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뮤지컬 레베카>를 보고 왔다.

 

일단, 엄막심.. 수트 입은 모습에 숨이 탁 막혀 잠시 진공 상태에 빠졌더랬다. 잘 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막심이란 캐릭터가 이렇게 잘 생겼어요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인 줄은 몰랐다. 책에서 본 막심의 느낌과 비슷해서 몰입하기 좋았다. 청혼할 때 더블자켓 입었을 땐 농담 안 해... 그러더니, 다음엔 빽바지 입었을 땐 농담 안 한다고.. 나윤 호퍼가 손등에 강제 키스 하니까... 아세톤으로 지워야겠다고.. 하아.. 이 깨알 같고 능청스러운 애드립이라니. '신이여'와 '칼날송' 할 때의 그 표정, 몸짓... 완벽했다. 특히 레베카 연기... 섹시해...

 

김선영 댄버스... 온 몸으로 카리스마랑 아우라를 풍기는데, 너무 놀랐고 좋았다. 처음 이히의 장갑을 주워주는 장면부터 손동작과 내리까는 목소리, 비웃음까지 압도적이었다.

신영숙 댄버스... 확실히 동작이 크고 표정이 풍부했다. 당연히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기본이고, 멋졌다.

 

그런데, 책을 떠올리며 극을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막심의 말대로라면,

 

레베카는 왜 막심을 그렇게 증오했을까?, 정말 레베카는 나쁜 년이었을까? 였다.

 

레베카는 죽고 없다. 레베카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녀만을 알 뿐이다.

 

일단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한다. 레베카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아름답다고.

 

그런데 막심은 말한다. 그녀는 뻔뻔하고, 맨덜리 모두를 속였다고.

 

1. 막심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베카는 왜 막심을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무서운 혐의가 가도록 만들고, 결국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명예를 실추시키기까지. 완벽했다. 막심이 그동안 쌓아올린 것들은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다 무너졌다. 모두에게 비춰진 모습은 완벽한 귀족 부부의 모습. 그러나 드러난 사실은 불화로 가득했던 결혼 생활. 결국 막심은 자신의 영지에서 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된다. 뮤지컬에서야 댄버스가 불을 질렀지만, 책에서는 누가 지른지 알지 못한다. 명예와 자존심에 금이 간 막심이 스스로 불을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베카는 진정으로 막심을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레베카는 막심을 사랑했을까? 하지만 막심은 맨덜리나 가문에만 관심이 있을 뿐, 모두가 칭송하고 사랑하는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증오로 변했고,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신은 여자로 태어나서 능력을 펼치지도 못하고,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막심은 남자로 태어나 영지도 물려받고, 야망도 실현할 수 있는데 가문을 위한 책임감에 짓눌려 힘들어 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을까. 질투도 하고. 내가 막심이었다면 많은 것을 이루었을텐데, 왜 막심은 다 가져놓고 저렇게 소심할까. 거기다 죽음마저 자기 생각과 다르자 증오심, 질투심이 폭발해서 저런 계략을 꾸민 걸지도.

 

2. 과연 막심의 말이 사실일까?

막심은 레베카가 부정하고 나쁜 여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과연 사실일까? 레베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건 다름 아닌 막심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는 레베카의 행실을 꾸며낸 건 아닐까?

 

레베카는 모두에게 완벽했던 여자였다. 20년 정도를 그렇게 가면을 쓰고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을 깜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책에서는 프랭크나 가일스 등 가까운 지인들에게까지 손을 뻗쳤다고 했는데, 그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라면 오히려 남자들이 탐내지 않았을까. 그래놓고 거절 당하자, 앙심을 품고 그 여자가 유혹한거야.. 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온 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막심의 아내인 레베카를 여자로 마음에 품었다면, 그 죄책감이 그녀를 나쁜 년으로 몰고 가도록, 자신을 정당화한 건지도 모른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이고, 명석하고... 그런 그녀가 누구보다 고고했던 건 당연할테지. 그래서 오히려 드 윈터 가문은 그녀를 질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던 댄버스 부인. 그녀는 정말로 레베카와 마음을 나누는 사이였을까?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레베카를, 댄버스 부인은 존경하고 사랑했을거다. 그리고 같이 맨덜리 저택으로 왔을 때 이런 주인을 모신다는 자부심까지 더해져서 아주 자랑스러웠을테지. 그래서 맹목적으로 그녀를 섬겼고, 어쩌면 자신이 그녀와 모든 것을 나눈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레베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실을, 가장 가깝다고 믿었는데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는 데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잭 파벨은 하는 행동으로 보아선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니까. 그녀가 그와 놀아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레베카는 사촌이라 불쌍해서, 혹은 자기 사촌이 그렇게 사는 게 위신에 안 맞다고 생각해서 돈을 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죽고 나니 파벨은 저렇게 떠벌리면서 한 몫 챙기려는 걸지도.

 

 

레베카는 죽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레베카를 이야기한다.

 

과연 그녀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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