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노부후사 > 공산당 선언 2강

<공산당 선언> 2강.

* 칼 마르크스의 사상 개요

칼 마르크스는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언급되는 사람이다. 경제학에서도, 사회학에서도, 정치학에서도 다루어 지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을까?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하인의 눈에는 영웅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세상 사람들이 위대한 영웅으로 떠받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일상 생활을 들여다보는 하인에게는 그 사람의 영웅적 면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해서 시시콜콜한 뒷이야기까지 알아야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생애와 그 사람이 남겨 놓은 작품을 연결지어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마르크스처럼 사회의 변혁을 바랐던 사람같은 경우에는 사상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변혁하고자 했다면, 그만큼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마주했던 시대적 상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18세기는 낭민주의의 시대였다'라고 하는 어설픈 지침이라도 가지고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애를 얘기할 때, 우리가 쉽게 쓸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인생을 10년 단위로 끊어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가능하다. 나는 내 생애를 심란했던 시기와 심란하지 않은 시기로 나눈다. 15세에 담배를 피우면서 인생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일진도 아닌 찌질이가 담배를 피우려니 어머니께 걸릴까봐 걱정이 되었고 자연히 어울리는 친구들도 바뀌면서 인생이 피곤해졌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심란함을 기준으로 해서 나눈다. 기준을 정하는 건 자기 맘이다.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의 생애를 나눌때 청년 마르크스와 노년 마르크스로 나누곤 한다. 알튀세르같은 철학자는 양자 사이에 엄청난 '인식론적 단절'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뚜렷한 사상적 줄기가 마르크스의 청년기에서 노년기까지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마치 어느 날 신의 계시라도 받았다는 듯이 그의 생애를 청년/노년 하는 식의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보다는, 그의 일생에는 커다란 기둥이 있었고 거기서 파생된 곁가지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시대는 어떠하였고 그 시대에 마르크스는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은 누구든지 과거로부터 축적된 자신을 가지고 있다.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특징은 self-reflection(자기반성)에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항시 스스로를 제3자의 입장에 위치시키고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곤 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옥같이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사람은 철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객관적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것도 많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면도 강하다. 자기 반성, 자기를 객관화해서 보는 짓은 사람만이 한다. 마르크스는 특히 자기 반성에 심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 칼 마르크스 주제 서평(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245.html ) - "" 표시는 이 서평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더러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하여 그를 경멸하는 경우가 있다. 그는 부르주아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교양의 현식 중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정한 근대인'이었던 까닭에 거기까지는 갔던 것이며, 거기서 더 나아갔을 따름이다"

마르크스하면 흔히 '좌파 혁명가'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 전에 그가 철저한 '근대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근대의 핵심 키워드는 '계몽(Aufklaerung - Enlightenment)'과 '주관성-주체성(Subjectivity)이다. 먼저 계몽은 문자 그대로 '빛을 비추다Aufklaerung',  '명쾌하게 하다Enlightenment'라는 뜻이다. 이것들의 대립항은 기독교적 신(神)이다. 단테의 <<신곡>>을 생각해보자. <<신곡>>은 천국편, 연옥편, 지옥편의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테가 로마 최고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구경하다가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곡>>이 아무리 1300년대의 작품이라곤 하나 '신'이 중심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 당시까지 서양인에게 신을 빼놓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명륜당의 한  노인에게 '이제부터 제사지내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싸대기 맞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볼때, 신 중심의 시대에서 벗어나 계몽과 주관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엄청난 단절(chasm)임을 알 수 있다. 더이상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 이성의 힘으로만 세계를 파악하겠다는,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미성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더이상 신의 피조물로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의지, 이성에 따라 세계를 개조하고 경영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신을 죽였다고는 하나 보다 철저하게 신을 죽인 이는 칸트임을 알 수 있다. 칸트야 말로 서양근대철학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작업을 한 것이다. 마르크스를 얘기할 때, 그가 이러한 사상적 위치에 놓여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서양근대에 등장한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된 지식들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쌓아올렸다. 이들이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이며 이들이야 말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이다. 마르크스의 책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자유롭게 인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근대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항목들의 기본인 것이다. 한국과 같이 몽골기병이나 주억거리는 자들은 우파가 아니다. 좌파라면 여기에서 먹고 사는 문제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의 생몰연대(1818-1883)을 보면 그가 19세기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는 17세기부터 시작된 계몽의 시대가 무르익어 근대적 교양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19세기에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면 그의 교양수준이 어느정도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만큼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쌓아 놓은 상태에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단순히 마르크스의 <<자본>>이 어렵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학적인 태도는 이성주의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주관에 머물러 있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로써 끊임없이 검증되고 역사를 통해서 심판받는 이성이다. '역사적 이성주의'라 해도 되겠다. 이는 사실 헤겔에서 충분히 성립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계급적 위치와는 무관한 보편적 이해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당파성을 덧붙여, 그것을 중심으로 삼는다. '물질적 노동'을 역사의 중심에 놓게 되면 '정신의 역사철학'에게는 필수적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통찰과 그것들의 통합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사상의 근원적인 핵심 요소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라 한다면 그것과 필연적 연관에 있는 일종의 하위 범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범주들로는 대략 다음을 거론할 수 있다: 사회계급 간의 투쟁의 역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론을 비롯한 정치적 프로그램; 노동가치론, 착취와 잉여가치에 관한 이론, 경제 위기론. 마르크스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핵심이론의 형성과정과 그 내용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정치적 활동을 이해하는 것을 축으로 삼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핵심 키워드는 '계몽'과 '교양'이고 그것들을 밑바탕에 깐 상태에서 마르크스의 '이성', '역사', '노동'이란 개념이 싹틔었음을 염두에 두자. 이성이란 '인간이 자기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계몽주의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다.

사태를 파악하고자 할 때, 대체로 시간축을 중심으로, 그러니까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피곤 한다. 이런 생각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역사적 의식을 강조한 선구적 인물은 몽테스키외지만 역사철학적 의식에까지 이르지는 않았고 헤겔에 이르러서야 역사철학이 학적 정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심지어 역사적 탐구 방식이 과연 진리에 이르는 길인가를 의심했다. 진리는 부동하는 법인데, 역사는 항상 변화하고 있기에 어떤 대상을 변화하는 것으로서 파악하는 태도가 진리를 낳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곧 '근대의 경험'인 셈이다. 근대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혁명적 변화를 겪으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역사를 통해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관점에서 사태의 기원과 전개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이 둘을 가지고 역사적 이성주의의 방법이라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이 방법은 헤겔에 의해 정립되었다.

고정 불변의 것을 추구하는 이성이 정태적(static)이라면 역사적 방법은 동태적(dynamic)이라 말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이성, 역사적 방법론 이 두가지를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바라 보았다. 이때 역사의 주인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중세만 해도 역사의 주인은 신이었음을 기억하라.
 
인류역사는 여러 요소들이 엮어진 덩어리이다. 그렇다면 이 역사를 무엇을 중심에 놓고 바라볼 것인가. 마르크스가 봤을 때, 인류역사의 기반에 놓여 있는 것은 '인간의 행동human activity'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를 흔히 '휴머니스트'라고 하는데 여기서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적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이 아니다. 역사를 신을 배제한 인간 활동의 기록이자 탐구라고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human activity야 말로 인류역사를 만든 핵심적인 요소이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인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 human activity의 내용은 바로 노동Arbeit이다. human activity에는 정신적인 것도 있고 물질적인 것도 있으나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활동이 인류역사를 추동하는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 이와같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 한다. 거칠게 예를 들자면 "강유원은 누구냐?"라고 물었을때, "강유원은 월수입이 얼마다", 강유원은 얼마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다" 따위로 강유원을 정의한다면 이것이 바로 '역사적 유물론'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양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다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이라 생각했다. 단,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말하니 이성이 빠져 있는 것 같으나 이성은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마르크스에 관하여 말할 때 자주 제시되는 것 중의 하나는 엥겔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피력한 견해에 근거한, 사상 연원, 즉 독일관념론,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이다. 독일관념론이라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는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에게 역사와 그것의 전개원리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은 역사를 인간노동의 물질적 실천과정으로 볼 경우에 세부적인 탐구 영역을 이룬다. 프랑스의 사회주의는 노동의 착취에 대항하는 혁명운동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후자 두가지의 공통점은 '노동'이며, 이를 전자와 이어붙이면 '사회와 역사에서의 인간 노동의 중요성'이라는 테제로 수렴된다. 따라서 세가지 사상연원까지 고려할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 노동이 중심인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이때 '유물론'은 형이상학의 한 태도로서의 유물론이 아니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독일 관념론 (이성) - 헤겔의 역사철학을 말함. 역사철학이란 역사를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임.
영국의 정치경제학 (역사) - 어떻게 해서 그 사회의 물질적 생산방식이 이루어지는 지를 따진 것임. 즉 노동에 해당하는 물질적 활동의 매카니즘을 다룬 것임.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 - 노동의 착취에 대항하는 혁명운동의 중요성을 알려줌.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성', '역사', '노동'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이것을 '역사적 유물론'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이성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강유원이 "돈 버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자"라고 해서 강유원이 돈독이 올랐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 역사적 유물론의 장점

민족이라는 것은 과연 객관적 실체인가. 구체적으로 자신이 한(韓)민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사회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공장에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동자들 사이의 유대가 생길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분석할 수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imaginated comunity>>, 나남. 참조.

 1. 민족은 상상에 의해 객관적 실체인 양 발명된 것이다.
 2. 민족은 제한된 구성원을 가진다. -> 배타적 인종주의로 빠지기 쉽다.
 3. 수평적 동료의식을 갖게 된다. -> 전체주의로 빠지게 된다.

 

먹고 사는 방식이 다른 이건희와 내가 과연 같은 민족일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민족'으로도 어느정도 사회를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만큼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 마르크스의 삶

"[3] 1844-1845: "결정적인 시기"
저작: 유대인 문제(1843-4), 경제학-철학 초고(1844), 헤겔법철학비판 서론(1844), 신성가족(1844-5),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

벌린은 1844년에서 1845년에 이르는 시기를 마르크스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 시기'라 불렀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가 철학적 지식을 밑바탕에 놓고 본격적으로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시기이다. 이때 역사적 유물론의 틀이 완성되었다. 인간이 사회 조직 속에서 물질적 생산활동 즉 노동을 하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자기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멀어지고 노동의 산물을 자기가 갖지 못하는 가에 대한 철학, 정치 경제학적 분석이 이 시기의 저작 <<경제학 철학 초고>>에 담겨있다. 여기까지가 마르크스의 학습시기라 한다면 이후 마르크스는 혁명 운동으로의 시기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6] 1849-1852: 혁명에 대한 반성
저작: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

마르크스는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씀으로써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뚜렷이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프랑스 혁명사 3부작>>에서처럼 혁명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 분석적으로 기술하였다.

1852년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 중 핵심적인 것,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위한 기간에 들어가게 된다. 이 연구는 <<자본>>에 의해 집대성된다.

마르크스 사상의 전개과정을 거칠게 나눈다면

1) 철학(특히 역사, 인간본성, 노동)에 대한 연구시기.
2) 파리시대 -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접합.
3) 1852년 정치경제학의 시대 - <<자본>>으로 집대성.

마르크스가 혁명가라 하여 공부를 소홀히 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시의 혁명가 중에서 마르크스만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없다. 평생동안 2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를 이해하려면 마르크스가 공부했었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생각한 역사적 방법은 무엇인지를 공부할 것을 권한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있어 인간의 정신 부분에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을 집어 넣으면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동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을 공부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인간관을 살펴 볼 필요는 없다. 그 당시의 인간이란 신의 피조물이라는 관념이 뿌리박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철학자에 대해 공부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인간관을 따져보아야 한다. 로크, 루소, 칸트, 마르크스가 보는 인간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 하루에 두 시간 씩 한 10년 정도 공부하면 문리(文理)가 트일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마르크스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다.

<<공산당 선언>>의 핵심 키워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체제'이다. '이윤'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다. 모든 것이 이윤을 중추로 하여 돌아간다. 어떻게 해야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이윤을 올릴 것인가가 자본가들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윤을 많이 남기려면 그만큼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상품을 많이 팔아야 될 터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재품을 개발하는 속도를 가속화시킴으로써 소비자의 구매욕구를 자극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새물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다른 한편 최대소비 사회는 완벽한 소비재가 아니라 쉽게 망가져버리는 도구를 양산해 낸다.(좋은 칼을 원하는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서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미국에서 산 칼은 몇번 사용하지 않아 망가지기 쉽상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4000년 동안 지속된 자연경제 체제를 고작 200년 만에 상품경제 체제로 전환시켰다. 사실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 계급만큼 강력한 혁명력을 지닌 계급은 없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양도가 불가능했던 토지와 인간의 노동 그리고 화폐를 양도 가능한 상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단순히 물건을 교환하는 수단이던 화폐까지도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리오 휴버먼이 지은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를 보면 "이윤만 된다면 자본가들은 휴대용 핵무기도 만들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힘, 이것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혁명성이다.

다음 시간에는 에릭 홉스봄의 서론을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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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데메트리오스 > 이 사람 도대체 왜 한국에 살고 있는 건지...-_-

 

출처 - 엽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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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노부후사 > 공산당 선언 1강

이 글은 이번 학기에 강유원 선생님께서 <공산당 선언>을 강의하신 것을 받아 적은 것이다. 필사를 하게 된 이유는 작년 알라딘 정모에서 뵙게된 매너님의 조언때문이다. 매너님은 내게 남이 필사한 것을 보지 말고 스스로 필사해 볼 것을 권하셨다. 이 초라한 글 부스러기는 매너님의 권유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필사하면서, 매너님께서 왜 필사를 권하셨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매너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 글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강유원 선생님의 말씀이 어색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성의를 다하여 받아 적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강유원 선생님의 웹페이지(http://armarius.net)에 올라온 신기철님의 필사글을 참고했다.

<공산당 선언> 1강.

 

얼마 전에 한 학생이 문의를 해왔다. 문의인즉, 강좌명은 <과학, 생명, 가치>인데 강의계획서를 보니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는다기에 확인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은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의 한 양태로써 나타난 자본주의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 자본주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명 경시 풍조,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 생명, 가치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

 

사실 강좌명이 <과학, 생명, 가치>라 해서 자연과학, 생명과학, 윤리학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正答’과 ‘定答’ 모두 ‘정답’이라 읽는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正答’에 대한 강박이 유전자 안에 배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正答’을 말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그것이 일종의 필터로서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정(假定)은 영어로 hyperthesis이다. 여기서 hyper는 거짓, thesis는 세운다란 뜻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든, 사회과학을 공부하든, 인문과학을 공부하든 간에 학문은 가설을 세우는 데서 시작한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 학적 방법이며, 그것이 ‘定答’이다. 예를 들어 단테의 <<신곡>>과 김홍신의 <<인간시장>>을 놓고 어느 쪽이 고전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간시장>>이 고전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납득할 수 있도록 논증해내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인정해 줄 수 있다.

 

만일 이 강의가 2005년이 아니라 플라톤 시대의 아카데미아에서 이루어졌다면 과학이라는 것 자체를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과학에 괴로워 하지 않았다. 자연과학이 인간에게 기쁨과 괴로움을 준 시기는 18세기 이후이다. 생명이 문제시 된 것 역시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였다.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사는게 옳은 것이냐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없다. 그 당시 사람들에겐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에 제대로 충성하는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충과 효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써 받아들여진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추석 때 재산 상속 문제로 어떤 이가 자기 형제를 쏘아 죽였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티카>>에서 고민했던 것 역시 공동체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공동체를 벗어난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 생명, 가치의 문제를 다룰 때,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가설이다. ‘사오정’이란 말을 생각해봐라. 회사에서는 사람을 45세까지만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신분등록을 하고 싶으면 여기서는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으니 퇴직금 가지고 나가서 어떻게든 해보라는 말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생물학적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사람으로 살려면 그 사회가 그를 사람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강유원’ 이름 석자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퇴직 당하면 사회적으로는 끝이다. 담배 안 피고 오래 살면 뭐하나?

 

그렇다면 현재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까닭에 누구도 돈을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국도 미국처럼 의료체제가 자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말하면 돈 없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의 슈퍼마켓을 가보면 찢긴 상처를 자신이 직접 꿰매는 실과 바늘을 판다. 미국에는 한국처럼 공보험이 없기에 사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출발하건 간에 문제는 결국 돈으로 귀결된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악하려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뒤엎자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고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학기동안 이를 적절히 알려줄 수 있는 텍스트인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도록 하겠다. 교재는 박종철출판사에서 출간된 <<공산주의 선언>>이다. 교재를 반드시 준비해 오도록.

 

  마르스크/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

 

 

 

 

 

 

 

 

 

 

* <사회과학의 쓸모> - 지주형

 

http://moraz.egloos.com/919308

 

이 글의 전반적인 주제는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비판적 학문이라기 보다는 기존체제를 정당화하는데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곧 자본주의에 대한 해부학(Anatomy)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싫어했다고들 하는데 왜 자본주의 전복 전략을 세우지 않고 자본주의 해부에 집중했을가? 자본주의가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그런 만큼 오히려 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를 마르크스는 과학적 태도라 보았다.

 

과학적 태도. 오늘날 가장 치명적인 병은 AIDS이다. 그렇다면 AIDS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AIDS를 좋아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것이 과학적 태도이다.

 

보통 마르크스 하면 먼저 붉은색을 떠올리고 그 다음 괴물, 악마와 같은 생각을 한다. 레드 콤플렉스다. 잘 알지 못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가 하려고 했던 작업은 과학적 태도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설명하려 했을 뿐이다. 일단 그 자세로 Text를 읽기 시작해야 한다. 가치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대학에서 신입생들에게 토익특강을 하곤 한다. 토익이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래, 거칠게 말해서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대학이 진정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싶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모르면 모조리 헛것이 되어 버린다.

 

* 우파와 좌파

 

조갑제가 과연 우파일까? 아니다.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잃어버린 똘마니의 슬픔”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우파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서 교양을 쌓아가기 시작한 이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뭔가를 좀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가 가진 교양의 척도는 우파들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럼 좌파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사람이 하는 일에는 ‘necessary and useful’ 즉, 필요하고 유용한 일이 있고 ‘noble’ 즉, 고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필요하고 유용한 일이 뭔가? 바로 먹고 사는 일이다. 서양에서 좌파라 일컬어지는 사람들, 예컨대 마르크스나 에릭 홉스봄 등이 하는 말하는 걸 봐라. 가진 놈들만 먹지 말고 좀 나눠 먹자는 소리를 한다. 즉 좌파는 먹고 사는 거 얘기하는 사람들이고 우파는 한 사회의 교양을 쌓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소위 우파는 불법으로 쓰레기 매립하고 있고 좌파는 그거 찾아서 분리수거하지 그 와중에 서로 나눠서 잘 먹고 살자고 얘기하느라 정신 없다. 한국에서 진정한 우파도 좌파도 뽑아서 얘기하기 힘들다.

 

* 강의의 목표

 

이 강의는 해부학자(anatomist)의 마음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음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있는 그대로(as it is) 알아 보는 데에 일차적 목표가 있다.

 

두번째, <<공산당 선언>>은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를 갖는 문헌이다. 우선 역사를 '前史와 未來史'로 나누었다는 점에서 역사철학적인 의의가 있다. 또한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시민사회라는 정치체제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갔는가 하는지를 살핀 정치경제학적 문헌이며 동시에 근대 모더니티가 보여주는 허무성을 관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문화이론적 의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여러 의미들을 부수적으로 알아본다.

 

세번째, ‘고전’ 하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직접 읽어봄으로써 고전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마인드를 기르도록 한다.

 

* 참고문헌

 

프랜시스 윈, <<칼 마르크스 평전>>, 푸른숲

 

- 무척 쉽고 재미있게 마르크스의 삶에 대해 쓴 책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당시의 세계 사정을 함께 서술하고 있어서 가독성을 높여준다.

 

 

 

 

 

 

 

이사야 벌린,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미다스북스

 

- 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최고의 책이다. 다만 사상사적으로 마르크스를 다루고 있어 매우 어렵다. 지은이 이사야 벌린은 귀족이다. 영국왕실로부터 ‘경’(sir)의 칭호를 받았다. 영국 우익의 거두라 할 수 있다. 우익의 거두가 마르크스의 전기를 썼다.

 

 

 

 

 

 

위의 두 책을 읽기 힘들면 요약한 글(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245.html )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다음 시간에는 이 요약본을 가지고 이야기하려 한다. 세 번째 주에는 에릭 홉스봄이 1998년에 쓴 영문판 <<공산당 선언>> 서론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다.

 

링크: http://armarius.net/bbs/view.php?id=manuscrip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9

 

<<공산당 선언>>을 읽는데 트로츠키의 아프리칸스어판 서론도 중요하다. 벌린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역사적 유물론으로 보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공장을 계속 이동 시키고 명동 땅 값과 홍제동 땅 값을 다르게 만들 듯 공간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시간과 공간 축을 중요 요소로 가지고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시간적 개념에서는 상당히 강하지만 공간적 개념에서는 좀 약하다. 그런 까닭에 공간 축과 관련된 부분을 논의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거론하는 트로츠키의 서론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링크: http://armarius.net/bbs/view.php?id=manuscrip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0

 

* 고전을 정리하는 힘.

 

정리란 머리 속에 떠돌아 다니던 지식들을 어떤 카테고리에 맞춰져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내 머리로 확인하고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만다. <<공산당 선언>> 해설서를 보고 무작정 외운다고 해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고전을 읽고 정리하는 작업은 고전을 내 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이 안 되면 평생동안 남이 정리해 놓은 것에 의존하게 된다. 이건 머리를 남에게 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되면 좀 배웠다는 놈들이 풀어놓는 소문에 죽을 때까지 휩쓸리며 살게 된다. 사태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배웠다는 놈들이 신문이나 방송을 타고 “세계가 급변하고 있다”, “시간이 촉박하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 그렇기에 고전을 읽고 있으면 내가 세상에 뒤쳐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모두 뻥까고 있는 거다. 실제로 경제 환경은 하루하루 크게 바뀌지 않았다. 크게 보아 6, 7년 단위로 변했다. 지금 하는 일도 알고 보면 6, 7년 전 쯤 하던 방식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고전을 천천히 읽으면서 정리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 2년 정도 경제경영 관련 책 안 읽는다고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번 학기 열심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게시글 아래 선생님께서 이렇게 댓글을 다셨다. "hypo의 뜻을 제가 착각했습니다. 어떤 분께서 제게 이메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hypo는 "아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hypothesis는, 어원적으로, 아래에 놓은 것이라는 뜻이죠." 글 내용상 수정하기가 뻑뻑하여 그냥 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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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리뷰 특강(1): 추리소설 리뷰

 

‘리뷰를 잘 쓸 자신이 없어서 리뷰를 안쓰고 있다’는 어느 서재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나도 그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구나, 싶어서. 이대로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아 리뷰특강을 마련했다. 이 특강은 리뷰에 자신이 없는 분들을 위해 만들었으니, 4대천황을 비롯해서 리뷰 잘쓰시는 분들은 보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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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특강 1: 추리소설 쓰는 법


 

 

 

 

 

 

<살인자들의 섬> 리뷰를 쓰느라 무진장 고생을 했다. 이말을 쓰면 결말을 암시하는 것 같고, 저말도 안되겠고. 고민 끝에 난 <쥬라기공원>,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같이 섬에서 일어난 작품들을 언급하다 끝을 맺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다음 글을 보자.

아영엄마
저는 툭하면 스포일러성 리뷰를 쓰는지라 추리소설 리뷰 쓰는 거 포기했습니다.ㅜㅜ - 2005-03-04 02:35 삭제

그렇다. 나뿐 아니라 다들 그런 거다. 심지어 땡스투의 일인자 아영엄마까지도. 추리소설 리뷰는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나는 추리소설의 대가 물만두님의 리뷰를 분석하게 되었다. ‘하트잭’이라는 소설에 대해 만두님이 쓴 리뷰다.

[퍼트리샤 콘웰의 세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제목은 <법의관>, 두 번째 제목은 <소설가의 죽음>이었는데 갑자기 세 번째에서 뜬금없어 보이는 제목이 등장했다..]

만두님은 제목을 물고 늘어지며 여덟줄을 쓴다. 콘웰의 다른 두 작품을 읽어야 이럴 수 있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그건 아니다. 책날개에 보면 작가의 이력과 함께 기존 작품들이 나오지 않는가.


다음에 작품분석이 이어진다. 먼저 약간 비판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이 작품은 처음 두 작품보다 작품성에서는 그 다지 돋보이지 않는 작품이다. 사건에서 정치적 연계성이 너무 심화되어 사건 자체에 대한 작가의 초점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마지막 결말도 순식간에 결정 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어느 정도의 내공이 없으면 쓸 수 없다. 하지만 ‘초점’ ‘정치적 연계성’같이 어려운 말을 섞어서 대충 둘러치면, 누구나 그럴 듯한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까 깠으니 칭찬할 차례.

[스카페타 시리즈가 매력적인 것은 인간관계의 가감 없는 드러냄에 있다....]

만두님처럼 장점을 콕 찍어내지 못할지라도, 되는대로 얘기하면 남들은 그럴듯하게 봐준다. ‘뭔가 있겠지’라고 믿어주는 것, 그게 이 세계의 속성이다.


칭찬을 했으니 사소한 결점을 지적할 차례.

[마지막으로 오타가 있다. '임도'... 읽을 때 인도를 잘못 썼군 했는데 계속 '임도'로 나온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더니 '임도'란 말은 없다...]

편집자의 댓글에 의해 오타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사전에도 없는 말을 각주도 없이 쓰는 건 지적되어야 한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대신 표지가 너무 좋았다...]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끝은 칭찬으로 맺어야 한다는 만두님의 배려가 돋보이는 문장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걸 정리를 하자면, 일단 작가와 제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비판적인 작품분석을 한 뒤 장점을 언급해 주고, 오타와 표지 등 책의 전반적인 상황을 정리해주고 끝내는 것, 그게 추리리뷰를 쓰는 ‘만두법’이다. 여기 어디에 스포일러가 숨어 있는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만두님의 땡스투가 늘 상위권을 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내가 쓰려다 실패한 <살인자들의 섬> 리뷰를 써본다.


먼제 제목 가지고 늘어지기.

[데니스 루헤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미스틱 리버>.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인 <살인자들의 섬>이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미스틱 리버’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독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되도록 한글을 쓰기로 했단다. 제목처럼 이 사건의 배경은 섬이다. 원제가 ‘shutter island'니 ’셔터 섬‘으로 하는 게 옳겠지만, ’셔터‘가 방범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해 ’살인자들의 섬‘이 된 것]


다음에 비판적 분석.

[사실 이 작품은 전작인 <미스틱 리버>에 비해 작품성에서는 돋보이지 않는 작품이다. 아방가르드적인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전작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다다이즘을 빙자한 포스트모던으로 회귀하려는 작가의 엘레강스한 어프로우치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다]


칭찬할 차례.

[그럼에도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수호의 파수꾼인 보안관도 사실은 두통이 날 때마다 약을 먹어야 하고, 뭔가 마려운 게 있을 때면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약한 존재인 것이다. 섬에서 벌이는 그들의 사투를 보면서, 우리는 아쉬울 때는 서로 도와야 하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결점 지적.

[중대한 오타가 있다. ‘밥을 흘리다’를 ‘밥을 홀리다’로 기술해 놓은 것. 아니 ‘밥’이 무슨 사람인가, 홀리게? 사소한 실수라고 넘어가기에는 의미의 차이가 너무도 지대하다]


그리고 결말.

[그렇긴 해도 출판사 이름은 참 좋다. ‘밀리언 셀러 클럽’이라니, 비슷한 제목의 영화가 오스카상을 받기까지 한 걸 보면 이름은 정말 잘지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어떤가. 이제 좀 자신감이 생기는가. 배우면 시험을 봐야 하는 법, 일단 추리소설을 읽고 리뷰를 한번씩 써보기 바란다. 모든 사람이 자신있게 리뷰를 쓸 때까지, ‘리뷰 특강’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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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리뷰특강(2): 소설집 리뷰

 


리뷰 특강의 폭발적인 인기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난 사람들이 얼마나 리뷰 때문에 고통받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리뷰를 못쓴다고 생각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제대로 된 리뷰특강이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원래는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하나’에 관해 쓰려고 했는데, 제보가 하나 날라왔다.

연보라빛우주
마태우스님! 저, 여러 개의 소설이 담긴 소설집 리뷰가 영 자신이 없어요. 소설이 여러 편인데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요?  - 2005-03-08 12:51 삭제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아니 많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는 능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안되니 이거 얘기하고 저거 얘기하다 보면 벌써 글자수 제한에 걸렸다 (옛날에 알라딘에서는 글자수가 2천자 이하였다). 그래서 오늘 특강은 소설집 리뷰에 관해 하기로 했다. 소설집 리뷰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리뷰만 올렸다면 두자리숫자의 추천을 받는 플레져님, 그분이 쓴 <정혜> 리뷰를 보자.


 

 

 

 

 

[한 권의 책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히고, 꾹꾹 눌러 밑줄 치고 옮겨 적는다. 나는 한 권의 책이 갖고 있는 무게만큼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한밤중에 갈 곳이란 아파트앞 마트. 떨이 물건 파는 아저씨도, 야채 비싸기로 소문났다며 마트의 상인과 실갱이를 하는 사나운 주부도...나를 그냥 지나친다......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종교 의식처럼 한 권의 책을 읽은 뒤엔 남아있는 그 마음이 오래오래 간직되어 틈틈이 찾아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플레져님은 책을 읽고 난 뒤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멋드러진 리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나서는 마트에 가는 게 좋다. 왜? 한권의 책을 읽고난 뒤의 마트 풍경은, 평소 보던 것과는 달라 보이니까. 이런 말을 하면 꼭 “선생님, 저희 집 근처에는 마트가 없어요!”라고 하는 분이 있다. 그런 분께는 이렇게 대답하련다. “이사 가세요! 좋은 리뷰를 쓰기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합니까?”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이라고 하기에 나는 정말 그렇네 하며 피식 웃었다. 사랑의 다른 말은 뭐게? 내가 내게 묻고 내가 대답한다. 사랑의 다른 말은 배신. 사랑의 유의어는 배신. 사랑의 기원은 배신과 질투....]

<정혜>의 주제는 ‘사랑과 배신’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단어에 대해 이렇게 한번 짚어준다면, 리뷰에 더 몰입될 수 있다. 반대말, 다른 말, 비슷한 말.... 이런 걸 쓰려면 평소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익혀 놓아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사랑과 배신과 상처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다. 자처해서 슬퍼지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든든한 남편과 알토랑 같은 아이들을 키우며 그들이 빠져나간 집안에 홀로 남아 뭔가 서글퍼지는 마음이긴 한데 정체를 모르겠다면 한번 읽어보기를...]

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한 뒤, 언제 읽는 것이 좋은지 말해준다. 물론 웬만한 대가가 아니고서는 언제 읽으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대충 둘러치면 다 속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세계란 그런 거니까.


[사랑에 대해 말하는 다섯 여자의 이야기 <가구>는 이 소설집에서 단연코 밑줄을 많이 친 소설이다. 공감해서다. 어지러져 있던 불투명한 내 생각을 정리해서다.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허상은 자기 만족이다. 나를 만족하게 했으면 사랑하게 되는 뻔한 진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속으면서 또 그립게 되는 사랑의 정체는 치사량의 수면제보다 더 독하다...]

플레져님은 이번 리뷰에서 가장 공감한 소설 둘만 가지고 리뷰를 전개한다(<가구> 다음에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에 대해서 몇줄 언급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의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느낌을 쓰는 거다. 특히 마지막에 쓴 ‘수면제’라는 단어는 이 리뷰의 백미다. 수면제라는 단어에 우리는 들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편안히 댓글을 달 수 있다. 여기서 ‘치사량의 비듬’이라든지 ‘치사량의 입냄새’라고 했으면 얼마나 속이 이상했겠는가.


[흠이라면, 등장인물의 직업군이 의사 혹은 의대와 관련이 많아 연작소설인가 싶은 의혹을 산다. 특정한 종교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열 두 편의 단편은 치마는 같은 것을 입고 저고리만 갈아입는 것 같아 아쉬웠다]

소설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는 건, 잘 쓴 리뷰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며, 그걸 비집고 들어가서 비판하는 게 독자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어떤 분은 장점을 파고들어가 비판하던데, 그래서는 안된다. 허와 실을 잘 보는 것, 그것도 내공이 필요한 법이다. 내공을 단기간에 기르려면 역시 국선도가 좋단다. 


리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끝맺음이다. 우아하기로 이름난 플레져님의 마무리를 감상해 보자.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는 게 인생의 비밀을 쉽게 알게 되는거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자, 어떤가. 숨이 막혀오는 그런 리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제 여러분도 부러워하는 단계를 지나 이런 리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김영하가 쓴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의 리뷰를 써 보겠다.


먼저 마트에 가야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마트에 갔다. 보름째 빨지 않은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외로워 죽겠건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 청바지를 줄여입은 미녀, 화사한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모두 나를 지나쳐 간다. 그 여자 곁에서 팔짱을 끼고 가는 남자의 머리를 손에 든 책으로 내리치면 좋겠건만]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사전적 점검.

[오빠의 반대말은? 누나가 아니라 아빠,라고 하기에 나는 정말 그렇네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오빠 오빠 하다가 아빠 되는 게 우리네 인생사 아닌가. ‘돌아왔다’의 다른 말은 ‘거짓말’. 왜? 여자와 버스는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리하기.

[집을 나간 오빠가 다시 돌아오는 슬픈 얘기다. 가출한 오빠를 둔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아니면 가출을 꿈꾸며 돈을 삥땅치는 청소년들도 읽어보기를. 집을 나가봤자 갈 곳이 없음을, 그래도 집이 제일이라는 걸 이 소설은 말해준다]


소설 하나를 찍어서 썰 풀기.

[표제작인 <오빠가 돌아왔다>는 가장 공감이 가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며 밑줄을 어찌나 그어댔는지, 책이 찢어졌다. 볼펜이 잘 안나와서다. 우리나라 볼펜은 심에 잉크가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안나와 사람을 허탈하게 만든다. 좋은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픈 소박한 희망이 번번히 좌절되는 것은 볼펜회사들의 탐욕 때문일까.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걸까]


흠 잡기.

[흠이라면, 오빠가 너무 불결하게 그려진 것이었다. 아무리 가출을 했다지만 목욕은 할텐데, 여기서는 목욕은커녕 이 한번 닦는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특정한 상표의 옷이 너무 많이 언급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조다쉬’ 청바지가 품절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조다쉬 타령이란 말인가.


끝맺음은 최대한 우아하게.

[집구석에만 있지 말고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보라. 가출해봤자 별 게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쉽게 알 수 있으니까. 오빠가 결국 돌아왔듯이, 당신도 오늘밤 안으로 집에 온다. 한가지 더. 아버지가 벼르고 있다. 들어오면 넌 이제 죽었다!]


어떤가. 소설집 리뷰를 마구 쓰고싶지 않은가? 강의만 들으면 자기 것이 안되는 법, 오늘 배운 양식에 맞춰서 리뷰를 한편 써보자.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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