애 공포증, 호모포비아로 이어집니다. 여성화된 남성을 통하여 일반 남성들은 자신들이 허약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들, 즉 수동성이나 민감한 감수성 등의 여성적인 특성들이 자신 내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동성애 공포증은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동성애 욕망에 대한 은밀한 공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로랑 베그의 실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인 남자들을 불러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영화들을 보여준 결과, 그런 영화를 보면서 발기를 경험할 확률은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에 의한 지배도, 권력에 의한 지배도, 경제력에 의한 지배도 아닌 성에 의한 지배. 게다가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배. 즉 공포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쾌락에 의한 지배야말로 궁극적 지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에는 이러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포르노그래피가 포르노 소비자인 남성에게서 모든 사회적인 속성을 제거한 뒤 다시금 남성성을 회복시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은 쾌락의 원천으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p.130

여성성에 대한 증오는 여성에 대한 증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부모에게서 출발해 부모에게서 떠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를 위해 부모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성에 대한 증오가 강하게 이어지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양육은 전적으로 여성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만 성장하며, 부성애의 부재는 남성에게 더 치명적입니다. 남성은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도 자신의 여성성을 상처입혀서는 안됩니다. 남성의 여성성은 비록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 숨겨야 했지만 없애선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제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등장은 결국 새로운 남성성의 필요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변혁기의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형태의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성들을 성적으로 갈망하면서도 결코 한 여자에 집착하지 않는 남자, 남성 동료들을 시합이나 전쟁 또는 스포츠에서만 만나는 사나이, 여성적인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냉혹한 남자 같은 하드보일드하고 터프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던 남성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대부분의 사회가 이러한 남성의 이상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은 남성성의 전통적인 모델이 쇠퇴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남성은 더이상 여성을 지배하는 객체도 아니고, 남성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여성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사고되는 문화도 아닙니다. 때문에 새로운 남성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일 것이라고 엘리자베트 바뎅테는 지적합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순전히 외향적인 사람이나 순전히 내향적인 사람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은 정신병동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남성성만을 지닌 남성, 순전히 여성성만을 지닌 여성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정신병동에 있을 것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포용하는 것. 그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어렵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남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통령과 종교 - 종교는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백중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국가들의 헌법에는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종교활동을 하고 특정 종교단체를 지지하는 행동을 하거나, 종교단체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법으로 금지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정교결합체제가 지닌 폐해를 수없이 목격해온데 대한 교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의 특징과 다수의 투표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의 특징상 그 관계를 칼처럼 구분하기란 사실상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교분리는 정부의 노골적인 행동을 지탄하는 정도에서 그치거나, 특정 종교단체가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을 그 신도에게 명령하는 것을 자제하는 정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 백중현은 한국의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그런 최소한도의 선을 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종교의 권력화는 정치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중현은 1990년대 초 개신교의 ‘김영삼 장로 대통령 만들기 운동’을 계기로 정치권과 종교라는 주제를 연구했습니다.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모든 대통령과 그 주변 핵심인물들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한국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가 그 주인공들이며, 그중에서도 개신교는 가장 많은 사건과 논란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한말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개신교는 광복 이후 미국의 종교라는 점에서 더욱 권력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할줄 아는 한국인들 상당수가 개신교였기 때문에 미군정 하에서 개신교는 큰 성장을 이룹니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은 개신교에 특혜 정책을 쏟아냈는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개신교식으로 바꾸고 군종제도를 도입해 개신교에게 독점권을 줍니다. 첫 민간방송국으로 기독교방송CBS를 인가하는가 하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합니다. 6.25를 거치며 북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개신교는 뿌리깊은 반공, 친미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이승만 당시 천주교인들은 장면을 지지했는데, 이승만은 이를 견제하고자 천주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군사정권과 개신교의 밀착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교회 내 군사 용어'다. 지금은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군사 용어는 여전히 교회 내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다. 새벽기도 총진군, 전도 특공대, 구국 기도회, 영적 전쟁 등이 그런 경우다. 교회의 행사를 군사적 방식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군과 교회의 밀착 관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국 외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는 "한국 교회가 군사 문화에 만연되어 있다"면서 담임목사 명령 한 마디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상명하복 문화'와 '군사용어'를 들었다. - pp.122~123

개신교만 가능했던 군종제도 덕분에 군에서는 개신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배경을 등에 업은 박정희는 체제 유지를 위해 반공, 친미를 외치며 개신교를 포섭했습니다. 개신교는 박정희의 지원 하에 전군 신자화 운동과 대형 집회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시작된 산업화로 인해 교회는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을 위로하며 공동체를 제공해주었고,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초대형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박정희는 형평성 차원에서 불교에게도 지원을 했는데,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불교를 지원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후반부에 들어서 군사정권에 맞서는 종교인들의 저항운동이 생겨나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핵심에 자리잡게 됩니다. 천주교와 불교 그리고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민주화운동에 가세했습니다. 전두환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자 종교계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불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전두환은 32,000명의 군인을 동원해 5,731개 사찰에 일제 수색을 벌여 불교판 삼청교육대를 보낸 10.27법난을 일으켰습니다. 전두환의 탄압 이후 불교는 신자가 40%나 감소해 교세가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불교와 달리 개신교는 신군부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계복음화대성회 등 대형 집회를 연달아 개최해 권력과 가까운, 이른바 '잘 나가는' 종교임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국가 신도는 신사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규제, 천황의 사제 역할, 국가신도의 의식 창출과 후원, 일본과 해외 식민지의 신사 건립, 취학 아동들에 대한 신도 신화에 입각한 교육과 그에 따르는 강제적인 신도 의식 참여, 그리고 타종교집단의 확립된 신도 신화의 일부 양상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에 근거한 그들에 대한 박해를 포괄하는 체제적 현상이었다. -《전쟁과 선》p.44

천주교의 박종철 고문사건 성명으로 시작한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을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10.27법난을 해결하기 위해 불심을 달래야 했고, 전통사찰보존법을 만들어 불교를 지원했습니다. 5.18 이후 개신교는 반공, 친미 성향의 보수 개신교 세력과 평화, 반미 성향의 진보 개신교 세력으로 분리되었는데, 노태우 시절부터 등장한 남북 평화통일 분위기는 진보 개신교 세력에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이에 대항해 개신교 보수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출범했습니다. 한기총은 노태우 정권의 지원 하에 성장해 대북, 대미 관계에 대한 사회적 발언권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세력은 장로 대통령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대형 교회 중심의 인원수와 조직력은 실로 대단했고, 그 결과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집권 당시엔 불교가 탄압을 받았습니다. 육군 17사단 훼불 사건, 육군특수전학교 인분투척 사건등이 발생했고,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란 이유로 기념관과 고궁등에 있는 연못에서 연꽃을 뽑아버렸습니다.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의 성소가 기독교회관이었고 80년대의 성소가 명동성당이었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조계사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취임 초기부터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에 대한 공금 횡령, 성추행 사건, 세습문제 등에 대한 방송 보도가 나가면서 보수 개신교는 김대중 정권과 갈등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햇볕정책으로 인해 보수 개신교가 가진 반공 정체성과 양립할 수 없었고, 보수 개신교는 조선, 중앙, 동아라는 보수 언론과 연대를 모색하며 反정부 운동을 펼칩니다. 보수 개신교의 반정부 투쟁은 노무현까지 이어집니다. 노무현은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했고,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자 했는데, 이는 보수 개신교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학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장 친인척의 이사 비율 축소 등의 내용을 담은 사립학교법 개정은 당시 중학교 123개, 고등학교 165개의 사학을 가지고 있던 개신교 입장에선 종교탄압으로 비춰졌습니다.

종교 단체 기부금 내역 공개, 종교인 과세 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보수 개신교 밑바닥까지 '노무현 정부가 개신교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정서가 팽배해졌다. 김지방은 이를 개신교의 권력화와 연결시켜 분석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교회는 오히려 자신들이 지난날 누렸던 특혜가 점점 위협받고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니 정치권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교회의 힘을 인정하고 두려워해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된다. 대형 교회 개신교계 인사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反기독교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 p.218

개신교가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렀던 만큼, 또다시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총력전에 나섰습니다. 김진홍 목사가 만든 뉴라이트와 한기총은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이 됩니다. 한신대 교수 강인철은 개신교 유권자수를 본 결과, 무려 587만표가 움직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를 거치며 개신교는 여전히 파워 넘버1임을 입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종교법인법과 종교평화법은 개신교의 눈치를 보느라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습니다. 또한 차별금지법은 두 차례 추진되었지만 보수 개신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종교, 사상, 성적 지향의 차별금지 조항 때문에 타종교나 이단을 비판할 수 없고, 종북 세력을 비판할 수 없으며,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중현이 보여주듯이 종교는 외부의 영향력 없이 오롯이 존재하기 힘듭니다. 정치권력자들의 종교성향 또는 종교탄압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정치권력이 종교를 신경쓰는 이유는 종교가 매주 수백만명의 신도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학습하고 교제하는 사회활동인 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종교 역시 그 영향력을 통해 정치권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종교가 정치권력화되기 쉽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미래는 동성애 허용이나 낙태문제와 같은 교리에 반하는 문제들보다는, 권력화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자지라
모하메드 엘나와위 & 아델 이스칸다르 지음, 김용현 옮김 / 홍익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9.11 테러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고,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낸 것 중 하나는 카타르의 방송국 '알자지라' 였습니다. 알자지라는 9.11 테러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주장한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비디오 테이프를 독점 공개함으로서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송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알자지라는 단순히 오사마 빈 라덴의 한 순간의 선택으로 유명해진 방송사는 아닙니다. 알자지라는 이미 그당시에 아랍과 다른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언론사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랍의 언론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알자지라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알자지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소유의 오빗 라디오 텔레비전과 BBC의 아랍지부 사이의 계약파기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BBC의 아랍지부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자 소속 전문가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는데, 이들을 카타르의 셰이크 하마드 왕자가 고용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하마드 왕자는 알자지라가 정부의 조사와 통제, 또는 조작에서 완전하게 독립하여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하는 방송사로 발전하기를 원했고, BBC의 자유로운 방송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하게 됩니다. 비록 알자지라가 카타르의 지원금을 많이 받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들은 하마드 왕자의 바램을 상상이상으로 잘 실현시키게 됩니다.

소국 카타르의 영세한 방송국 알자지라가 순식간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아랍 최고의 방송국이 된 비결은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들을 보여줬습니다. 가감없이, 오직 사실만을 중도적 입장에서 가장 빠르게 보도했습니다. 다른 아랍의 언론들은 대부분 왕가의 소유, 정부의 소유다 보니, 땡전뉴스와 같은 보도만을 하거나 종교적,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방송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알자지라는 정부의 부패, 정치적 의지의 부재, 이슬람의 보수주의, 민주주의의 결여, 종교적 해석 등을 과감히 방송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아랍 국가들은 알자지라와 카타르 정부에 적대적인 반응을 표명했지만, 알자지라를 중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위성방송으로 만들게 됩니다.

나는 그동안 아랍의 발전을 방해했던 것이 언론 자유의 부재라고 확신한다. 우리 사회의 더러운 것들이 그동안 양탄자 밑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아랍 세계는 서서히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알자지라가 거기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다. - p.187

알자지라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토크쇼 '상반된 견해'나 '하나 이상의 의견'등은 여러 논쟁적인 이슈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지닌 게스트들을 초청해 토론하게 합니다. 이 토크쇼엔 아랍의 유명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고위관리, 종교적 이유로 추방된 이슬람 민주주의자,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관료까지 출연합니다. 이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고 때론 게스트가 방송도중 나가버리는 사고도 일어나지만 알자지라는 그런 격렬한 논쟁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논쟁이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자지라의 방송은 아랍인들을 위성티비 앞으로 모여들게 만들고 있으며, 위성티비를 가지지 못한 아랍인들은 녹화된 비디오를 구입해 시청하기도 합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사가 나온다. 하물며 사건을 다루는 스트레이트 취재가 아니라 현상을 다루는 문화나 특집류 기사에서는 똑같은 보도자료를 배포받거나 같은 인물을 인터뷰하고도 기자의 관점과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의 생산물이 나온다. 그것이 신문의 차이를 만든다.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p.462

1999년 후세인의 국군의날 연설의 특종, 2000년 2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보도 등으로 신뢰를 쌓은 알자지라는 아랍에서 가장 개방된 방송사, 가장 언론다운 언론이라는 평가를 받은 덕에 오사마 빈 라덴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할 방송사로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아랍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아랍 정부의 입장에서, 혹은 서구의 미디어를 통해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알자지라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서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자지라의 이러한 행동들이 거의 모든 아랍국가들을 포함해 미국, 이스라엘 등의 분노를 가져오게 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장 알자지라를 주목하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알자리라의 행보는, 미국 언론의 발전사와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테드 터너가 걸러지지 않은 뉴스를 24시간 방송하는 채널을 들고 나타난 타이밍은 절묘했다. 1980년대 CNN의 출범과 사세 확장은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이 강요하는 서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듯 보였다. 터너 자신이 그랬듯, CNN은 기존 뉴스 방송의 변절자이며 네트워크 혹은 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표현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CNN은 초기에 전통적인 뉴스 매체와 학계 그리고 정치권으로부터 전방위 공격을 받아야 했다. -《현재의 충격》pp.72~73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꼭 등장하는 것이 정부에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언론의 등장입니다. 서구는 물론이요, 우리나라에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저지른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유린을 보도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정보기관의 감시와 미행, 취업 방해, 구속과 연행과 고문, 공민권 제한 등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동아투위는 조선투위와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와 함께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6월항쟁에 도움을 주었고, 동아투위의 주요 인원이 기반이 되어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등 격변의 한국민주화 운동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철옹성같은 30년 독재를 자랑하던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사건 역시 언론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짐작케 합니다. 아랍의 집권자들과 미국의 패권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민주주의라는 변화의 바람이 아랍에도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타르의 용기있는 방송사, 알자지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
토니 클리프 지음, 정성진 옮김 / 책갈피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냉전 시대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강대국 소련의 붕괴는 평면적으로 자본주의의 승리이자 자유경쟁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때 봤던 이원복 교수의 책에서도 공산주의 국가는 정부가 일자리와 봉급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태해진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네티즌들은 공산주의의 비합리성을 대학교 조별과제에 비유해서 비꼬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비유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학교 조별과제가 일부의 노동이 맺은 결실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면, 소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서구 세계 못지않게 자본주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경쟁적이었고, 안타깝게도 전체주의적이었고 제국주의적이었습니다.

토니 클리프의 이 책은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절정에 달했던 1948년에 출간되었고, 계속 보완되었습니다. 토니 클리프는 소련이 미국과 함께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서고, 우주경쟁시대를 자랑스럽게 보도하고, 그것이 사회주의 진영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을 지켜봤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것을, 또 사회주의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소련이 붕괴한 오늘날에 와서 클리프의 이론은 소련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소련은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해됬으며, 소련은 자신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외쳤지만, 북한의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민주주의국가가 아닌 것처럼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혁명 초기, 소련이 왕정제를 극복할 무렵에는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방어할 권리, 즉 노동조합의 결성의 자유가 있었고, 노동자들이 과도한 노동을 하지 않게 해주는 법적 보호장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주의적 요소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22년만 하더라도 노동자들은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노동법으로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1931년에 이르러서는 어떤 노동자도 정부의 특별 허가 없이는 자신의 거주지를 바꾸지도, 직장을 바꾸지도 못했습니다. 소련 노동자들의 임금은 성과급으로 지급됬는데,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고취시키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누진성과급을 지급했습니다. 노동자의 지각 또는 태만시간이 20분을 초과할 경우, 그 노동자는 즉각 해고될 수 있었는데, 해고는 곧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과중하고 비위생적인 노동에 있어서 남녀는 평등하게 배치되었습니다. 광부, 부두하역, 철도 노동자처럼 힘이 필요한 직업에도 남녀의 차별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1944년에 이르러서는 90퍼센트에 달하는 소련 노동자들이 자유경쟁 체제에서 일했습니다.

소련 노동자들의 노동은 자본주의적 노동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형태였습니다. 노동생산성은 계속 증가했지만 실질임금은 계속 하락했습니다. 정치적 자유도 없었고, 노동자들을 지켜줄 최소한의 장치도 없었습니다. 소련의 노동은 노예노동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관료의 부실 경영과 낭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민의 노력과 자기희생 덕분에 초기 소련은 공업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런 소련의 자본의 시초 축적기는 마르크스가《자본》에서 비판한 영국의 실상을 닮았습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약탈된 부가 유럽을 살찌웠고, 어린아이의 하루 16시간 노동이 초기 영국 산업을 이끌었듯이, 후진국이었던 소련이 빠른 시간에 강대국으로 부상하는데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라는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빠른 자본 축적을 하게 된 명분에는 노동자들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겠다는 모순적 상황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은 물론이고 트로츠키도 사회주의 혁명은 한 나라에서는 완수할 수 없다는 국제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체제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체제이며, 소련이 완전히 고립되지 않는 이상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일국 단위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을 수행한다면, 머지않아 자본주의적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견은 옳았습니다. 나라의 후진성과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은 급속한 자본의 축적을 요구했고, 노동자의 계급화를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관료의 지배계급화 현상을 불러왔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을 따라잡기 위해 관료가 모든것을 명령하고 주도하는, 사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실제로 국가를 '소유'한 채 축적 과정을 통제하는 소련 관료는 자본의 인격화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관료는 전통적 자본가 계급의 부분부정인 동시에 이 계급의 역사적 사명의 가장 참된 인격화이기도 한 것이다. 관료 계급이 소련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친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소련에서 지배적인 자본주의 생산관계라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 사회의 가장 정확한 명칭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다. - pp.186~187

클리프는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의 일본 제국주의에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4대 재벌이 모든 주식회사 자본의 6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자본이 집중된 일본과 국가와 관료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공통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나라 모두 타국을 약탈하고 착취하는 전쟁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과잉생산 공황과 마찬가지로 전쟁경제도 자본주의적 요소입니다. 소련은 위성국가들을 노동력적인 면에서, 자본적인 면에서 착취했고 새로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 팽창해야 했습니다. 소련 관료들은 끊임없이 생산성 향상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투자의 압도적인 부분을 임금이 아닌 생산수단에만 돌렸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은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소련은 강대국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이 서방의 생산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한계에 달하면서 생산성이 세계 수준에서 떨어지게 되자 점점 더 많은 자본을 문제 투성이인 산업에 투자하게 됩니다. 취약한 소련은 서방과 경제적으로 경쟁할 능력이 떨어졌으므로 경쟁은 주로 군비경쟁의 형태를 취했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계속 떨어졌습니다.

오랜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대중을 끊임없이 착취하며 성장하는 제국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고,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착취당하던 위성국가들은 독립투쟁을 시작했고, 빈부격차, 정치적 억압, 언론의 부재 등 내부에서도 여러 문제가 터졌습니다. 클리프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도 아니요, 인류에게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은 없을거라는 담론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소련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변종인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점에서, 서구 자본주의 체제와도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소련의 붕괴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회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마르티아 센이 말한 것처럼 진정한 발전은 자유로서의 발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주노인 - 그들은 왜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노인이 되었을까
후지와라 토모미 지음, 이성현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노인들이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노인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 범죄 증가가 단순히 고령화사회라서 노인 인구가 늘어난 것 때문은 아닙니다. 노인 범죄 증가율은 노인 인구 증가율보다 높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중 61세 이상이 저지른 범죄의 비율은 2000년 2.7%에서 2012년 7.3%로 3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만의 사례는 아닙니다. 옆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경우 고령자 수가 두 배 증가했는데, 범죄자는 다섯 배 증가했습니다. 저자 후지와라 토모미는 이런 현상을 '폭주 노인' 이라고 말합니다.

노인과 젊은이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생각은 사회 전반에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혈기넘치고 비판적이고 반전운동을 하는 등의 진보적인 이미지라면, 노인들은 분별력 있고 느긋하며 관용을 베푸는 보수적 성향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의 이미지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꽃보다 할배식의 변화가 긍정적인 관점에서 노인의 변화를 보여준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갈등을 빚거나 폭력을 서슴치 않고 있는 노인들의 증가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노인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왜 노인이 폭력적으로 변화했는가? 후지와라 토모미는 노인이 변화한게 아니라 사회가 변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노인들은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사회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켰습니다. e메일은 순식간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SSD를 장착한 컴퓨터는 부팅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습니다. 현대사회는 기다림의 해방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맛집엔 줄을 서며 음식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문제는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즐거움적 관점에서만 선택하다보니, 기다림을 강요받는 상황에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택배가 늦어지면 스트레스를 받고, 지하철이 늦어지면 스트레스를 받고, 차가 막히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헛되이 보내선 안 된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해보는 시간표 만들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현대의 권력은 곧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권력자나 부자도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 평등성을 초월하는 것은 시간을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의 권력이란 말 그대로 시간을 사유물화하는 것이다. - p.87

일어나면서 잘때까지, 모든 시간을 계획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자는 시간까지 줄여야 합니다. 몇시엔 학원에 가야 하고, 몇시엔 독서를 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권력입니다. 1초에 150달러를 버는 빌 게이츠가 100달러짜리 지폐를 주울것이냐 하는 질문의 핵심은 1초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얼마를 더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시간을 절약하면서 동일한 부를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권력자들이 가진 힘도 시간에 있습니다. 자신은 원하는 시간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침범할 수 있는것, 그것이 권력입니다. 때문에 기다림을 강요받는 것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며, 좌절과 패배감, 그리고 분노를 불러오게 합니다. 점점 더 발전하는 정보화 사회는 구성원들의 시간을 점점 절약시켜 줍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최첨단 정보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에서 배제되어 간다는 생각을 느끼게 되고, 때론 분노합니다.

공간적인 관점에서도 현대사회와 노인들의 괴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점점 일터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베드타운이라는 말처럼 집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마을 가게주인과 손님들이 서로 잘 알고 대화하던 시대, 많은 가족들이 한 공간 안에서 살아가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시장을 보고 어렸을 때부터 개인방에서 생활하며 노래는 혼자 듣는 시대입니다. 공간의 관점에서 현대인들의 갈등은 개인 영역의 침범입니다. 층간소음 문제, 기차에서의 김치냄새 문제가 새롭게 등장한 사회적 갈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갈등이 된다는 것을 노인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과거의 방식대로 생활하면,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킵니다.

'피아노 소음살인사건' 전에 소음사건은 한 건이 기록되었을 뿐인데 5년 후에는 20건, 상해사건을 합하면 3백 건으로 급증했다. 소음 자체가 급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폭력을 휘두루는 감성이 급증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소리의 영역 침범에 대해 사람들이 신경질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 p.162

앨리 러셀 혹실드는《감정노동》에서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새로운 상품, 감정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웃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짤리기 싫다면. 웃지 말아야 할 직장은 없습니다. 근엄한 검찰청의 검사부터, 핫팬츠를 입고 서빙하는 후터스의 직원들까지 모두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판매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소비자도 웃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소비자가 아직은 갑의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친절한 서비스에는 착한 소비자로 대응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매너입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선 자연스럽게 한 줄로 서고, 운전중엔 감사의 표시로 비상등을 깜박입니다. 정중화된 질서를 읽어내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점차 배제되어야 할 존재, 사회의 트러블메이커가 됩니다. 노인들은 새로운 질서를 읽어내는 것에 점점 힘이 듭니다.

동사무소에서 아무 이유없이 격노하는 할아버지, 자동판매기 사용이 느리다고 서로 싸우는 할아버지들, 매일 책을 읽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주의를 주자 전기톱으로 위협하고 경찰이 올 때까지 책을 읽고 있던 할아버지, 자택 정원에 쓰레기와 배설물을 쌓아놓아 이웃과 싸우는 할아버지.. 후지와라 토모미는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노인들이 증가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간, 공간, 마음의 변화를 읽어냅니다. 저자는 어쩌면 천천히 변화해 나가야 할 인간의 내면을 지탱하는 기반이 너무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폭주노인들을 통해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현 2014-10-26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뽀로로 뽀통령이 전하는 층간소음예방캠페인 사뿐사뿐 콩도 있고 가벼운 발걸음 위층 아래층 모두모두 한마음 기분까지 서로서로 좋아하는 너도좋아 나도좋아 나비처럼 가볍게,뛰지말고 모두함께 걸어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리고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나오는 층간소음예방에 도움주는 두까은 슬리퍼랑 층간 소음 줄여준다는 에어 매트도 전부 다 있으며 앞으로 이사를 갈 땐 반드시 층간소음예방에 도움이 되는 두꺼운 슬리퍼를 구입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