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前無後無諸葛武候)” 이 말은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고 개국 공신으로서 성의백에 봉해진 유기가 한 말입니다. 자신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제갈공명은 천하를 삼분하는 데 그쳤다고 생각하여 늘 제갈공명을 폄하하던 유기는 천하를 구경하던 중 촉 땅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 때 공명의 신묘함에 감탄하며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갈공명이 활약하던 그 때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공명정대한 재상이며 충직한 신하라는 평이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삼국지를 읽으면서, 혹은 중국의 역사책을 읽으며 가장 호감을 가졌던 사람은 바로 제갈공명이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무수히 많은 명장들과 책략가들, 군왕들이 영웅으로서 세상을 떠받치려고 했던 그 시대로부터 이름을 남긴 많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은 양이며 자는 공명으로 낭야군 왕도 출신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이주한 후 17세 때 숙부와 사별하게 됩니다. 그 후 융중에 초가를 짓고 밭을 갈면서 경전과 사서를 공부하고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자신을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의 지식인들은 모두 제갈공명을 당대의 영걸로 보고 때가 오면 언제든지 하늘로 오를 것이라 생각하여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불렀습니다. 공명의 나이 27세, 유비의 나이 47세 때 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남을   가집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들의 만남은 후에 관우와 장비가 공명에게 반감을 가질 때 유비가 했던 수어지교(水魚之交)와 함께 유명한 고사로 남습니다. 지금도 제갈공명이 살았던 융중에는 많은 고적이 보존되어 있어 ‘융중방’, ‘삼고당’, ‘초려정’, ‘궁경전’ 등의 고적은 지금도 보는 이로 하여금 회고의 정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공명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온 뒤 그가 죽을 때까지 유비를 위해 그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그의 활약 하에  거두었던 적벽에서의 대승은 그가 내놓았던 천하삼분지계를 현실로 만들었고, 후에 형주와 촉을 차지할 때나 유비가 황제에 즉위할 때 역시 그는 유비를 충심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관우가 죽은 후 광분한 유비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혈육처럼 여기던 관우를 잃었다는 슬픔에 싸인 그를 이기지 못해 오와의 전쟁을 감행하여 실패하고 맙니다. 충격으로 병을 얻은 유비가 죽은 후 이제 촉한의 운명은 공명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나라와 화친을 맺은 후 북벌군을 출동시켜 천하를 통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남 지방에서 만족의 추장 맹획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가 바로 이 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공명은 진심으로 항복을 받기 위해 맹획을 사로잡았다 놓아주기를 일곱 번을 하였고, 이에 맹획은 진심으로 공명에게 항복하여 나중에 촉한의 중앙정부에서 어사중승의 벼슬을 지내게 됩니다. 맹획을 토벌하고 회군하던 때 ‘만두’가 생겨나게 됩니다. 227년 제갈공명은 전군을 이끌고 위나라 토벌에 나서며 유선에게 ‘전 출사표’를 올리는데 이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사표를 올린 후 공명은 군대를 한중에 출진시키고 다음해 기산을 공략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속의 대패로 인하여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공명은 한중으로 돌아와 아끼던 마속의 목을 벱니다(泣斬馬謖). 그 후 공명은 다시 북벌을 시도하여 유선에게 ‘후 출사표’를 올리고 사마의와 대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장원에서 붉고 긴 꼬리를 그리며 큰 별이 떨어진 후 그는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위세도 당당하게 촉의 진영을 치려던 사마의는 마치 공명이 살아있는 듯한 촉의 태세에 놀라 도망을 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고 사마의를 비웃었습니다. 공명은 227년부터 234년까지의 7년 동안 6회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하여 육출기산이라는 말이 남아있습니다. 이 여러 번에 걸친 싸움에서 공명은 항상 교묘한 계략으로 사마의를 위기일발의 함정에 몰아넣어 숱한 일화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생활에 있어서 검소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으며, 정치에 있어서도 공평하여 아끼던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참하였습니다. 촉한에서는 제갈공명을 정군산에 안장하고 충무후(忠武候)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나관중의 유명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역시 가장 호평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제갈공명일 것입니다. 소설이 아닌 진짜 역사에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은 제갈공명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 외에도 그 재능을 적재적소에 쓰면서 의리와 명분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겸손하고 검박하였으며 사리가 공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지 않았으니 그간 귀족들의 전횡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받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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