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데버라 캐머런 지음, 강경아 옮김 / 신사책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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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라 캐머런의 책 <페미니즘>을 다 읽었다. 매주 한 챕터씩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 책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페미니즘의 여러 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내가 '지금' 하는 생각들은 이미 여러 사람이 거쳐 지나간, 어떤 초심의 단계? 같은 것을 나타낸다. 사람에 따라 내 말이 '초보'의 말로도, '급진적'인 말로도 들릴 수 있다. 이런 걸 설명하자니 좀 웃프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 말/글로 내 생각을 표현할 때 검열의 형태로 보게 되고 이래도 괜찮을까 저래도 괜찮을까 이런 말은 좀 우습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게 지금 내가 하는 생각들이고 나는 그만큼의 자리에서 그만큼의 생각을 쏟아내면서 이 과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가져온 표현의 자유나 설명 가능성 등의 어마어마한 이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 의해 한계지어지고 여러 의미들을 그 한 단어 안에 가두게 되는, 딱지와 오인의 여지를 두는,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이미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였고 그렇게 살아온 여성들의 모든 행위와 노력들을 싸잡아 격하시키는 단어가 되어가는 것같은. 한마디로 가차없는 백래쉬, 이쪽저쪽그쪽 진영을 나눌 것도 없이 모두 깡그리, 백래쉬. 아무리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도 '어차피 너는 페미니스트, 니가 말하는 건 페미니즘, 난 듣고 싶지 않아, 세상에 그런 건 필요없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 비난과 비판의 차이를 알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 비판이라 생각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 작고 얇은 책은 나 스스로 비난과 비판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고 비난의 자세가 아닌 정확한 비판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게 한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정체성이 아니라 구조를, 자아가 아니라 언행을, 개인을 통한 전체를, 전체를 통한 개인을, 등등. 각각의 장(지배 구조/권리/노동/여성성/성/문화/경계와 미래)에서 매우 중립적인 태도로 최근의 페미니즘 경향까지 맥락을 짚고 문제를 지적하고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모아놓은 내용 모두가 좋았지만, 그래서 특히 마지막 장 '경계와 미래'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라는 것, 그것을 어느 한 페미니즘의 범주에 넣어 경계를 짓기보다 좀더 열린 시각을 갖는 게 중요할 듯하다.

"교차성을 논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150) 이 문장을 다각도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교차,라는 단어는 단순한 교차로와 같은 길을 떠올려서 복잡하게 중첩된 상황을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그건 논외로 하더라도 나는 이 문장이 페미니즘 활동가의 영역 뿐만 아니라 일상 속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혹은 어떤 상황을 논(비판)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행(실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비판하는 대로 실천해야 한다면(단 하나의 '흠'도 없어야 한다면) 지구상에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우리는 "그자가 페미니즘을 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그자는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는다."(156) 이 한 문장의 의미도 되새긴다. 당신은 페미니즘을 합니까? 페미니즘을 공부합니까? 오케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의 의미 중 하나는 개인의 선택을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선택이 내려지는 맥락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정체성과 선택을 둘러싼 현재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페미니즘 그 자체에도 적용된다."(158) 신자유주의가 손을 뻗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또한번.

그저 당연하겠거니 혹은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은 정의내리고 분류하고 단계를 나누면서 깊고 넓은 다각도의 문제들을 착착 접어 각각의 서랍에 넣는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느 서랍에 누구와 같이 들어갈까를 혹은 들어갈 수 없을까 봐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작은넘이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대서 해열진통제를 주었다. 50킬로그램 이상의 성인&어린이는 네 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한번에 1000mg까지를 복용하라고 되어 있다. 어림잡아 800 정도를 먹였다. 그거 알아? 이런 약을 제조해서 용량을 정할 때 대부분이 표준 남성을 기준으로 해왔다는 거? 엄마, 어떻게 여자 빼고 남자만 표준으로 삼을 수가 있어? 그게 말이 안 되는데. 50킬로 이상이면 여자도 남자도 다 해당이 되는 거지 약 복용서에 기준이 남자라고 쓰여있는 건 아니잖아? 한동안 또 열변을 토해야 했다. 제약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다,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이 세상이야.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페미니즘 책을 몇 권이나 읽었지만 아이들은 아직 이론 따로 일상 따로인 것만 같다. 그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지금까지의 우리 현실이다.

이 훌륭한 페미니즘 개괄&안내서의 마지막 문장이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항에 직면할 것이고, 논쟁을 일으킬 것이지만, "여성은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좀 슬프다.



◦◦◦◦◦◦◦◦◦◦◦◦◦◦◦◦◦◦◦◦◦


"확실히 페미니즘은 각양각색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모두는 다음의 두 가지 근본적 믿음에 기초한다.

1. 현재 여성은 사회에서 예속 상태에 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겪고 체계적 불이익을 받는다.

2. 여성의 예속은 불가피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서문 16)


"두말할 것 없이, 무슬림 여성의 말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특정 집단 여성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라는 요청으로 정치적 논쟁이 해결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특정 집단 여성의 말을 듣다 보면 그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정치적 분석까지 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종교적 권리를 지지하는 무슬림 페미니스트도 있고, 그에 반대하는 무슬림 페미니스트도 있다.

......

영국의 무슬림 페미니스트 야스민 레만은 여성이 베일 착용을 선택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항상 행위성이 행사된 결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니캅이 공적 논쟁으로 떠오르기 오래전, 영국에 거주하는 남아시아 여성들은 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헐렁한 튜닉과 바지) 같은 전통 복장을 강요받는 것과 (비무슬림 집단에도 있는) '정숙한' 복장에 대한 집단의 규범이 여성과 소녀를 통제하는 데 쓰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레만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인종주의에 불씨를 댕기지 않으면서 소수민족의 문화적 풍습을 비판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페미니스트는 주류 공동체 내부에서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기꺼이 지지하는 것처럼, 공동체 내부에서 성차별적 규범에 맞서 싸우려는 소수민족 여성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 권리 58~59)


"하지만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는 성별 분업 체계를 문제 삼지 않으며(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남성은 가사 노동을 분담할 이유가 더 줄어든다),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립된 일이자 성취감이 없는 일이기에 그 누구도 이를 전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다루지 않는다." (3장 노동 79)


'위대함'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 혹은 애초에 무엇이 예술이나 지식으로 여겨지는지에 관한 기준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남성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전통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은 [세상을] 그들의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절대적 진리인 양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는 펜, 붓, 카메라를 드는 이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성별이 여성일 뿐인 예술가 개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요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 즉 가부장적 전제와 기준에 대적하는 관점으로 세계가 재현되길 바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

하지만 여성이 만든 재현물이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색다른 그림이 탄생한다고 그토록 단순하게 가정해도 될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조차, 그러니까 세게를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각은 가부장제 전통에 따라 형성되지 않는가?" (6장 문화 138~139)


"그(존 버거)의 논의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삶과 예술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은 행동하고 여성은 보여진다. 남성은 여성을 바라본다. 여성은 보여지는 자신을 본다. 이는 대부분의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도 결정한다.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시자는 남성이며, 감시당하는 이는 여성이다. 그렇게 여성은 자신을 객체로 바꾼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하나의 광경으로 바꿔놓는다.


...... 남성 예술가는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성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간청하고 이를 즐기는 여성을 그리기도 한다.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버거는 이런 그림이 특히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여성의 손에 거울을 직접 쥐여줘 놓고 그림에 <허영>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체의 여성을 그린 뒤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는 그 나체를 그리는 남성과 그 여성을 그리도록 비용을 지급한 남성 간의 거래에서 상품이다. 하지만 여성을 재현하는 관습은 마치 여성이 통제권을 지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 (6장 문화 140~141)


"각 사례는 모두 있었던 일에 비해서 그에 대한 반응이 너무 과도해 보인다. 여성의 얼굴이 들어간 지폐 한 장쯤이나 여성이 주연을 맡는 주류 영화 하나쯤 세상에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위협을 느꼈을까? 이토록 강렬한 분노는 문화가 남성의 전유물이라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확신을 보여주며, 오늘날 성 정치의 중심이 문화적 문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매니니스트meninist'라 불리는 대안 우파의 유명 반페미니스트 논객들은 문화 정치에 에너지를 가장 많이 쏟아붓는다. 그들은 문화가 변하려면 정치가 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정치 변동에는 문화 변동이 필수 조건이라고 믿는다. 페미니스트와 반페미니스트는 문화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테제를 잘 알고 있다. 관념, 이미지, 이야기, 이론은 불평등을 지속하는 데도, 이에 도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회근, 대안 우파는 이제 서구 민주국의 남성에게 남은 것은 문화적 특혜밖에 없다는 느낌을 이용해왔다. 이들을 비웃기는 쉽다("여성 전투기 조종사/프로 축구 선수/ 총리는 허락해도, 여성 고스트버스터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 하지만 이들의 분노는 실재하며, 심각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에게 이곳은 새로울 것 없는 전장이다. 하지만 문화의 현재적·미래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6장 문화 146~147)


"또 다른 대답도 있다. 현대 젠더 정체성 정치는 무엇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정의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도 의견이 나뉜다.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데 동의한다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 누구나 여성이 될 수 있는, 아니면 특정 종류의 개인사를 거쳐야 하는가(소속된 문화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을 남아와 정반대 방식으로 여아로 대우해주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은 특정 신체를 지녀야 한다는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가? 육체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기에 체현 경험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 억압을 끝내려는 페미니스트의 활동이 고려해야 할 물리적 육체의 현실이 존재하는가?

......

페미니즘의 '물결' 모델은 각 세대의 코호트 내에 존재하는 정치적 차이를 납작하게 만들어 축소해버린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페미니즘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한 의견이 다르면 젠더의 본질과 의미에 관한 관점도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들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그랬듯, 페미니즘의 미래에도 함께할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 속 젠더 정체성의 중요성은 문화 전반에서 정체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 이는 오늘날 페미니즘의 현황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비아 월비는 21세기에 페미니즘은 정치적 활동이라기보다 점차 일련의 개인적 정체성으로 개념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자가 페미니즘을 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그자는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는다. 월비는 이처럼 자기 정의에 방점을 두는 것은 교차성과 포용이라는 목표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의 예처럼 실제로는 여성 억압에 저항하고 여성 진보에 힘쓰는 등 페미니즘을 행하지만, 그 구성원이나 조직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으면 이를 '페미니스트'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이런 활동들이 젠더와 인종, 계급의 교차성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이들을 페미니스트 활동으로 보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 것은 노동계급과 흑인, 소수민족 페미니스트를 주변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7장 경계와 미래 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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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10-08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부장적 전재와 기준은 워낙 막강한데다 자본주의 이익과도 잘 맞아떨어져 고착화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거기 거스를만한 주장들은 너무 쉽게 공격당하고 한계지어지고 모난돌이되는...이 책 저도 좋았어요! ^^*

난티나무 2022-10-09 05:29   좋아요 1 | URL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돈‘의 발명이 변화를 가져왔다, 그 시점부터 남자가 돈의 기능을 이용해 남성세계를 구축하고 여자의 모든 것은 사라졌다,고요. 지금 자본주의 행태를 보면 정말 일리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은 좀더 읽어보고 나중에 소개해 볼게요. 재미있어요.^^)

- 2022-10-09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저는 주변 관계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 생겨나는 소소한 질문들을 도외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페미니즘은 나의 질문들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여전히 질문하는 나 자신을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그런 나 자신을 좀 괜찮은, 멋진 사람인 것처럼 여기게 해주었다지요.
그런 의미에서 난티나무님은 참 페미니즘 잘한다~! ㅋㅋㅋ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하겠어요. ㅋㅋ 일단 사야하겠고요?ㅋㅋㅋ

난티나무 2022-10-10 00:16   좋아요 2 | URL
우리는 멋진 사람들!!!! ㅋㅋㅋㅋㅋ
이라고 말해놓고 쭈구리모드로 돌아가는 거, 저만 그런가요?^^;;;;;;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하면서도 자뻑상태 유지하기가 힘들....ㅋㅋ 사실 그게 자뻑이 아니라 ‘사실‘일 수 있는데 말이죠. 하핫.
저도 좀전에 책 또 사고 왔답니다? ㅋㅋㅋㅋ

2022-10-10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2-10-10 00:2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소심하게 들키면 안되는 것 처럼 두리번 거리며....)
......... 저도요.. 쭈그리 왕 쭈그리.......... ㅜㅜ 맨날 걱정하고 불안하고 안절부절하고........ 하지만 과거의 나보다는 지금의 나가 좀 덜 쭈구리라 이 방식 쭉 밀고 나갑니다... ㅋㅋㅋ

2022-10-10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아는 없다.(정말?)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아성찰, 자아실현, 다 헛소리.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보잘것 없는 존재들이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맞는가.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닌가. 거기 앉아 나를 보고 있는 너는 실재인가. 자존감, 자존심, 자기정체성 등을 정립하고 지키라고 하는 말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째서 인간의 뇌는 이렇게 진화했단 말인가. 하필이면. 오늘도 두서없이 시작하는 뻘글. 


"쓰시마 유코는 "내가 나에 대해 단언할수록 나는 거짓말이 되었다"고 했고, 엘렌 식수는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면서도 일부는 나에게서 빠져나간다"고 했다. 비슷한 문장 중 주디스 버틀러의 것을 제일 좋아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 안에는 내가 아닌 무언가가 이미 들어와 있다"라는 그의 글을 반복해 읽으면 이미 '나' 안에 들어와 있는 무언가로 공포영화를 여러 편 찍을 수 있다. 어쨌든 나는 거짓말이고, 어쩌다 남은 것들이고,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의 이웃이므로 나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음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김지승 <짐승일기> 12




주말에 프랑스 남부에 있었다. 볼일이 있었고 내 볼일은 아니지만 겸사겸사 갔고 바다가 가까웠지만 바다에는 가지 않았다. 그깟 바다, 안 봐도 상관없다, 이런 마음. 풍경 그게 다 무슨 소용, 이런 마음. 유난히 고속도로 위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고 그래서 피곤했다. 결혼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고) 이탈리아 여행을 온 동생이 급 벙개를 외쳤다. 남부에 있다고? 그럼 놀러 와! 못 올 이유 없지? 그럼 고고! 귀가 종잇장보다 얇은 나는 혹하고 말았다. 장장 5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야 동생이 있는 곳에 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700킬로미터 가까이 되었다. 거리가 문제야?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차를 오래 타는 일은 이젠 정말 피곤하고 힘들지만, 고만고만한 생활에서 이런 경우는 흔히 일어나지 않으니까. 동생을 보고 싶어서? 놉. 동생의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나는 왜 혹했던 걸까? 습관에서 벗어나기. 그걸 해보고 싶었다.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나도 너도 대체로 그렇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무엇,을 해보고 싶었다. 난 그런 성격 아니야, 계획을 해야 안심이 돼,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그게 습관이라는 거 알지도 모르지. 하루를 달려 드넓은 호수만 보고 다시 하루를 달리더라도, 얻은 것 없이 잃는 게 많아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만하지 않냐고 나를 설득시켰다. 동생이라는 좋은 핑계가 거기 있었다. 2주 뒤에 만날 예정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나는 집에 있다. 그 즉흥성을 따랐다면 가르다 호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겠지. 습관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내가 끝까지 우겼다면 아마 옆지기는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냐고? 아니. 나는 어차피 못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가고 싶지만 안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혹은 내 습관의 패턴은 빤하다?) 충동은 자주 쉽게 포기로 이어진다. 포기가 잘 안 될 때 괴로워진다. 나는 뭘까? 나는 인간일까? '(나는 인간인데) 너는 뭐냐?'라는 물음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온다고 정희진샘이 말했다는데(쟝쟝님 글에서 읽음), 그 말을 보고 나니 이젠 스스로 나는 뭐, 누구, 이런 질문 안 하고 싶어졌는데.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니까. 표현할 수 있는 성질조차 변화무쌍하니까.


풍경 까짓 거, 라고 생각은 했으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점심을 먹으러 간 한 마을은 눈이 부시도록 예뻤고 까짓,은 느무좋아,로 바뀌었다. 이탈리아를 포기하는 대신 예정에 없던 식사를 하느라 두어 시간을 지체했다. 내 결정이었다. 선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결정이나 선택이나 결국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이 또한 내 습관성 행동이겠다. 아쉬움의 표현. '선택하지 않는' 선택.(에바 일루즈 읽는 척 하는 중) 그 와중, 때로는 까짓 풍경이 마음을 달래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렇게 스쳐지나가지만 넉넉한 시간을 갖고 여행으로 오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다. 이 또한 실현이 어려운 소망일 테지. 넉넉한 시간이란 곧 돈을 의미하니까. 사람들은 나중에, 언젠가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체 없는 희망은 늘, 천천히, 늦게 오고 어쩌면 흔히, 올 생각도 하지 않음을, 우리는 애써 지우려고 하지는 않나? 나는 이제야 조금씩 '충동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타인이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타인 보기, 타인들의 조각 모습, 이것이 미치는 영향,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나라는 모습. 책 목차의 소제목이 눈길을 붙든다. "내가 나의 타인이다." 어쩐지 사람들이 그렇게 MBTI 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우리는 아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엉망으로 쪼개진 파편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정주하지 못하고 일관되지 않으며 규칙에 반하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할 때마다 달라지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아니, 나는 잘 잊히기 위한 고군분투의 기록일 뿐인데 우리는 아니, 나는 매일 마지막 낮잠에서 깨고 마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등 뒤로 줄 서 있는 슬픔들이 있는데 우리는 아니, 나는 이름 없이 단 하나 남은 부족민인데 우리는 아니, 나는 용서하지 않을 거고 용서받지 않을 텐데 우리는 아니, 나는 즉흥적이고 정직하게 울고 싶은데 우리는 아니, "

김지승 <짐승일기>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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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0-05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현하신 그 내면의 느낌 어떤건지 알아요. 물론 저는 이미 떠났고 동생과 만나서 어쩌고저쩌고 했다는 글까지 올렸겠죠. 🥲🥲🥲 코딱지 만한 충동에도 흔들거리는 저보다 님의 성격이 더 부러워요. ㅎㅎㅎ

난티나무 2022-10-05 14:29   좋아요 0 | URL
하핫 라로님^^ 이미 떠났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별것 아닌 일인데 그냥 하지 않음, 포기가 일상의 습관이 된 건 아닌가, 생각하는 계기였어요.^^;;;

2022-10-05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소포는 9월에 받았어야 할 9월의 두번째 소포다. 배송사의 문제로 예상보다 (주말 합해) 4일 늦게 도착해 10월의 책소포가 되었다. 김지승의 <짐승 일기>를 빨리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처음의 마음은 어디론가 슬며시 사라지고... 읽어야지. 읽을 것이다. 아 슬프기 싫은데. 쩝. 편견이길. 





가장 최근 산 책 네 권과 함께 사놓고 받기를 계속 미루던 책들 몇 권을 추가했다. 하. 이젠 소포 받으면 한숨부터 나온다.ㅋㅋ 언제 다 읽어? 몰라. 요즘 글자들이 잘 안 읽히는 날들이라 속만 타들어간다. 왜그런지나도몰라~~~~~~ 사진을 어떻게 보정해도 원래 제 색깔이 잘 나오지 않는다.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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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4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들이 모두 열공해야 하는 책들이예요.
글이 잘 안읽히는 날이면 살짝 내려놓아도.... 저도 가끔 그럴 때 있는데 그럼 그냥 한달에 1-2권 읽기도 하거든요. 책도 읽다보면 이것도 읽어야 하고 저것도 읽어야 하고 어 내가 왜? 이럴 때가 생기더라구요.

난티나무 2022-10-04 21:09   좋아요 4 | URL
제가 구입하는 책들이 열공해야 하는 책들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간과 돈을 더 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을 많이 사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 특히 가벼운 에세이 이런 건 ㅎㅎㅎ 아예 제쳐두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늘 구입목록이 이렇게...^^;;;;;;
주말마다 놀러 다녔더니 주말에는 아예 못 읽게 되고 흐름도 끊어지고 그러네요. 생각도 많고...ㅋㅋ 살짝 내려놓기, 해볼게요.^^

단발머리 2022-10-04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생각했어요. 모두 펜을 딱 쥐고 읽어야할 책들이네요.
난티나무님 열공 모드 항상 응원합니다! 사이사이 살짝 내려놓기도 해보시고요^^

난티나무 2022-10-04 23:08   좋아요 3 | URL
흑흑 펜 딱 쥐고 열공모드 잘 안 되는 나여...ㅠㅠ
옛날옛적 일요일에도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학교 교실 창가에 앉아 푸르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 쳐다보며 멍때렸던 사람이 전데요.^^;;; 그러니까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다는...ㅋㅋㅋㅋ
책은 쌓여만 가는데 속도는 느리고 흠흠 새 책은 자꾸 나오고 흠흠
항상 응원해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라로 2022-10-05 0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난티님 진심 리스펙트! ✊✊✊

난티나무 2022-10-05 14:51   좋아요 0 | URL
저도 라로님 리스펙트! ㅎㅎㅎ

mini74 2022-10-0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줄 그으며 필기하며 읽어야 할 책들 같아요. ~ 난티나무님 파이팅입니다 *^^*

난티나무 2022-10-05 14:54   좋아요 1 | URL
제가요, 여러분들 말씀(펜 들고 밑줄 긋고 각잡고 공부) 듣고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파악을 못했는데요, 어젯밤에 책들을 들쳐보니 아니 😱 진짜 각 잡아야 될 것같은 거예요.ㅋㅋㅋㅋㅋㅋㅋ 왜 다 어려워보이죠???? ^^;;;;;;;;;;;;;
파이팅 감사히 받아요, mini74님~~~~^^
 

아 북플에서는 글 아래 사진이 들어가지! 컴터 꺼버려서 폰으로 북플 들어왔더니. 그래도 올리고 자자.

10월 여성주의읽기 <포르노랜드>.
책을 준비했다. 이걸 언제 읽었더라.. 찾아봐야 해서 언젠지 모르겠고 암튼 예전에 한글판으로 읽었다. 아이들 읽혀야 겠어서 프랑스어판 사고 읽히고 토론하고 싸우고 기타등등.

재독에 도전한다. 프랑스어로 읽어볼까 해서 꺼내두었는데 아무래도 속도가 느릴 테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고, 어떨까 해서 방금 첫 두 페이지 슥 읽다가 토 나올 거 같은 느낌이라 덮었다… 하… 어쩌지. 큰일이다. 이전에 읽을 때보다 더 힘들 것같은 느낌적 느낌…@@

한글판은 또 전자책… 밑줄 긋고 메모 써야 하는 책들은 종이책이 최고. 페미니즘 책 이제 전자책으로 사지 마라, 나야.

책장에 <포르노 판타지>가 있다? 내가 이걸 읽었나? 싶어 펼치니 밑줄에 메모들까지, 읽었네? ㅋㅋㅋ 🤣 걸리는 부분들이 좀 있었는지 메모가 많다. 나중에 다시 훑어보고 까든지 하자.

나는 과연 <포르노랜드> 다시 읽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북플 제대로 못 본 며칠 사이 글 왤케 많?? 언제 다 읽어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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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04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의 두페이지만 읽으셨는데 토나올 것 같다니ㅠㅠ 아무튼 시작하시는군요. 재독이라 더 힘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마음 먹고 시작해야겠네요.

난티나무 2022-10-04 17:27   좋아요 0 | URL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책에 나온, 포르노를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여성에게 감정 이입 했나 봐요.ㅠㅠ 더불어 그동안 포르노를 비롯한 여성혐오에 대한 감정도 깊어(?)졌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 ^^;;;;;;

책읽는나무 2022-10-04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뜨케요?
아...식사 중 이 책 읽는 것은 금물이겠군요?ㅋㅋㅋ
음....각오 단단히!!!!🤔🤔

난티나무 2022-10-04 17:28   좋아요 1 | URL
밥 못 드실 듯 ㅎㅎㅎ

다락방 2022-10-04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르노 판타지> 메모 공유해주세요! 저는 별을 네개 주긴 했지만 대체로 긍정적으로 썼거든요. 다시 읽어보지 않으면 그 내용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이 책이 포르노를 보면 안된다는 걸 남자가 남자에게 말해주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지점들을 지적하실지 너무 궁금합니다. 기회되시면 꼭 메모 공유해주세요, 난티나무 님!!

난티나무 2022-10-04 17: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락방님. 남자가 남자에게, 긍정적이죠. 그게 또 어쩔 수 없이 좀은 한계를 가지는 것인가 하는 얕은 생각들이지만 좀 나중에 다시 슥 보면서 정리해 볼게요.^^
 
















에바 일루즈 읽기. 사랑에 관한 연구 중 가장 마지막이라는 책을 먼저 읽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어렵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 프롤로그 「'선택'에서 '선택하지 않음'으로」 읽고 간단히 밑줄 정리하기.



(1. 프롤로그 11~32)

"... 자유는 우리가 '지켜야 하면서 동시에 그 배경을 캐물어야' 하는 사회적 화두다."

"우리가 비판적인 학자로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자유가 가져다주는 파괴적 결과를 분석해야 한다면, 개인의 감정과 성적 영역에서도 자유의 파괴적인 효과를 묻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신보수주의의 시장과 정치적 자유 찬양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의 성적 자유 예찬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시험대에 올려놓고 살펴야 한다."

"감정의 문화사회학은 실제로 자유를 행동 영역의 재구성으로 본다. 행동 영역은 도덕 감각, 교육과 관계의 개념화, 법적 체계의 바탕, 젠더에 대한 시각과 그 실제, 더 넓게는 현대인의 자아에 대한 기본적 정의를 빚어내는 가장 강력하고 널리 퍼진 문화적 프레임이다. 문화사회학이 보는 자유는 법전이 높이 추켜세우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현대인의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체계화하는 뿌리 깊은 문화적 프레임이다. 개인과 제도가 부단히 가꾸는 가치인 자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적 실천으로 지켜진다. 이런 실천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개인에게 당신이 성적 주체라고 속삭이는 설득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주목했듯, 자유는 불평등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 캐서린 매키넌은 이런 맥락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자유를 평등보다 우선시하며, 자유를 정의보다 우선시하는 태도는 오로지 권력자의 권력만 계속 키울 뿐이다." 자유를 평등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불평등이 자유의 가능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성애 관계는 양성 간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가 그런 불평등을 조장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성애 관계에서 자유가 불평등을 극복한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거의 모든 이성애 관계는 '실패'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유와 평등은 이성애 관계에서 함께 갈 수 없는 가치인 것일까.)

"성적 자유 문제는 동성애 관계보다는 이성애 관계에서 더욱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사정을 이렇게 만드는 원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형태의 이성애 관계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의 차이에 기반해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차이는 불평등을 조장한다. 이성애는 이런 불평등을 감정 체계로 체계화했다. 감정 체계란 관계가 성공적인지 아닌지 하는 책임을 사람들의 심리, 특히 여성의 심리에 떠넘기는 것을 뜻한다. 자유는 감정의 불평등이 드러나지 않게 가리며, 또 불평등을 문제 삼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여성은 감정의 불평등으로 생겨나는 상징적 폭력과 상처를 감당하려고 자신의 심리와 씨름을 한다."

('감정의 불평등으로 생겨나는 상징적 폭력과 상처' → 이성애 관계에서 남자들이 아마도 가장 취약하고 모르는 부분. 이 구절을 읽는 많은 여성들이 직관적으로 감정의 불평등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껴버리는 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감정의 불평등이란 게 무엇인지조차 감잡지 못할 것이다. 설명할 수 없었던 느낌을 언어화하는 일을 한 학자들.)

(1. 프롤로그 32~50)

"... 글자 그대로 사랑의 부재unloving는 시장이 부각시킨 새로운 주체성의 특징이다. 이 주체성이 하는 선택은 긍정적, 이를테면 뭔가 원하고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동시에 반복적으로 관계를 회피하거나 거부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심리학 기술과 각종 상업 기술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인간의 '욕망', 더 나아가 인간관계를 순전히 개인의 선택 문제로 만들어버린 것이 그 공통점이다. 선택, 즉 성적 선택 또는 소비의 선택 혹은 감정의 선택은 자유를 표방하는 공동체에서 개인이 자아가 가진 의지를 발휘했다고 믿게 만드는 주요한 모티브다. 근대의 자아 또는 오늘날의 자아 개념은 곧 선택의 주체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자신이 주체적인 선택의 권리를 가졌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인하려고 한다.

선택은 자유를 시장 및 감정 영역들과 묶어주는 연결 고리다. ... 다시 말해서 선택은 세계가 가진 특정 구조의 표현이다."

"합리적인 계산보다는 습관과 대세에 따르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선택은 오히려 시장이 특정 행동을 제도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 선택은 사회 구성원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 ...... 요컨대 선택은 현대인이 써나가는 문화 스토리의 중심 기둥이다."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지 어언 2년... 아직도 보관함에 담긴 채 내 손에 닿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의 이름을 접하니 새삼 후회가... 얼른 사서 읽을 걸. 그러나 이런저런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선택'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듯하다. 그래서 선택에 대한 이 부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짐. 그 사이 작년에 살레츨 책 한 권 더 나왔네.@@)

"경제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아 우리는 주로 긍정적 선택, 곧 '의사 결정'에 관심을 가진다. 이로써 우리는 선택의 훨씬 더 중요한 측면, 곧 '부정적 선택'에 주목하지 못한다. 부정적 선택이란 자유와 자아실현이라는 명분으로 헌신과 관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태도를 뜻한다."

(밑줄친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들이 떠올랐다. '헌신과 관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태도'. 특히 기혼남성들. '모든' 이 아니라 '대부분' 이다, 이것도 당연히. 에바 일루즈가 여기서 말하려는 바가 이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ㅎㅎㅎ 어쩔 수 없다.)

"현대인이 구사하는 자유는 관계를 맺지 않거나 기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는 자유다. 나는 이런 자유가 생겨난 과정을 '선택하지 않음의 선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런 선택은 관계가 어떤 단계에 있든 개의치 않고 개인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끝내는 자유를 의미한다."

* 사회적 관계의 해체

* 불확실성, 불안정성

* 감정의 자유

* (도덕적) 자율성

* 자유의 제도적 구조

* 다른 형태의 성적, 감정적 주체성 (★)

* 선택 의지

* 상징적 상호작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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