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데버라 캐머런 지음, 강경아 옮김 / 신사책방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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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라 캐머런의 책 <페미니즘>을 다 읽었다. 매주 한 챕터씩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 책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페미니즘의 여러 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내가 '지금' 하는 생각들은 이미 여러 사람이 거쳐 지나간, 어떤 초심의 단계? 같은 것을 나타낸다. 사람에 따라 내 말이 '초보'의 말로도, '급진적'인 말로도 들릴 수 있다. 이런 걸 설명하자니 좀 웃프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 말/글로 내 생각을 표현할 때 검열의 형태로 보게 되고 이래도 괜찮을까 저래도 괜찮을까 이런 말은 좀 우습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게 지금 내가 하는 생각들이고 나는 그만큼의 자리에서 그만큼의 생각을 쏟아내면서 이 과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가져온 표현의 자유나 설명 가능성 등의 어마어마한 이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 의해 한계지어지고 여러 의미들을 그 한 단어 안에 가두게 되는, 딱지와 오인의 여지를 두는,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이미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였고 그렇게 살아온 여성들의 모든 행위와 노력들을 싸잡아 격하시키는 단어가 되어가는 것같은. 한마디로 가차없는 백래쉬, 이쪽저쪽그쪽 진영을 나눌 것도 없이 모두 깡그리, 백래쉬. 아무리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도 '어차피 너는 페미니스트, 니가 말하는 건 페미니즘, 난 듣고 싶지 않아, 세상에 그런 건 필요없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 비난과 비판의 차이를 알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들. 비판이라 생각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 작고 얇은 책은 나 스스로 비난과 비판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고 비난의 자세가 아닌 정확한 비판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게 한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정체성이 아니라 구조를, 자아가 아니라 언행을, 개인을 통한 전체를, 전체를 통한 개인을, 등등. 각각의 장(지배 구조/권리/노동/여성성/성/문화/경계와 미래)에서 매우 중립적인 태도로 최근의 페미니즘 경향까지 맥락을 짚고 문제를 지적하고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모아놓은 내용 모두가 좋았지만, 그래서 특히 마지막 장 '경계와 미래'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라는 것, 그것을 어느 한 페미니즘의 범주에 넣어 경계를 짓기보다 좀더 열린 시각을 갖는 게 중요할 듯하다.

"교차성을 논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150) 이 문장을 다각도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교차,라는 단어는 단순한 교차로와 같은 길을 떠올려서 복잡하게 중첩된 상황을 표현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그건 논외로 하더라도 나는 이 문장이 페미니즘 활동가의 영역 뿐만 아니라 일상 속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혹은 어떤 상황을 논(비판)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행(실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비판하는 대로 실천해야 한다면(단 하나의 '흠'도 없어야 한다면) 지구상에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우리는 "그자가 페미니즘을 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그자는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는다."(156) 이 한 문장의 의미도 되새긴다. 당신은 페미니즘을 합니까? 페미니즘을 공부합니까? 오케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의 의미 중 하나는 개인의 선택을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선택이 내려지는 맥락에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정체성과 선택을 둘러싼 현재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페미니즘 그 자체에도 적용된다."(158) 신자유주의가 손을 뻗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또한번.

그저 당연하겠거니 혹은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은 정의내리고 분류하고 단계를 나누면서 깊고 넓은 다각도의 문제들을 착착 접어 각각의 서랍에 넣는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느 서랍에 누구와 같이 들어갈까를 혹은 들어갈 수 없을까 봐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작은넘이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대서 해열진통제를 주었다. 50킬로그램 이상의 성인&어린이는 네 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한번에 1000mg까지를 복용하라고 되어 있다. 어림잡아 800 정도를 먹였다. 그거 알아? 이런 약을 제조해서 용량을 정할 때 대부분이 표준 남성을 기준으로 해왔다는 거? 엄마, 어떻게 여자 빼고 남자만 표준으로 삼을 수가 있어? 그게 말이 안 되는데. 50킬로 이상이면 여자도 남자도 다 해당이 되는 거지 약 복용서에 기준이 남자라고 쓰여있는 건 아니잖아? 한동안 또 열변을 토해야 했다. 제약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다,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이 세상이야.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페미니즘 책을 몇 권이나 읽었지만 아이들은 아직 이론 따로 일상 따로인 것만 같다. 그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지금까지의 우리 현실이다.

이 훌륭한 페미니즘 개괄&안내서의 마지막 문장이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항에 직면할 것이고, 논쟁을 일으킬 것이지만, "여성은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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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페미니즘은 각양각색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모두는 다음의 두 가지 근본적 믿음에 기초한다.

1. 현재 여성은 사회에서 예속 상태에 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을 겪고 체계적 불이익을 받는다.

2. 여성의 예속은 불가피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서문 16)


"두말할 것 없이, 무슬림 여성의 말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특정 집단 여성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라는 요청으로 정치적 논쟁이 해결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특정 집단 여성의 말을 듣다 보면 그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정치적 분석까지 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종교적 권리를 지지하는 무슬림 페미니스트도 있고, 그에 반대하는 무슬림 페미니스트도 있다.

......

영국의 무슬림 페미니스트 야스민 레만은 여성이 베일 착용을 선택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항상 행위성이 행사된 결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니캅이 공적 논쟁으로 떠오르기 오래전, 영국에 거주하는 남아시아 여성들은 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헐렁한 튜닉과 바지) 같은 전통 복장을 강요받는 것과 (비무슬림 집단에도 있는) '정숙한' 복장에 대한 집단의 규범이 여성과 소녀를 통제하는 데 쓰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레만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인종주의에 불씨를 댕기지 않으면서 소수민족의 문화적 풍습을 비판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페미니스트는 주류 공동체 내부에서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기꺼이 지지하는 것처럼, 공동체 내부에서 성차별적 규범에 맞서 싸우려는 소수민족 여성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 권리 58~59)


"하지만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는 성별 분업 체계를 문제 삼지 않으며(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남성은 가사 노동을 분담할 이유가 더 줄어든다),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립된 일이자 성취감이 없는 일이기에 그 누구도 이를 전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다루지 않는다." (3장 노동 79)


'위대함'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 혹은 애초에 무엇이 예술이나 지식으로 여겨지는지에 관한 기준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남성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전통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은 [세상을] 그들의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절대적 진리인 양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는 펜, 붓, 카메라를 드는 이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성별이 여성일 뿐인 예술가 개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요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 즉 가부장적 전제와 기준에 대적하는 관점으로 세계가 재현되길 바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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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이 만든 재현물이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색다른 그림이 탄생한다고 그토록 단순하게 가정해도 될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조차, 그러니까 세게를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각은 가부장제 전통에 따라 형성되지 않는가?" (6장 문화 138~139)


"그(존 버거)의 논의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삶과 예술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남성은 행동하고 여성은 보여진다. 남성은 여성을 바라본다. 여성은 보여지는 자신을 본다. 이는 대부분의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도 결정한다.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시자는 남성이며, 감시당하는 이는 여성이다. 그렇게 여성은 자신을 객체로 바꾼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하나의 광경으로 바꿔놓는다.


...... 남성 예술가는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성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간청하고 이를 즐기는 여성을 그리기도 한다.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버거는 이런 그림이 특히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여성의 손에 거울을 직접 쥐여줘 놓고 그림에 <허영>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체의 여성을 그린 뒤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는 그 나체를 그리는 남성과 그 여성을 그리도록 비용을 지급한 남성 간의 거래에서 상품이다. 하지만 여성을 재현하는 관습은 마치 여성이 통제권을 지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 (6장 문화 140~141)


"각 사례는 모두 있었던 일에 비해서 그에 대한 반응이 너무 과도해 보인다. 여성의 얼굴이 들어간 지폐 한 장쯤이나 여성이 주연을 맡는 주류 영화 하나쯤 세상에 있어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위협을 느꼈을까? 이토록 강렬한 분노는 문화가 남성의 전유물이라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확신을 보여주며, 오늘날 성 정치의 중심이 문화적 문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매니니스트meninist'라 불리는 대안 우파의 유명 반페미니스트 논객들은 문화 정치에 에너지를 가장 많이 쏟아붓는다. 그들은 문화가 변하려면 정치가 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정치 변동에는 문화 변동이 필수 조건이라고 믿는다. 페미니스트와 반페미니스트는 문화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테제를 잘 알고 있다. 관념, 이미지, 이야기, 이론은 불평등을 지속하는 데도, 이에 도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회근, 대안 우파는 이제 서구 민주국의 남성에게 남은 것은 문화적 특혜밖에 없다는 느낌을 이용해왔다. 이들을 비웃기는 쉽다("여성 전투기 조종사/프로 축구 선수/ 총리는 허락해도, 여성 고스트버스터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돼!"). 하지만 이들의 분노는 실재하며, 심각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에게 이곳은 새로울 것 없는 전장이다. 하지만 문화의 현재적·미래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6장 문화 146~147)


"또 다른 대답도 있다. 현대 젠더 정체성 정치는 무엇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정의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도 의견이 나뉜다.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데 동의한다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 누구나 여성이 될 수 있는, 아니면 특정 종류의 개인사를 거쳐야 하는가(소속된 문화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을 남아와 정반대 방식으로 여아로 대우해주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은 특정 신체를 지녀야 한다는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가? 육체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기에 체현 경험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 억압을 끝내려는 페미니스트의 활동이 고려해야 할 물리적 육체의 현실이 존재하는가?

......

페미니즘의 '물결' 모델은 각 세대의 코호트 내에 존재하는 정치적 차이를 납작하게 만들어 축소해버린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페미니즘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한 의견이 다르면 젠더의 본질과 의미에 관한 관점도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들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그랬듯, 페미니즘의 미래에도 함께할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 속 젠더 정체성의 중요성은 문화 전반에서 정체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 이는 오늘날 페미니즘의 현황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비아 월비는 21세기에 페미니즘은 정치적 활동이라기보다 점차 일련의 개인적 정체성으로 개념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자가 페미니즘을 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그자는 페미니스트인가?"라고 묻는다. 월비는 이처럼 자기 정의에 방점을 두는 것은 교차성과 포용이라는 목표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의 예처럼 실제로는 여성 억압에 저항하고 여성 진보에 힘쓰는 등 페미니즘을 행하지만, 그 구성원이나 조직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으면 이를 '페미니스트'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이런 활동들이 젠더와 인종, 계급의 교차성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이들을 페미니스트 활동으로 보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 것은 노동계급과 흑인, 소수민족 페미니스트를 주변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7장 경계와 미래 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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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10-08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부장적 전재와 기준은 워낙 막강한데다 자본주의 이익과도 잘 맞아떨어져 고착화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거기 거스를만한 주장들은 너무 쉽게 공격당하고 한계지어지고 모난돌이되는...이 책 저도 좋았어요! ^^*

난티나무 2022-10-09 05:29   좋아요 1 | URL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돈‘의 발명이 변화를 가져왔다, 그 시점부터 남자가 돈의 기능을 이용해 남성세계를 구축하고 여자의 모든 것은 사라졌다,고요. 지금 자본주의 행태를 보면 정말 일리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은 좀더 읽어보고 나중에 소개해 볼게요. 재미있어요.^^)

공쟝쟝 2022-10-09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저는 주변 관계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 생겨나는 소소한 질문들을 도외시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페미니즘은 나의 질문들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여전히 질문하는 나 자신을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그런 나 자신을 좀 괜찮은, 멋진 사람인 것처럼 여기게 해주었다지요.
그런 의미에서 난티나무님은 참 페미니즘 잘한다~! ㅋㅋㅋ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하겠어요. ㅋㅋ 일단 사야하겠고요?ㅋㅋㅋ

난티나무 2022-10-10 00:16   좋아요 2 | URL
우리는 멋진 사람들!!!! ㅋㅋㅋㅋㅋ
이라고 말해놓고 쭈구리모드로 돌아가는 거, 저만 그런가요?^^;;;;;; 안 해야지 안 해야지 하면서도 자뻑상태 유지하기가 힘들....ㅋㅋ 사실 그게 자뻑이 아니라 ‘사실‘일 수 있는데 말이죠. 하핫.
저도 좀전에 책 또 사고 왔답니다? ㅋㅋㅋㅋ

2022-10-10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2-10-10 00:2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소심하게 들키면 안되는 것 처럼 두리번 거리며....)
......... 저도요.. 쭈그리 왕 쭈그리.......... ㅜㅜ 맨날 걱정하고 불안하고 안절부절하고........ 하지만 과거의 나보다는 지금의 나가 좀 덜 쭈구리라 이 방식 쭉 밀고 나갑니다... ㅋㅋㅋ

2022-10-10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