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찐~한 연애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시련 가득한 사랑 때문에 눈물이 고이는, 그러다가도 팽팽한 실이 끊겨버리듯 막을 내려 가슴 한 켠이 아주 시린 그런 사랑 이야기 말이다.

 

 

이 영화가 나에겐 그런 사랑 이야기였다. 원작을 아직도 다 읽지 못해 원작 얘긴 할 수 없지만, 원작과 상관없이 이 영화 자체만으로 난 너무 좋았다. 아름답고 깨끗한 녹색들이 바람에 흩날리다가도 햇빛을 만나면 쨍하게 푸르렀다 다시 바람에 몸을 맡기는 그런 느낌.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다시 만날 순간을 희망하며 그리워하고, 떨어져 있어도 사랑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티는 삶. 

 

가해자가 화자라는 것도 신선했지만, 어린 여자의 질투심이 불러 온 참극이 가슴 아팠다. 누구라도 어린 시절, 시기나 질투 등 감정에 휩싸여 어리석은 선택을 하니까. 다만 브리오니는 자신의 선택으로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야 했으니 '모르고 지은 죄'가 끝까지 모를 수 없다는 것,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한 가운데에 로비와 세실이 있었다. 

 

 

얼마 전에 보고 온 이 뮤지컬 역시 나에게 그런 사랑 이야기로 남았다. 1차 세계대전, 모든 것이 엉망이었던 때. 그 속에 가득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수천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는 압박감, 임무 수행을 위한 군인의 다짐, 부당한 명령으로 드러나는 반항과 체념,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 집착... 첫 등장에서 아르망이 부르던 '싸워'가 1막 끝 언저리에 '추락할 땐'으로 이어지면서 군인으로서의 신분이 강조되었다면, 2막은 그저 사랑 그 자체였다. 물론 1막에서 라두와 맞붙은 '남대남'에서 아르망과 라두가 가진 사랑, 집착이 씨앗이라기엔 너무 폭발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그 불꽃이 2막에서 타올라 극 전체에 넘실대다 재가 되었다.

 

언제였을까. 그녀를 마음에 담게 된 것이... 그저 임무일 뿐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대할 때 말투와 눈빛이 달라졌다. 리옹에서였을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그녀가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저 바라볼밖에... 저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아르망은 거짓투성이인 군인을 내려놓고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 언제나 행복은 잠시고, 순간이다. 그래서 더 달콤한 것...

 

마타하리에 집착하던 라두가 위기를 느끼고 아르망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맡긴다. 아르망이 자살행위라고 반항하자, 그럼 몸조심하게!라고 받아치는 라두.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발산하는 아르망. 그리고 아르망이 사지로 떠난다는 편지를 받고서야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마타하리. 세 사람의 운명은 전쟁 속에서 각각의 선택을 요구한다.

 

사랑을 깨달은 순간부터 서로는 만나지 못한다.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보아도 허공만 스칠 뿐. 어째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건지. 아르망은 비행기가 격추되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도 그녀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다. (물론.. 목숨을 걸었을까만은.. 병원이 좀 허술하긴 했다.) 마타하리는 라두의 감시를 피해 여권을 위조해가며 아르망을 찾지만, 아르망의 임무가 자신임을 알게 되어 자괴감과 배신감을 안고 파리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이중 스파이라는 누명 뿐. 그나마 그녀를 지탱하는 건 '사원의 춤'이라고 불린 정화의식과 자신의 삶이 힘들고 어려웠을지언정 부끄럽지 않다는 당당함. 사랑 때문에 무너졌으나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가졌던 그녀.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타난 구원. 자신의 사랑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목숨으로 증명한 아르망 덕에 그녀는 모든 회한을 내려놓고 마지막 순간을 노래한다. 그가 없는 이 세상에, 고단했던 자신의 삶에 인사를. 그가 있는 곳으로, 이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그 곳으로 갈 수 있다.

 

아르망과 마타하리가 서로를 선택했다면, 라두는 이 세상을 선택했다. 자신의 지위, 명예를 지키는 선택. 아울러 어차피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러나 아르망의 눈을 보고 라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을테다. 라두의 감정이, 결국 사랑이 아닌 욕망과 집착이었음을 보여주는 아르망의 눈빛.

 

사람 사는 세상에 온갖 기쁨, 노여움, 사랑, 슬픔 등이 가득하다지만, 전쟁이 끼어들면 결국 비극이 되고 만다. 승리한 자는 승리한대로 대가를 치르고 패배한 자는 패배한대로 대가를 치러야 하니. 결국 모든 것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대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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