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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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한 사람을 물리적 힘으로 성폭행했다면, 그것은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협박해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것도 강간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억지로 성교를 하는 것은 모두 강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유형들입니다. 그러나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만이 강간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 역시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갔다가 강제로 당한 것도, 역시 강간입니다. 결혼한 부부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부했을 때 강제로 관계를 가졌다면, 강간입니다. 성폭행에 대한 통계는, 한 가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으슥한 밤에 자신을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사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여성의 '아는 오빠' 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잡지『미즈Ms』는 수천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혹은 성폭력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대학생들이 이런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었고, 소수의 남성 피해자도 있었는데, 남성 피해자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장 다루기 복잡하고 힘든 유형의 성폭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해자의 심리와 피해자의 심리에 있어서 낯선 사람에게 당한 강간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강간 피해자를 구분해서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계를 차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지갑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강도를 당할만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범죄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단지 가해자가 범행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강간 사건, 특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책임을 묻고, 심지어는 가해자보다도 오히려 피해자의 책임이 더 큰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 p.41

여성이 남성의 집에 가거나 차에 탔다고 해서, 그와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남성의 데이트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관계로 보상되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전에 어떤 행동을 했든 상관없이, 누구든 성적인 행동에 대해 거부할 권리가 있고 이 의사 표시는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강간입니다. 강간은 엄연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사건을 강간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해 강간당했을 때, 여성들은 안전한 피해자가 됩니다. 안전한 피해자란, 성폭력 피해 상황을 부정하고 사건을 자신과 분리시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한편 내면의 불안감을 외면하고, 피해 상황에 맞서 심각하게 저항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말합니다. 피해자가 이런 관계에 저항한다면, 피해자가 오히려 강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여성스러워지라고,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자기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직, 간접적으로 교육받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독립심과 자립심이 부족한 상태로 머물 것을, 그리고 신체적, 경제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갈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자에게 보호받는 대신 성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계입니다. 그 결과 여성의 성은 남성의 보호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이해되고, 많은 여성들을 안전한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적 문화와 관습은 여성은 은연중에 강간을 원한다던지, 집에 왔으면 성 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강간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매력 있다고 여겨지는 그런 남성들의 의지에 순응하도록 사회화되는 반면, 많은 남성들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성적 행동을 하도록 사회화됩니다. 물리적 폭력과 강제적 격리, 언어폭력과 통제, 여성의 거부반응에 대한 무시 등과 같은 공격성은, 아는 사람에 대한 강간에 있어서 남성다움으로 포장됩니다.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강간임을 알면서도 아무 죄책감 없이 행하거나, 강간임을 인지하지도 못하기도 합니다. 여성을 살살 꼬셔서 자신의 자취방에 들어오게 하거나 여성에게 술을 먹여서 성관계를 하는 것은 하나의 팁이자 노하우가 되었고, 다른 남자들에게 자랑거리로 말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문화는 여성을 꼬시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른바 '픽업 아티스트'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강간은 극소수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종의 정신병이 아닙니다. 사실 강간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남성들의 행동양식과 큰 차이가 없어요." 어떤 면에서 성폭력 가해자와 비가해자의 차이는, 소년들이 흔히 남자다움이라고 배우는 '마초성'을 얼마나 신봉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남성이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성적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이 대개는 남성들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 p.98

배은경 서울대 교수는, 남성의 성매매, 성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인 성적 욕구보다 오히려 군대나 회식, 접대로 이어지는 남성 집단의 문화와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남성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성관계를 하나의 성과물로 여기거나, 여성을 재화로 보는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홈런을 쳤다던지, 따먹었다던지, 나에겐 왜 안대주냐는지, 가져보고 싶다는 등의 언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공고히 합니다. 남성의 언어는 여성 그 자체를 아동이나 동물, 또는 성기로 표현함으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기도 합니다. 드라마『파리의 연인』에서 백마탄 왕자님인 재벌2세 한기주가 여주인공에게 말하는 "애기야 가자"와 같은 대사처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관계에서는 성적인 강요가 워낙 흔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강간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데이트를 먼저 신청했거나,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할 때, 영화를 보기보다 남자의 집에서 놀 때, 여자가 술을 마실 때 자신의 행동, 강간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친분 있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현실을,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이 남성의 집에 혼자 놀러가거나, 그 집에서 속옷바람으로 있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강간당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성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강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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