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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콜카타와 마지막 춤을

   정확히 오후 8시 실리구리를 출발한 야간 에어컨 디럭스 버스. 로얄이라는 수식어도 붙어 있었지, 아마. 그간 인도에서 타 본 모든 차량을 통틀어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버스다. 물론 우리나라의 우등 고속버스나 공항 리무진 버스 보다야 못하고 시외버스 수준에 고급스러운 좌석 시트가 보태진 정도지만 인도에서는 만나기 쉬운 버스가 아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서. 가격도 상당한 편이다. 다즐링의 숙소가 하루에 600Rs였는데 이 버스 요금은 일인당 800Rs나 된다. 물론 얼마간의 여행사 수수료가 포함된 가격이지만. 겨우 몸을 회복한 남편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한번쯤 타보고도 싶었다. 여행 막바지가 가까워오니 움켜잡았던 주머니도 여유가 생긴 탓이다. 그러잖아도 이번 여행은 내게 어떤 의미에서 실험적인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간 여행 때마다 갖고 다니던 수동 겸용 카메라를 과감하게 버리고 온 것(따라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 평소 쓰지도 않는 가계부를 여행 때는 꼬박꼬박 기록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는 것, 여행의 흔적들인 각종 팸플릿, 영수증 따위를 모으지 않는 것, 아, 이 해방감이라니!

   남편도 기력을 회복하고 딸아이도 옆에서 재잘거리고, 마지막 행선지인 콜카타로 가는 버스는 최고급이고, 세상의 무게를 모두 덜어낸 양, 자못 뿌듯한 기분으로 우쭐거렸지만 그 달콤함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비싼 에어컨 버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밤새 에어컨을 절대로 끄지 않는 것이 아닌가. 좌석마다 있는 두꺼운 담요를 틈새를 보일 새라 여기저기 꼼꼼히 여며가며 뒤집어쓰고 입고 간 고어텍스 쟈켓의 후드까지 끈을 조여 가며 썼는데도 한겨울의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4시간을 그렇게 달렸다. 가히 최악의 밤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누구 하나 에어컨을 줄여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에어컨 버스가 바로 이것이구먼,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 여긴 인도니까.

   

   콜카타에선 순데르반스 국립공원과 샨티니케탄을 일정에 꼭 넣을 작정이었다.

다른 곳은 별 의미가 없어보여서 고려하지도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곳들에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되었다. 둘레가 450m에 이르고 4,500여 평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단 한 그루의 나무, 반얀트리. 뻗어 내린 줄기가 뿌리가 되어 퍼져 나가서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축소판 인도 같다. 가난한 인도 서민의 삶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대소변을 보고, 이웃과 만나고, 아이들을 돌보고, 돈을 버는 일 들이 모두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제 몸 하나 편안히 머물 곳 없는 부지기수의 사람들은 제각각 뿌리를 땅에 내리고 줄기로 서기위해 아등바등하는 나무와 같다. 그러나 숲을 이룬 나무는 그늘을 만들며 누군가의 쉼터가 되어 주지만 이 길 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영위해 갈 뿐이다.

   네타지(Netaji)라는 인도 독립의 영웅 기념관도 갔었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수바스 찬드라 보세(Subhas Chandra Bose). 네타지로 불리는 이 유명한 영웅의 기념관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며, 알았다한들 구태여 찾아 갔으리요. 당일짜리 시티투어에 참가한 덕분에 애국심 고취시키기로 작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우리도 하루짜리 인도 국민이 된 것이었다. 벵골 지방의 독립 운동사를 전시 설명한 시청사 건물에서는 시뮬레이션으로 구성된 시위 대열에도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짖기도 했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인간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암베르카드 선생이 나와 같은 무색무취의 호사가들을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암베르카드: 간디 선생님,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간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암베르카드의 말을 끊는다) 조국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박사님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애국자이십니다.

   암베르카드: 선생님은 저에게 조국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나라의 종교가 어떻게 저의 종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꼽만한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 불가촉천민이라면 결코 이 땅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가하는 불의와 고통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 나라에 불충한 생각을 품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에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베르카드-인도 불가촉천민 해방자․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by 디완 챤드 아히르 지음, 이명권 옮김. 에피스테메 출판)




   마지막 날 콜카타에서 다시 심한 장염에 걸린 남편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앓고 나서야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14년 전 첫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인도 신화나 역사에 빠져들었고 그 쪽 분야의 책을 읽어 나갔는데, 이번 여행이 첫 인도 여행이었던 남편은 <암베르카드>라는 책을 먼저 손에 집어 들기 시작했다. 다시는 인도에 가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그나저나 나는 다시 가야 되는데, 어쩌나?




“ 이 책을 250Rs에 주신다면 저는 다시 인도에 올게요.”

“ 몇 번이나 인도에 왔었나요?”

“ 이번이 네번 째 인데요.”

“ 좋아요. 가져가요.”

우다이푸르 한 서점에서 <DK Eyewitness Travel Guides- INDIA>라는 중고책을 흥정하면서 늙수레한 서점 주인과 주고받은 약속 아닌 약속이 있는데, 어쩌나?

                                        

                                                        2008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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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즐링에서 보낸 한 철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도시, 보드가야. 이 성스러운 곳을 두 번이나 왔으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으며 나는 분명 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꾸 14년 전과 비교를 하게 되니 흥이 절감되고 또 다시 아그라처럼 회고적이 되려고 한다. 솔직히 이곳도 남편과 딸아이에게 불교의 최대 성지를 보여주려는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으로... 나는 이번 여행의 우리 가족 가이드니까.

   보드가야에서 다즐링으로 가는 길은 한국에서 인도 가는 길 보다 훨씬 길고 어렵고 모험적이다. 보드가야의 우리가 묵은 숙소 옆 투어리스트 콤플렉스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멀리 떨어진 가야에 있는 기차역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처음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런데, 일이 술술 풀린다 싶었더니 기차표 예매부터 쉽지 않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파트나까지는 기차 편이 들어맞는데 다즐링의 대문 격인 뉴잘패구리까지는 기차가 늘 만원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차편의 표를 팔 수 없다고 한다. 책으로 나온 기차시간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는 배낭 여행자들의 충고를 대충 흘려듣고 ‘겨우 한 달도 안되는 여행에 무슨 시간표‘ 했더니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 하여튼 물어물어 기차표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으니.

   가야 1월 29일 13: 50 출발 --- 파트나 같은 날 16:00 도착

   파트나 같은 날 22:55 출발 --- 뉴잘패구리 1월30일 13:10 도착

   뉴잘패구리에서 지프 합승 ---- 다즐링 3~4시간 주행 끝에 도착

29일 오전부터 서둘러 오토 릭샤를 타고 가야역으로 가서 한참을 기다리고,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탈 때까지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기다려야하고, 다음 날 도착한 뉴잘패구리에서 우리만을 기다린 듯한 지프에 합승하고도 한참을 기다리고, 잘 달리다가 점심 먹는다고 중간에 지프를 세운 운전기사 한참 늑장 부리고, 산간 지역이라 길이 외길이고 바로 옆으로는 협궤 열차가 지나가느라고 또 한참 지체하고, 겨우 당도하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꼬박 이틀 걸린 셈이다.

   파트나.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내야했던 곳. 이곳의 파트나 박물관은 유명해서 일부러 이곳만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곳이라기에 내리자마자 서둘렀다. cloak room에 배낭을 맡기는 데 또 한참이 걸린다. 24시간 업무를 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는 중심지인가보다. 멀미를 느낄 정도로 겹겹이 둘러싼 인파를 헤쳐 가며 서로 자기 것을 타라고 에워쌓는 사이클릭샤의 무리를 현명(?)하게 제압하고 박물관에 당도하니 오후5시가 되어간다. 폐관시간은 오후 4시 30분. 정문은 이미 반쯤 닫힌 상태. 최대한의 미소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해본다. 이곳이 유명하다하여 한국에서 일부러 왔노라고. 내 미소에 화답하듯 최대한의 친절한 표정으로 되돌아 온 답변은, No! 에고, 밤 11시까지 어쩐다?

   파트나 역 집중 탐색에 들어가니 의외로 한가하게 쉴 곳도 있고 그럭저럭 있을 만한데 도대체 할 일이 없다. 역사에 딸린 식당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가며 저녁을 먹어도, 도착과 출발을 안내해주는 전광판에서 우리가 탈 기차를 혹시 놓칠세라 시시각각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딸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지 이미 서너 번이나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또 손에 들고 있고 남편은 새로운 가이드북이라도 쓸 요량인지 가이드북 탐구에 빠져보지만 이 널브러진 시간 앞에서는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일 뿐, 제 풀에 지쳐버린 우리는 이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밤 10시가 되어가도 줄어들지 않는 대단한 인파. 10억이 넘는다는 인도 인구를 새삼 눈으로 확인한 듯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잠시 어리벙벙한 기분이 되어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본다. 남한의 33배라는 인도의 인구가 10억이라면 인구밀도 면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4800만명×33=158400. 우엑! 15억이 넘는 곳에서 우리도 아귀같이 살고 있구나! 자국의 국력을 위해서 인구 감소를 염려하고 인구 증가를 꾀하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인구 문제는 ‘전 지구적 크기의 사고’로 생각해야 할 인류 과제가 아닐까, 하는 감당 못할 걱정까지 한 곳이 바로 이 파트나이다.

   드디어 다즐링. 그동안 인도에 와서 하루도 편하게 발 뻗고 자 본 적이 없었던 우리, 특히 남편이 고심 고심한 끝에 ‘벨레뷰 호텔(Bellevue Hotel)’을 골랐다. 체구가 작다는 것은 여행할 때 만큼은 축복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 자리도 절대로 좁지 않으며 형편없이 좁은 로컬 버스나 지프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며, 아직은 어린 딸아이와 싱글 침대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축복 때문에 늘 가운데에 껴서 자는 딸아이는 침대 사이 빈 틈에 몸의 일부가 끼기가 다반사고, 두 여자들 먼저 배려해주는 남편은 제일 좋은 이불이나 담요 등을 양보하기가 일쑤이다 보니 늘 새우처럼 움츠리고 잠에 든다. 북인도의 겨울 날씨는 만만한 게 아니어서 밤에 잘 때는 내복이나 침낭이 필요한데 평소 내복의 덕을 보지 않는 남편은 ‘꿈꾸는 나라’에서 거의 매일 밤 추위에 떨면서 잤으니 특히 고도가 높은 다즐링에서 호텔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다 할 수밖에. 

   특히 다즐링에서의 호텔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한 때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일을 했었다는 티베트인 주인장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호텔 주인보다도 친절하였다. 매일 밤 뜨거운 물을 넣은 핫팩을 방에 넣어주는 배려 덕분에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졌다. 방에는 난로가 있어서 110루피를 내면 10kg의 나무를 사서 불을 지필 수가 있는데 매일 저녁 난로 옆에 앉아서 불을 쬐는 맛은 여행 중 단연 최고의 낭만이었다. 14살 먹은 일하는 남자 아이가 불을 지펴주러 오는데 말끝에 붙이는 ...., Sir. 가 그렇게 예쁘고 살가울 수가 없다. 어느 때는 이 소년이 안쓰러워 그냥 돌려보내놓고 남편이 불을 붙이는 데 생각 만큼 잘 되지 않아서 종이란 종이는 모두 난로 속 불쏘시개로 쓰였는데 쇼핑 봉투, 약봉투, 각종 영수증, 하다못해 여행용 티슈까지 나중에는 떨어져나간 가이드북 겉장까지도 희생양이 되었다. 딸아이의 원망까지 들어가며 히말라야 등산학교, 동물원에서 받아온 팸플릿도 그렇게 제 수명을 다했으니, 낭만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법인가.

   이 난로 불붙이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겪었던 여러 어려움 중의 상징 같은 것이었으니...

-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는 토이 트레인을 타려고 몇 번이나 다즐링 역으로 달려가서 표를 알아보았지만 끝내 타 보지 못했다. 그림의 떡 같은 토이 트레인, 표 구경조차 못하다.

- 이틀 째. 콜카타 행 기차표를 예매하기위해 다즐링역으로 가서 기다란 줄 끝에 섰다.  문도 없는 역사는 산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라도 되는지 몇 겹을 껴입었는데도 춥다. 정전으로 예매 중단 사태. 두 시간을 추위와 싸워가며 전기가 들어오길 기다린 끝에 직원이 하는 말, “내일 아침에 오세요.”

- 이틀 째 오후. 히말라야 등산학교가 있는 동물원을 허위허위 찾아갔더니 입장불가. 매주 목요일이 쉬는 날인데 이날이 목요일이다.

- 다음 날. 아침 7시. 전날 밤 위스키를 마시고 잔 남편의 상태가 최악이다. 그래도 행동은 함께 하자고 따라나선 남편. 역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8시 업무 시작인데 사람들이 미리들 나와 있다. 드디어 내 차례. 전날 써 놓은 예약 종이를 내미니 대기표도 끊어줄 수가 없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버스 타고 가란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먼저 들어가 쉬겠다기에 시계를 달라고 했더니 신음처럼 한마디 한다. “손목을 끊어.” 남편은 이날 저물 무렵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 환전하기. 여행지 마다 두 집 건너 하나 있는 게 환전소인데 여기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은행에서 하자. 세 군데의 은행에 가본다. 환율이 좋고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은행엔 세 번이나 가고 은행 매니저까지 만나 문의한다. 나중에 맨 마지막으로 가 본 은행에서야 이유를 알다.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환전이 불가능하단다. 옷가게를 겸한 사설 환전소를 찾아 갔더니 친절하긴 한데 환율 최악에 수수료는 최고다.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거겠지.

- 타이거 힐에서 보는 일출 감상이 최고라는데 연신 안개로 자욱하다. 아침마다 옥상에 올라가서 날씨를 살핀 남편의 의견대로 이곳은 포기. 이곳을 다녀온 벨기에 청년-다즐링 들어올 때 지프를 합승했었다. 인도에 온지 5개월 반이 되었다한다.- 말이 온통 구름이었노라고 한다. 안가길 잘 한 건데 이래저래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다즐링에서 보낸 날들이 참으로 쓸쓸해 보이겠지만 이곳은 절대 오지가 아니고 두메산골이 아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대형 마트를 만날 수 있어서 정찰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었으며 우리의 CGV같은 영화관도 있어서 영화도 즐길 수 있었다. 다즐링차로 유명한 곳이라 우아한 찻집에서 귀에 익은 음악을 들으며 제대로 된 얼그레이 홍차도 마실 수 있었다. 관광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있는 호텔이나 식당, 상점들은 상당히 서구화 되어있어 인도의 다른 곳 보다 깨끗하고 친절하여 오히려 인도 분위기(?)가 제일 덜한 곳이었다. 그러나 해발 2,200여 미터 위에 자리 잡은 산악 도시인 이곳의 실제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척박하고 다른 인구 많은 도시와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급수차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물 문제나 하수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겠고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주변을 벗어나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보면 역시 수많은 인구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즐링에서 즐겼던 위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문화, 이를테면 쇼핑, 영화 감상, 레스토랑 순례 같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곳은 참으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탈바꿈된다. 타이거 힐이 생략되었기 때문일까? 호텔에서 심부름 하던 14살짜리 소년의 해맑은 미소 때문일까? 우리 내외는 이 소년을 볼 때 마다 이 소년의 미래를 걱정해주곤 했었다. 그 소년은 혼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으며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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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바라나시, 너의 바라나시

   몇 번의 여행에도 도대체 면역체가 생기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이다. 바라나시 정션역에서 부터 따라붙은 두 명의 릭샤왈라들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몇 개의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를 자의 반 타의 반 둘러보는 일은 악마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것이 이럴까 싶게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다.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거든, 사는 게 너무 따분하고 시시하게 여겨지거든 한 번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과 대결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악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아귀다툼으로 살아들 가겠지만, 그래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이성적인 납득이야 가지만, 한 번 부딪혀보시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여 년을 이어온 고대 도시의 모습을 이번 여행에서야 어느 정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은 여행사의 단체배낭프로그램에 합류해서 왔었기 때문에 우선 숙소부터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떨어졌었다. 이곳에서 종종 발생하는 불미스런 일 때문에 지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긴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 다른 점을 내 경험해보리, 다짐을 하며 갠지스강변에 있는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끈질긴 릭샤왈라들에게 몇 군데 끌려 다닌 후 윽박질러서 겨우 내 뜻으로 찾아간 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구미코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에는 인도 악기를 배우는 여행자들이 거의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는 내가 새삼 무슨 악기를 배우겠는가? 주로 도미토리로 운영되는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으며 음악에 몰입한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저 인도 음악에 젖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개별 배낭 여행자들(특히 일본인)에게 인기 있는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달랑 침대 두 개와 바닥에 깔고 자는 매트리스 몇 개가 남았을 뿐이었다. 침구 상태도 엉망이었다. 비좁은 것은 시커멓게 때에 쩐 것에 비하면 흠도 아니었다. 아그라행 야간 침대 버스의 매트리스가 더 좋았다고나할까. 아, 그래도 좋다. 젊은 애들이 넘보기 전에 얼른 ok를 하고는 남편과 딸아이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방을 보여주었더니, 아, 이 원망의 눈초리!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로비로 쓰이는 방 한가운데서는 old lady 어쩌구 하는 그네들의 소리도 들려온다. 나를 두고 한 얘긴가? 포기다.

   강변에 위치한 호텔 중 제일 깨끗해 보이는 호텔(‘시타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가 제일 전망 좋은 방을 얻는다. 양 면에 창문이 달려있어 창을 열면 그대로 갠지스강이고 쪽문을 열고 나가면 그대로 발코니여서 가트(강변을 따라 형성된 계단)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갠지스 일출을 방안에서 볼 수 있다니 이 웬 호사이랴, 후훗.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의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지나고 보면 귀여운 일이고...첫날 밤 9시 무렵, 술이나 한 잔 할까하고 어렵게 구한 술을 들고 가서 안주삼아 계란 프라이를 시켰더니 늦은 밤인데도 귀찮아하지 않고 one side or two side..하며 열심히 주문을 받기에 좀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하여 마음 좋은 남편은 그 중 나이 먹은 직원에게 인심 좋게 술도 권했다. 얼마 후 내 온 계란 프라이. 삶은 달걀을 종으로 반을 잘라 살짝 기름을 두른 희한한 모양새인데 언제 삶아놓은 달걀인지조차 의심스럽고, 헛헛헛, 헛웃음이 나오는 데 이 녀석들 낄낄거리면서 이게 인디안 스타일이라는 거다. 다음 날 주인장한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했더니 미안해하면서 그래도 자기네 식당을 이용해 달라기에, 난 당신네 직원들 싫어서 이용하지 않을 거다, 라고 했더니 남편은 뭐 그런 얘기까지 하느냐고 한다. 마지막 날 체크 아웃할 때, 술을 한 잔 얻어 마셨던 그 직원이 사과를 해온다. 농담이었노라고. ‘너희는 손님한테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싶었지만 “한국에 가면 우리 호텔 홍보 좀 많이 해 주세요” 하며 미안해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정말 진지하게.




   핵심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생각한 바라나시의 핵심은 화장터도 아니고 힌두교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강물도 아니다. 바로 수백 년 간 이어져온 골목길이다. 예전에 왔었을 때는 한낮에도 혼을 빼놓을 정도로 비좁고 더럽고 으스스하던 미로 같던 골목들, 한 번 미궁에 빠지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골목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난데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 자신감을 바탕삼아 마지막 날 밤에는 전통 공연장을 찾아갔다. ‘International Music Centre Ashram'.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인 <Lonely Planet>에는 소개가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여행자들 대부분이 들고 다니는 <인도100배>에는 소개가 되지 않아서인지 수십 명의 관객 중에 한국인이라고는 우리뿐이다. 골목에 있는 작은 악기점에서도 악기를 배우고 있는 한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건만 이 동네에서는 너무 흔한 공연이어선 지도 모르겠다.

   100줄이 넘는 현으로 이루어진 산뚜르(Santoor), 몸체가 나무로 된 오른쪽 북 다얀(dayan)과 금속으로 된 왼쪽 드럼 바얀(bayan)으로 구성된 타블라. 생소한 산뚜르가 내는 지루하고 졸린 듯한 연주도 타블라 주자의 빠른 손놀림과 왼쪽 드럼에다 손바닥을 북북 문지르는 야릇한 음색이 더해지면 묘한 음악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1부가 끝나고 시작된 2부는 카탁(Kathak) 댄스로 주로 북인도의 궁정에서 공연되었다는 전통 춤이다. 춤을 추는 무희는 10대 중반의 소녀로 딸아이 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인다. 어쩌다 한국에서 보았던 연륜 있는 춤꾼에 비해 춤사위가 날렵하고 경쾌하고 분명하다. 타블라 주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공연이 잠시 펼쳐진다. 예를 들어 타블라 주자가 10박자의 리듬을 연주하면 무희는 그 10박자에 대응하는 춤사위를 발로 두드리는 식이다. 타블라와 겨루는 발 춤사위가 기가 막히게 흥겹고 얼마나 멋진지 딸아이는 넋 놓고 지켜보다가는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른다. 놀랍다는 표정이다. 2시간 남짓 공연을 보고 나니 밤 10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며 딸아이가 던지는 한마디가 나를 고무시킨다. “나도 타블라 한 번 배우고 싶어.” 7살에 시작한 피아노를 단 2개월 만에 “피아노 계속하면 나,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하면서 손을 놓고 말았었다. 왼손잡이인 딸아이에게는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음악의 아름다움에 젖어 보기도 전에 기능부터 익히도록 하여 음악을 멀리하게 만든 결과가 되어 버렸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바라나시 시장에서 인도 옷 한 벌을 사는 데 한마디의 영어도 필요하지 않았다면 믿어지려나. 호객 행위부터 흥정까지 우리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구사하는 인도인 옷가게에서 옷 한 벌을 사들고 나오면 이상한 성취감에 빠져든다.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우리말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디가요?” “릭샤 필요해요?”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들이대는 “어디가요?”에 질렸는지 한 번은 딸아이가 묻는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알아서 뭐해요?”를 영어로 어떻게 하냐고. 영어 문장을 알려 주었더니 열심히 외운다. 한 번도 써먹지 못해 다행이긴 했지만. 해외 여행가서도 영어 대신 우리말을 사용한다면 영어 배워 뭣하지? 이곳 북인도만 해도 지천에 널려 있는 게 한국 식당인데-드물긴 하지만 어느 거리 식당에서는 한국어 메뉴판도 있다- 머잖아 이곳처럼 한국어가 많이 쓰인다면? 죽도록 영어 배워 몇 마디 써 보는 것보다 국력을 길러 외국인들로 하여금 우리말을 배우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해묵은 해법이 머잖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앵무새식 영어 배우기에 심신이 거덜 난 나는 여기 바라나시에서 잠시 행복한 영어를 꿈꿔본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이따금 딸아이와 남편이 한마디씩 거들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남편은 인도의 현실에 자못 비판적이다. 첫날 델리에서 부터 그랬다.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사람들, 돈 앞에서는 비열할 대로 비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 아귀같이 서로 등쳐먹는 사람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불쌍한 거지들을 보고는 경악했고 인도라는 나라에 오게 된 걸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에게는 ‘인권’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예의’ 라는 표현은 너무나 점잖은 표현이었다. 때로 동정이 지나쳐 화를 낼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냐고, 이런 나라가 그렇게도 좋으냐고도 물어온다. 여기 바라나시에서도 그랬다. 골목 탐험을 완성한 나는 바라나시를 정복한 양 들떠 있는데 남편은 강변에서 본 쓰레기 처리 장면을 끝내 이 이야기에 덧붙여 달란다. 양수기로 강물을 퍼 올려 한군데에 쌓아놓은 온갖 쓰레기를 강물로 밀어 넣던 장면을 꼭 넣어 달라고 한다. 그에게는 거의 다 타서 머리와 다리만 삐죽 남아있는 화장터의 시신이나 강물에서 신성한 목욕을 하는 사람들보다, 이 쓰레기 처리 장면이나 강변을 향해 맨 엉덩이를 내밀며 큰일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인도의 현실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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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꿈꾸는 나라

   아그라. 타지마할. 인도인 입장권 10Rs. 외국인 입장권 750Rs. (1Rs는 약 25원). 샤자한. 뭄타즈 마할. 건축 기간 22년.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한 유폐와 아그라성에서 보낸 권력자의 쓸쓸한 말년. 타지마할 주변의 ‘타즈 간즈’라는 여행자 거리를 접수한 부지기수의 인도판 한국 식당들. 투숙객 대부분이 한국인 천지인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벽 서 너 시에 듣게 되는 정겨운 콩글리쉬 발음.

   이것이 그 유명한, 인도를 상징하고 있는 타지마할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들이라고 우긴다면 절세의 미인 타지마할은 무척이나 섭섭하겠지?  더욱 섭섭한 얘기지만, 나는 타지마할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것도 타지마할을 제외하면 별달리 볼 것 없는 아그라에서.

   14년 전(1994년)의 첫 인도행은 가슴 떨리는 미지의 이상형과의 불꽃 튀는 만남이었다. 인도는 내가 한국인임을 모른다. 한국이 어느 곳에 있는 지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인도의 모든 것을 숨 막히게 빨아들였다. 맨발의 사원 입장, 흐드러진 부겐빌리아, 깊은 우물 같은 인도인의 커다란 눈. 현란한 색채의 시크교 터번, 셀 수 없는 무수한 힌두교 신들, 석가모니의 발자취, 끝도 없는 지평선, 길지 않은 형광등 두 개로 이루어진 시골길의 쓸쓸하고도 외로운 가로등...허름한 식당의 조악한 냅킨 한 장, 반 쯤 찢어낸 각종 입장권이나 휘갈겨 쓴 영수증 한 장. 모두가 소중한 기념품이 되어 앨범 속에 곱게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었다.

   7년 전(2001년)의 두 번 째 인도행은 첫사랑의 달콤함을 끝내 못 잊어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이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준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팁이라도 두둑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시신이 안치된 진짜 석관과 가짜 석관을 두루 보여 주었던 첫사랑은 간 데 없고 비싼 입장권을 통해서 내가 한낱 이방인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3년 전(2005년)의 남인도.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그래도 첫사랑이잖아. 네가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찾아내서 내 첫사랑을 다시 확인할거야. 역시 네 품은 다양해. 미안해. 역시 너는 품이 넓어. 다시 시작하자.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그리 관심 없어하면서 우리나라와 인도의 환율을 궁금해 하던 너. 환율 덕분에 인도에 올 수 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던 너.

   2008년. 네 번 째 인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야. 내가 너를 지켜보았듯 이제는 나의 가족을 지켜봐 줘. 오고 가는 정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아,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몇 번씩이나 와서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인을 만나면 나눠주리라 하던 소주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맬 때는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되는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며 옛날을 그리워하면 그건 내 욕심이겠지. 

   우다이푸르가 나를 역사적인 진지함과 숙연함으로 힘들게 하더니 아그라는 나를 철학적으로 고문한다. 노른자 빠진 달걀 프라이 같은 아그라. 남편과 딸아이에게 타지마할을 꼭 보여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16시간 동안 추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밤새 버스로 달려온 내게 이 고갱이 빠진 사색은 너무 한 것 아닌가? 아, 이 침대버스란 놈! 낡은 대로 낡고 먼지 풀풀 나고 모래 버석거리는 매트리스가 압권인 이 녀석! 1층은 좌석이고 다락같은 2층이 침대칸인데 처음 딸아이와 나는 2인실에, 남편은 통로를 사이에 둔 맞은 편 1인실에 각각 배정 받았는데 너무 추워서 우리의 2인실에 남편이 합류하여 셋이 꼭 껴안고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창가에 자리 잡은 남편은 하마터면 동사할 뻔했다. 속옷에 부치는 1회용 1,000원짜리 온찜질팩 덕분에 겨우 눈을 부칠 수 있었다는 남편. 남편은 그날 밤 유물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실존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여행 내내 어지러운 꿈자리를 호소하던 남편은 인도를 ‘꿈꾸는 나라’라고 불렀다.

   그래도 남편과 딸아이는 이 아그라가 좋단다. 타지마할 때문에? No! 바로 ‘Planet Hollywood'라는 거창한 이름의 아주 작은 식당이 있어서다. 가이드북에는 눈 비비고 찾아도 나와 있지 않은 곳으로 우리가 묵은 ’Hotel Raj'라는 게스트 하우스 바로 앞에 있었다. (아마도) 시크교도인 인상 좋고 과묵한 50대 후반의 주인아저씨의 말없는 환대와 가정식 백반 같은 깔끔한 음식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편안하여 아그라에 머무는 동안 단골 식당으로 드나들다 보니 정이 들었나보다. 이곳에서 먹은 버섯 스프로 입맛을 찾은 딸아이는 이제 완전히 몸이 회복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하루 정도 묵을 뿐인 아그라에서 우리는 이틀을 묵으면서도 떠나기가 아쉬웠다. 하루 이틀 더 묵으면 식당 안쪽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살림집도 구경하고 대화도 좀 나눠보련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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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기행문

                                                                    




◉여행기간: 2008년 1월 14일~2월 8일

◉일정:델리(2박)-기차1박(12시간)-우다이푸르(3박)-버스1박(16시간)-아그라(2박)-기차1박(13시간)-바라나시(3박)-보드가야(2박)-기차1박(기차2회,지프)-다즐링(3박)-버스1박(14시간)-콜카타(4박)-기내1박




1.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소주병 7병을 가지고 갔었다. 오랜만에 우리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워할 우리 동포를 만나게 되면 함께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그들의 향수병을 달래주리라 생각하면서 가지고 간 술이었다. 우다이푸르의 ‘랄 가트 게스트 하우스’에 함께 묵게 된 젊은 20대 한국인 커플에게 1병을 주는 것 외에는 우리의 소주는 그다지 소용에 닿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있어보이지도 않았는데 문제는 무게였다. 여행 중의 배낭 무게는 무겁건 가볍건 그대로 인생의 짐이기에 무게를 조금이나마 줄일 량으로 하루는 남편은 남은 소주를 모두 털어 넣자고 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과 야외 발코니는 그 자체가 분위기 좋은 카페였고, 인도가 만만한 땅이 아니라는 걸 톡톡히 보여주었던 델리의 온갖 사기꾼들을 떠올리면서 안주를 대신했는데, 여기까지는 좋았다. “인도 여행은 여기서 그만하고 싶다. 돌아가고 싶어.” 소주를 모두 비우고 잠자리에 누운 남편은 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곧바로 잠에 떨어졌는데 나는 이후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청천병력 같은 선언은 “그래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혼자이고 싶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번 일정을 잡으면서 제인 먼저 염두에 둔 곳은 치토르가르였는데 그 동기는 한겨레신문에 실린(2007.12.27일자) 인도사학자 이옥순 교수의 글 때문이었다. 신문에서 오려내어 여권 사본 등과 함께 갖고 다니며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는, 이번 여행의 일정 선정에서 제 1순위를 제공한 그의 글을 그대로 적는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때로 한 토막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수백 년을 떠도는 로하르 부족의 이야기가 그랬다. 인도 서부를 여행하다가 마주치는 ‘영원한 방랑자’인 그들은 뿌리가 강해서 뿌리 없는 삶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약속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로하르 부족의 과거를 담은 치토르가르를 찾은 건 변화가 화두인 세상에 진저리가 나던 무렵이었다.

치토르가르는 평야지대보다 150m 높은 산정에 자리한 톱날 모양의 성벽을 가진 산성도시다. 놀이기구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듯 차를 타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견고한 일곱 개의 성문을 통과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황량한 치토르가르는 영화로운 과거를 증명하는 많은 유적을 품고 나를 맞았다.

8세기에 세워진 치토르가르는 성이 많은 라자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슬픈 역사를 반복한 메와르 왕국의 수도였다. 메와르의 힌두 왕들은 ‘영웅본색’의 용감한 지도자였으나 우세한 이슬람 침입자들에게 패배했고 그 마지막은 1568년에 왔다. 무굴제국에게 승리를 내준 왕은 도주했다. 그리고 남은 군인과 여인들은 적에게 굴욕을 당하기보다 명예로운 자살을 택했다.

로하르 부족도 치토르가르를 탈환한 뒤에야 돌아오겠다고 왕에게 맹세하고 정처 없이 도시를 떠났다. 그때까지 절대로 영구한 거처를 마련하지 않을 것이며, 동아줄을 써서 우물물을 긷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밤에는 촛불을 밝히지 않고, 침대에서 편히 잠들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왕의 고통과 왕국의 운명을 함께 한다는 의미였다.

왕은 끝내 치토르가르에 귀환하지 못했다. 그는 인근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죽었다.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약속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로하르 부족은 이후 다섯 가지 서약을 지키며 400년 동안 유랑하였다. 로하르 부족의 서약을 가슴 아프게 여긴 네루 총리는 그들을 설득하여 치토르가르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맹세 때문인지, 유랑생활이 편해서인지 그러나 그들은 곧 유랑생활을 재개하였다.

본업이 대장장이인 로하르들은 농기구를 고치고 막노동을 하며 지금도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러 도시의 변두리에 천막을 치고 잠시 거주하는 그들은 이동이 어려운 우기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쉬운 한 장소에서 지낸다.

방금 전의 약속도 깨는 세상에서 4세기 동안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는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옛날의 그 땅이 아니라고 가지 못하는 그들의 고향을 두 번이나 찾은 이방의 나는 무상한 세상에서 항상 그대로인 것이 그리울 때마다 그들을 떠올린다.

치토르가르의 성채는 비장미를 가진 남성적인 모습이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덜 매혹적이지만 로하르 부족의 일편단심이 향하는 웅장한 치토르가르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엄숙함을 일러주며 오늘도 너른 벌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사람은 시간을 기다리지만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로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접근해오는 릭샤왈라와 흥정한 끝에 터덜거리는 릭샤를 타고 도착한 치토르가르. 40대 중반의 이슬람 신자인 릭샤왈라는 관광지의 인도인답게 참 끈질지고 적극적이고 계산에 민첩하다. 얼마를 더 주면 자신의 훌륭한 영어로 가이드를 하겠노라고 자처하고 나서지만, 웬만한 설명은 가이북이면 충분하고 델리에서 당할 뻔 했던 사기꾼 때문에 한마디로 거절해버린다.

   이옥순 교수의 설명처럼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곳은 아니지만 ‘승리의 탑’이니 ‘명예의 탑’이니 무슨 궁전이니 그럭저럭 볼만하고 허물어져가는 잔해마저도 카메라에 담는다면 멋진 사진이 나올만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영화를 촬영하거나 광고 사진을 찍어도 멋지겠다’ 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들었다. 지난여름에 갔었던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오녀산성이 잠시 떠올랐다. 해발 약 820m 높이에 있는 곳으로 동명성왕의 호기로운 기세가 느껴지던 곳이었다. 물론 규모가 다르지만 높은 산정에 자리 잡아 한 왕국을 이루고 천하를 호령했던 그 용감무쌍하고 기세등등하던 영웅호걸들을 잠시 떠올려본다.

   얼마 후 분명 처음 흥정할 때 치토르가르 지도를 보여주며 전체를 모두 아우르는 코스를 간다고 해놓고는 몇 군데 유적지만 둘러보고 다른 말을 한다. 다시 얼마를 주면 저 안쪽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로 안내하겠다고 하는데, 시시콜콜 따지기도 피곤하고 여기까지 와서 대강 보는 것도 그렇고, 결국 마지못해 그러자고 해놓고 따라가자니 속에서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그런데 인적이 거의 없는 외길을 느린 속도로 가며 주변의 들판과 나지막한 언덕과 옛 저수지를 하나씩 천천히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나 매정하게 물리쳤건만 릭샤왈라 아저씨는 우리의 표정을 보아 가며 틈틈이 간단한 설명도 잊지 않는데 어느 순간, 진짜는 이런 외진 곳일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드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뚝 솟은 이곳 성채 절벽 아래로 펼쳐진 넓은 평야가 저 멀리 산 까지 닿아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게 바로 이거구나. 눈치 빠른 릭샤왈라 아저씨의 설명으로는 이 들판이 옛날에는 전쟁터였다고 하는데,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아련함으로 눈물이 핑 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평야를 보고 목이 메이다니, 이옥순 교수의 애절한 위의 글이 아니어도, 치토르가르의 비극적인 역사를 몰랐다 해도 분명 솟아오를 눈물이었으리라.

   돌아오는 길. 치토르가르 버스 정거장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처음에 흥정한 금액 외에 좀 더 많은 돈을 우리의 릭샤왈라에게 주자는 남편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다. 가이드 하겠다고 제시했던 액수 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애쓰던 우리의 릭샤왈라는 나중에 만난 어떤 릭샤왈라 보다도 더 친절하고 정직했다는 것을 여행이 끝날 무렵에야 알 수 있었으니 적어도 후회할 일은 남기지 않은 셈이 되었다.

    쿰발가르는 메와르 왕조에 있어서 치토르가르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15세기에 세워진 요새로 해발 1,100m고지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비상시에 왕들이 이곳으로 후퇴하던 곳으로 무굴황제 악바르의 연합군조차도 그 방어벽을 뚫고도 겨우 이틀간 겨우 버티었다는 곳이다. 다음 날, 예약한 대절 택시를 타고 쿰발가르라는 곳으로 향했다. 전 날 다녀온 치토르가르의 여운에서 미처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여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역시나 쿰발가르는 말 그대로 철통 요새였다. 해발 1,100고지 위, 둘레 36km 이르는 성벽. 그러면 뭐하나. 결국 1568년 패망한 메와르왕조는 마침내 치토르가르를 떠나 우다이푸르로 천도한다.

   그런데 쿰발가르의 성채에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딸아이의 걸음이 자꾸 뒤쳐진다. 힘들어하는 딸아이의 호소를 꾀병으로 생각한 남편이 한마디 한다. 잠시 기분이 상한 아이를 다독이며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간을 10여 분 남겨놓고 짜이를 한 잔 마신 후 다시 라낙푸르를 향해 출발한다.

   라낙푸르는 자인교 사원이다. 15세기 메와르 왕조 시대에 지어진 대리석 사원으로 사원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1,444개의 기둥과 기둥에 새겨진 각기 다른 다채로운 문양으로 무척이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사원이지만 겉모양을 보아서는 그 호화로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숲 속에 파묻혀있고 하늘을 뒤덮다시피 한 까마귀까지 더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사원의 이런 모양새는 외적 형태보다는 내면의 풍부한 생명의 중요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남인도의 스라바나벨라골라의 자인교 성지와는 또 다른 자인교의 모습이다. 몇 개의 유명한 자인교 사원이 더 있다는 데 인연이 닿으면 자인교에 대해 집중 탐구를 해보리라.

   그런데 이렇게 멋진 사원을 단 5분 만에 보고 나와야했다. 딸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택시에서 쉬게 하고는 남편과 겨우 번갈아가며 보고 나와야했기 때문이다. 다시 우다이푸르까지 돌아오는 60여km는 좌불안석, 열이 펄펄 오르는 딸아이를 보니 여행은 무슨 여행. 여행 준비에 들떠 지내던 지난 몇 개월의 어리석음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된다. 다행히 네 자녀를 두었다는 55세의 친절한 택시 기사 아저씨의 배려로 우다이푸르의 한 소아과에서 의사의 진찰과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라고 묵묵히 순서를 양보해 준 현지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딸아이는 그 후로 이틀을 꼬박 앓은 후에 회복할 수 있었고 우리 내외는 딸아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우다이푸르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대신했다.

   인도 여행은 처음인 남편이 겪은 인도의 각종 부조리와 모순과 더러움과 차별로 마음이 상한 남편은 결국 여행 중도 포기 선언을 하고(취중이었지만), 특별한 원인 없이 사흘을 앓았던 딸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 만 으로도 내가 그간 가꾸고 지켜온 나의 왕국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기 보다는 여행이 잠시 흔들렸었다. 한 왕국의 눈부신 번영과 영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건재하고 있는 견고한 성채도 결국은 역사 속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가 되어버리듯 우리 가족의 여행도 결국엔 우리만의 옛 이야기가 되어 사진으로만 몇 장 남게 되겠지. 그나저나 집에 두고 온 베고니아 화분이 걱정스럽다. 물을 좋아하는 베고니아는 얼마 전 끈이 풀어진 강아지의 습격을 받고 이제 겨우 서너 장의 이파리로 안쓰럽게 재기하는 중이었는데 차라리 누구한테 맡길 걸 그랬나. 커다란 공중 정원 같은 치토르가르와 아무도 근접 못할 견고한 쿰발가르를 버려야만 했던 메와르의 슬픈 이야기에 겹쳐 집에 홀로 남은 베고니아가 자꾸 마음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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