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어딘가와 닮았다.
(미륵도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시내)
미륵도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케이블카를 타고 9분 능선까지 간 후 계단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된다. 통영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 풍광, 어딘가와 매우 닮았는데....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본 홍콩 구룡반도와 홍콩섬이 떠올랐다. 가운데 바다를 경계로 위쪽은 구룡반도, 아래쪽은 홍콩섬의 자태가 바로 이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미륵도 정상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빅토리아 피크는 그간 서너 번쯤 올랐었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멀쩡한 우리집 두고 멋져 보이는 남의 집 침 흘리며 바라본 기분이 이럴까.
(장사도에서 바라본 남해안의 작은 섬들)
장사도, 통영에서 유람선을 타고 40여 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통영에 오기 전까지 장사도라는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인터넷 검색조차 해보지 않고 통영에 갔으니... 어떻게 되겠거니...한겨울에 유람선이 뜰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여행객이 많아서 놀랐다. 흠, 어떻게들 알고 왔지? 유람선 21,000원+ 장사도 입장료 10,000원. 남편과 둘이 갔으니 순식간에 62,000원 거금이 들어갔다. 배에서 내리니 <별에서 온 그대> 촬영장소였노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별 관심 없음. 시큰둥했지만 마음 속은 이미 설레고 있었다. 캬, 예쁘다.
섬 전체가 동백꽃 천지다.
꽃송이째 떨어지는 동백꽃은 언제 보아도 경외감이 든다. 마지막 가는 길이 추하지 않고 비겁하지 않고 치사하지 않다.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는 꽃이구나.
떨어진 동백꽃은 애잔하지만 나무의 새순은 싱그럽다.
분재원의 모과나무와 썩어가는 모과. 예전에는 예쁜 열매가 눈에 띄었는데 요즘은 이런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 모습 같아서겠지.
장사도를 둘러싼 작은 섬들에는 각기 이름이 있다.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였더라, 닮은 곳이? 예전에 다녀왔던 오키나와가 떠올랐다. 아, 또 이 버릇. 왜 멋진 곳을 보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게 되는지... 같잖은 허영심이 가소롭다.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여기저기 다녀보지만 마지막에 그리운 건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소박한 두부찌게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심정이 이렇겠지.
통영 강구안에는 중앙시장이 있고 시장 옆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지명을 빌어온 모텔이 있다. 모텔 창문에서 바라본 강구안 밤 풍경, 자세히 보면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이 유령처럼 어른거린다. 이곳은 또 어디를 닮았더라. 흠, 이곳은 말레이시아 말라카 항구를 닮았다. 어수선한 소래포구와 달리 이곳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밤새 질리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절대로 질리지 않았다.
통영 유일의 국보(국보 305호) 세병관. '세병(洗兵)'이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라 한다. '평소에는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으며 운치를 즐기는 세병관이지만 전시에는 洗의 물수를 떼어내 버리고 먼저 나아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先兵館이 된다'고 했다 한다. 이름도 멋지지만 건물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1604년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통제영'이었는데 이 통제영 안에 세병관이 위치해 있다. 400여 년 된 건물이다.
한무리의 여행객들에게 설명을 해주던 해설사에 따르면, 통영 사람들은 다리가 굵은 아가씨들을 보면 '세병관 기둥 같은 다리'라고 한단다. 내 다리와도 비슷하군.
또 버릇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와 닮았노? 아무리 머리를 궁글려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그냥 세병관이다. 통영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자꾸만 부러워진다. 다른 것 다 제치고 세병관 하나만 있어도 통영 사람들은 행복하겠다 싶다. 이 너른 마루에 올라 저 튼튼한 기둥에 기대어도 웬만한 시름은 씻은듯이 사라지지 않을까. 가히 은하수를 끌어와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