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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4강

 

* 책표지

 

주교재인 <<공산주의 선언>>의 표지는 1888년에 엥겔스가 편집한 <<공산당 선언>>의 표지를 가져온 것이다. 왼쪽 위에 보면 'PRICE TWOPENCE'라고 써있다. 관계 전문가에게 확인해 본 결과 현재 우리 나라 돈으로 2500원 정도 된다 하니 1888년에  <<공산당 선언>>이 나올때 어떤 독자를 상정해 놓고 씌어진 것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 책을 대학에서 읽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노동자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1800년대에 이런 걸 노동자들이 누워서 읽었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짜증나지만 너무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만만하게 읽어보도록 하자.

 

* 맑스 엥겔스 연보

 

책 본문으로 들어가면 맑스 엥겔스 연보가 있다. 그 위에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진이 있다. 여기서 박종철출판사의 편집이 좀 아쉽다. <<공산당 선언>>을 쓸 때, 마르크스가 30살, 엥겔스가 28살이었다. 나이 든 사진을 올려 놓으니 좀 생뚱맞다. 젊었을 때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진을 붙여놓었더라면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더 좋았을 것이다.

 

* 일러두기

 

번역에 이용한 대본이 소련 맑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독일어판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Marx-Engels Werke(Dietz Verlag)(줄여서 MEW) 42권짜리 전집판도 있다. 영어판으로는 Collected Works가 많이 언급이 된다. 그 다음에 일어판 선집으로는 대월서점본이 있는데 이 출판사, 한 마르크스 하는 곳이다. 프랑스판은 갈리마르 것이 있다. 갈리마르는 인문학 출판에 있어 가장 유명하다. 프랑스 출판계의 '이찌방'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 나라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도 갈리마르에서 나온 총서를 옮긴 것이다. <<칼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선집>>은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다. 저작 선집이란 모든 저작을 담은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발췌해서 옮겨놓은 것을 말한다.

 

* <<공산당 선언>> 프롤로그

 

철학공부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공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수 있는 공부인데 특히 필롤로기(문헌학), 어휘 그 자체에 대한 지식, 그것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역사적 지식, 그와 관련된 철학적 아이디어 및 그 아이디어가 시대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어 갔는지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맥락도 알아야 한다. 흔히 세상과 무관하게 철학책 많이 읽으면 철학 공부 많이 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세상을 해석하기에 바쁘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마지막 명제에서 해석은 이제 그만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그것이 과연 진리인지 검증해 보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실천적 진리론이다. 그렇다고 순수히 아카데믹한 공부를 그릇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원제목이다. Manifesto는 굉장히 오래된 말이다. 제목부터 하나하나 따져 보기 시작하자. '대중적 선언public declaration', '대중적 표명'이란 뜻이다. 책의 1페이지 중반에 보자.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을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공공연하게 표현한다.' 이것이 Manifesto의 뜻이다.

 

Communist란 말고 Socialist란 말을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사회주의당'이라 하지 않고 '공산주의당'이라 한 걸까? 이것에 대하여 책 뒤에 엥겔스가 해명한 것이 있다. "그래도 <<선언>>이 나왔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이라고 하면, 두 종류의 사람들로 이해되었다. 한 편으로는 다양한 유토피아적 체계들의 추종자들, 특히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이나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로 이해됐는데, 이들 둘 다 이미 당시에는 점차 사멸해 가는 미미한 종파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잡다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돌팔이 의사들로 이해되었는데, 이들은 자본과 이윤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은 채 자신들의 갖가지 만병 통치약과 온갖 종류의 미봉책으로 사회적 폐허들을 제거하고자 했다."(pp. 81-82) 그러니까 1848년에 '사회주의'는 속된말로 맛이 갔다는 뜻이다. <<공산당 선언>>은 학술문헌이 아니라 대중들을 겨냥한 팜플렛인데 이런 책에 한물 간 제목을 붙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Party라는 어휘로부터 오늘날의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같은 특정한 도식을 가지고 있는 정당을 생각하면 안 된다. 책 본문에 나오는 구절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 다 묶어서 '당'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라 부를 수 있는 정당의 조직 강령을 적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경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넓은 범위) 견해 > 목표 > 지향 (좁은 범위)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가 글을 쓰고 있는데, 글을 쓸시에 나열을 한다면 이렇게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가야 한다. 견해란 단어의 독일어는 Anschauungsweise이고 영어로는 Anschauung이다. 관조하다, 직관, 들여다 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견해는  목표, 지향 중에서 가장 넓은 범위다.

 

"성스러운 몰이 사냥을 위해 동맹"은 신성동맹을 가리킨다. (각주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교황, 짜르, 메테르니히, 기조, 프랑스 급진파, 독일 경찰관은 당시 유럽의 보수 반동 세력들을 말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의 적수들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으며, 더 진보적인 반정부 인사들과 자신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고 낙인 찍는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p.1) 말이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당시에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말이다. brandmarkenden가 낙인을 찍다란 뜻이다. 그러니까 공산주의가 유럽의 모든 세력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1842년에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공산당 선언>>을 쓸 정도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라인신문> 자체도 자유주의 경향을 가진 신문이었다. 그런데 독일이란 폐쇄된 후진적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정도만 되도 빨갱이로 낙인을 찍었다. 이 신문에 바이틀링Weitling이라는 공산주의자가 글을 실으려 하니까 그 사건을 계기로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힌 일이 실제로 있었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라는 것이 유럽의 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공산주의자들의 자신들의 목표와 지향을 '공공연하게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다 밑줄 치도록. 'vor der ganzen Welt offen darlegen 전세계 앞에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말하나 은밀하게 말하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1848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공산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들이 모여서 선언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비밀결사단체로 활동을 했지만 <<공산당 선언>>을 통해서 그러한 음모주의와 비밀결사를 폐기한다는 말이다.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의 원리>>를 보면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음모가 황폐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해롭기 까지 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제 공산주의 운동 대중적인 운동으로써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매우 여러 국적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딸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발표될 다음의 선언을 기초한다."(p.1)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인 것은 사실이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딸리아어, 프랑드르어, 덴마크어로 발표"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르크스의 '그러면 좋겠네요' 하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홉스봄이 쓴 서론을 참조하라.

 

* 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란 제목과 "이제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p.2)란 첫번째 문장이 <<공산당 선언>>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이 무엇이고 '이제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면 <<공산당 선언>>의 기본적인 이해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관을 천명한 말이기도 하다.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강좌가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학술적으로 강좌를 이끌어갈 생각이 없다. 무척 대중적인 강좌로 끌어나가고자 한다. 그러니 좀더 심화학습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한다.

 

어쨌든 여기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엄청나게 위계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똑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대기업 다니는 사람이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돈 주고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 이를테면 강씨가 상장회사 A에서 비상장회사 B로 옮겼다 치자. B로 전직한 후 예전 A에서 알던 사람을 만났다. 이 상황에서 들었을 때 무지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한 마디가 있다. 바로 "명함 하나 줘!"란 말이다. 명함이 있다 해도 못 주는 사람 많다. 명함 안에는 단순히 자기 이름 만 들어있지 않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Kaodasi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씨네21>에 <회사원>이란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즈음에 다니던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건강검진 얼마나 좋은가! 검진 덕에 오전 근무 땡땡이에 부서장이 좋은 사람이면 그날 하루 내 쉴 수 있다. 그래서인지 검진 받으러 줄 서있는 사원들 얼굴이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그런데 업무 땡땡이쳐서 표정이 밝은 것 뿐만이 아니라 사원의 건강도 검진해주는 회사에 다닌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말하자면 사원들은 회사의 자부심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기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할 때의 인간은 사회관계 속에 들어가서 규정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사회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든 자신이 서있는 사회적 위치에 입각하여 사태를 바라본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삶이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그러면 마르크스가 말한 삶이란 무엇인가. 내 앞에 있는 학생의 이름은 박준택이다. 강유원과 박준택은 어떤 관계인가? 강유원은 매주 화요일 8시 20분부터 10시 30분까지 강의하는 강사고 박준택은 강유원에게서 강의를 듣는 청강생이다. 그런데 강유원이 여기서 강의하는 것은 단순히 강유원의 의지여하에 달려있지만은 않다. 여기에는 대학 관계자와 강유원의 관계, 수강자와 강유원의 관계, 청강자와 강유원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 강좌를 듣는 학생들은 나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강유원과 박준택 간에는 어떠한 거래도 오고가지 않았다. 이런 관계를 '호혜적 관계'라 한다. 사랑의 관계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쓴 책 중에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란 책이 있는데 나카자와는 이 책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호혜적 관계(사랑의 관계)와 경제적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 책에서 말한 경제적 관계라는 것은 '물질적 관계'이다. 수강자와 나의 관계는 '물질적 관계'다. 수강자는 등록금을 내고 강유원은 그 등록금의 일부를 강의료로 받는다. 다만 이 관계가 노골적인 현금계산 하에 이루어 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지금 물질적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은 물질적 관계인 것이다. 예를 들어 강의실 입구에 쿠폰함을 놔둔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학생이 등록금을 내면, 수업료를 쿠폰으로 환산해 가지고 학생들에게 준다. 학생들이 강의 들으러 갈 때 쿠폰함에 쿠폰을 하나씩 넣으면 강사는 그걸 모아서 수업료를 받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마이뉴스처럼 마음에 드는 강의는 쿠폰 하나 더 줄 수도 있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대학교수들 수업시간에 농땡이 못친다. "쿠폰 하나만 주십쇼." 하면서 수업준비 열심히 할 것이다. 학생들은 학생들 대로 수업에 대한 계산을 철저히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강사와 학생 사이에 노골적인 현금계산이 이루어 지게 되고 따아서 둘 사이의 관계는 물질적 관계 속에 편입된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삶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할 때의 삶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먹는 음식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물질적 관계가 우리를 규정한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내가 지난 주에 <역사를 보는 두 관점>이란 서평을 웹사이트에 업로드했다.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368.html) 이것을 바탕으로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해설하겠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에서  '유물론'이란 "가장 담대히 거짓을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다. 거기서는 역사의 근본을 아무 목적없는 우연한 물질에 돌린다. 그러고는 모든 정신적인 가치 관념을 유치한 시대의 공상, 망상에서 나온 것으로 돌리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유물론적 역사파악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유물사관이라는 것이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의 근본은 아무 목적없는 우연한 물질" 여기서 물질은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이해된 물질이다. 유물사관자들은 인간을 물질중심으로 파악하자는 것이나 함석헌은 유물사관을 인간을 자연과학적으로 따라서 기계론적으로 파악하자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여기서 물物은 자연과학적 의미의 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것, 인간이 경제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해보자는 것. 이것이 유물사관에서 물이 가지고 있는 첫번째 의미이다. 두번째 의미는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를 '물질화된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이해할 때 경제를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물질환된 관계'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형제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데 이것은 유산이 형제들 사이에 호혜적으로 분배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보다 형이 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노를 일으키게 되고 이제 형이 물건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논어>>, <<맹자>>를 교육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물질화되는 것을 없애야 해결될 수 있다. 

 

얼마 전에 어떤 대학에서 학생들이 선생을 우습게 여긴다 하여 총장이 고전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버릇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선생들과 학생들 간의 물질화된 관계가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는 그런 관계를 은폐하는 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많았다. 그런데 IMF를 거치면서 그런 법적 장치들이 빠져나감에 따라 학생과 강사의 물질화된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니까 학생 입장에서는 "아, 저 자식 쿠폰제로 했으면 벌써 잘렸겟네."하는 생각이 들면서 엉까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물질화된다. 물질화된 관계는 제도로 구조화되어 고정된다. 좀 심화된 학습을 원하는 사람들은 밥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한울)을 읽어보도록 하라. 거듭 말하거니와 물질화된 관계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제도적으로 규정됐다는 말은 마음씨 착한 사장은 있겠지만 자본가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은 사장은 없다는 것과 같다. 관계에 들어서게 되면 더이상 본래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첫번째 문장에 각주가 달려 있는데 이것은 엥겔스가 1888년 영어판에 붙인 각주이다. "부르주아지란 현대 자본가 계급, 즉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이자 임금 노동의 고용자들을 의미한다."(p.2) 부르주아bourgeois를 가리켜 엥겔스가 현대 자본가 계급Modern capitalist class라고 정의했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란 말은 원래 프랑스 혁명 당시부터 제3 신분 중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키는데 쓰인 말이었다. 독일어에는 이와 대응하는 말로 Buerger가 있다. 애초에 이 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특정 계급을 지칭한 말이 아니었다. citizen은 '정치적인 유권자' 정도로 쓰였다. 따라서 물질화된 관계 속에서 정의된 언어가 아니다. 오늘날 참여연대 등이 하는 시민운동을 영어로 하면 citizen movement이다. 시민운동의 주체는 시민이다. 그들은 계급관계와는 무관하게 정치적 영향일 끼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의도는 다음의 예만 들어도 무너진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나는 A라는 후보를 지지한다. 강의 끝나고 내가 동대입구역에서 '나는 A를 지지합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래, 지지해라, 나는 집에 간다'할 것이다. 그런데 시민 이건희가 'A를 지지한다'고 하면 기자들이 몰려와서 취재를 할 것이다. 따라서 강유원과 이건희는 단순히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엮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는 나도 한 표, 이건희도 한 표로 똑같다. 그러나 이건희와 나는 똑같은 시민은 아니다. 이럴 때는 다른 말로 불러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역하관계를 고려한 용어가 필요한 것이다.

 

조금 엇갈려 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가장 대립적인 페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의 이론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자들이 어떤 개념을 가지고 사기를 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시민 사회civil society 라고 부른다. 가령 시민사회 이론의 원저자라 할 수 있는 로크Locke는 시민 사회의 출발점을 1) 자유로운 개인individual들이 모여서 2) 자유로운 사회계약을 하는 자유로운 국가라고 말한다. 이게 정말 엄청난 사기다. '나는 자유로운 개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당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유로운 개인이라 할 수 없다. 먹고 사는 일 여하에 따라서 정치적 권리는 언제든지 무시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이론이 만들어진 로크의 시대만 해도 완전한 의미에서 무균질의 individual은 없었다. 학술적으로야 서로 떨어져 평등한 상태에 있는  atomistic individual원자적 개인이라 말하지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인격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재산possession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산이 없다면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여 자유주의 이론의 개인이라는 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등한 개념이 아니라 뭔가를 가지고 있는 소유적 개인possessive individual이므로 이 상태에서 계급 결집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개인들이 살아가는 국가가 바로 자유주의 국가이다.

 

자유로운 사회 계약도 당연히 계급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시민사회와 계급 결집'이란 주제로 묶을 수 있겠다. 이것에 관해서 참고해 볼만한 책을 추천하겠다. C.B 맥퍼슨,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박영사). 자유주의적 정치이론과 이것과 함께 발전한 고전파 경제학이 어느 정도의 은폐효과를 가지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계급결집이 일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물질적인 관계 속에서 놓이게 되는데 법적,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이러한 관계를 은폐하고 희석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계급적인 관계 속에 놓여있는데 각기 개별화되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를 고립화 효과isolation effect 라고 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니코스 풀란차스, <<정치권력과 사회계급>>(풀빛)을 참고하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사회 관계 속에 들어있고 물질적인 사회관계가 집단적으로 응집된 계급관계 속에 들어있는데 이같은 관계를 은폐하고 희석키시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각각의 개별이 중요한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사례가 아침형 인간과 같은 '개인성공 이데올로기'이다. 개인들이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첫번째로 seed money가 있어야 하며 두번째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그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차 얘기했듯이 그 사회 안에 원자적 개인이란 없다.

 

요즘 저출산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123캠페인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결혼한지 1년 만에,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얘기이다. 아이 하나를 기르는 돈은 내가 댈테니 두번째 아이를 기르는 돈은 국가에서 대준다면 나도 한 명 더 낳을 의향이 있다. 결혼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남자들에게 물었을 때, 결혼대상 1순위가 누구냐 하면 바로 초등학교 교사이다. 여자들에게 물었을 때는 상장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상위권에 오른다. 결혼 시장에서 로맨틱한 요소들은 점차 배제되고 상대방의 구체적 물질적 요소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그만큼 물질적 관계에 대해서 철저히 따지고 있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물질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두아르트 푹스가 쓴 <<풍속의 역사>>(까치)란 책이 있는데 성풍속의 변천사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거기 보면 우리가 관념적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물질적인 생활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현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p.2) 프롤레타리아트란 말은 원래 하층민이란 뜻으로 쓰였다. 노동자라는 말보다 범위가 넓었다. 그런데 이것이 엥겔스가 규정하고 있듯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한다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물질적 관계를 두고 서로 투쟁한 역사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역사 속에 있었던 문화적인 성취를 몽땅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장은 문자 그대로 읽지 말아야 한다. 폭넓게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 인류역사의 뼈대를 볼 때, 물질화된 관계가 있고 이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있으며 이 관계에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고 이 관계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relation-embedded person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관계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 있으므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니까 이 사람들이 엮인 집단을 마르크스는 계급이라 말한 것이고 이 계급들이 역사 속에서 물질적 관계를 두고 투쟁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령 강유원이란 사람이 있을 때, 강유원을 둘러싼 관계들 - 1. 선생 2. 회사원 3. 아버지 4. 남편 5. 아들이 있다. 이 관계들 중 강유원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관계는 5이지만, 관계 5가 실제 살아가는 데 돈을 주진 않는다. 강유원이란 사람을 대한민국 땅덩어리에서 살게 해주는 핵심적 관계는 2에 있다. 마르크스는 2를 역사를 보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것이지 죄다 계급 투쟁의 역사로만 보자는 소리가 아니다.

 

물질material이 내 몸에 배어있는 있으며 그러한 관계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 관계에 입각해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곧 당파성이다. 나는 사태를 볼 때 어쩔 수 없이 내가 속한 관계에서 보게 된다. 책 한 권을 보더라도 이것이 나한테 얼마짜리나 될 것인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 당파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material relation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 가끔 material relation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아카데믹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글은 읽어봤자 별 영양가가 없다. 그러므로 당파성을 벗어나 있는 입장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당파성이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느냐 한나라당을 지지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생산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물질적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민과 노예, 파트레스와 플레비스, 남작과 농노, 쭌프트 회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끊임없는 대립 속에서 맞섰으며, 때로는 감추어진 채 때로는 드러내 놓고 끊임없이 투쟁했고, 그러한 투쟁은 번번이 사회 전체의 혁명적 개조나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동의 몰락으로 끝났다."(p.3) 이런 것들은 각 시대에 나타난 대립쌍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칭은 다 달랐다 하더라도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사람들이고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피억압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작과 농노를 오늘날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엥겔스도 규정했듯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이아는 근대하는 시공간 속에서 나타난 개념이다.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 에는 봉건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있다. 생산양식이란 "잉여 노동의 독특한 전유appropriation양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직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특수한 결합"이다. 봉건적feudal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capitalist 생산양식은 잉여 노동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핵심은 잉여노동을 어떤 방식으로 전유하느냐이다.

예를 들면 봉건적인 생산양식에서는 농노들이 자기들의 농토를 개간하고 남는 시간에 영주의 농토에서 일하는 방식이었으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들과 자본가 간의 노동계약을 통해 잉여노동을 전유한다. 흔히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라 할 때 핵심적인 테제는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한 이유가 무엇이느냐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잉여 노동의 독특한 전유appropriation양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직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특수한 결합"이니까 잉여노동의 전유양식이 봉건적 사회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어떠했는지를 일단 살펴보고,  봉건적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잉여노동 전유에 핵심적으로 들어가는 자유로운 노동력 계약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레포트 주제이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어떻게 등장하였는가"를 A4 1매 내로 조사해 오도록.

 

* 레포트 쓸 때 주의할 점

 

1. 이 글은 사회과학적 글이다. 지칭 대상과 영역이 분명치 않은 형용사는 절대 쓰지 말 것. 가령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의 등장에는 참으로 아름답지 못한 아우라Aura가 깔려 있다." 이런 문장 있으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0점 처리 된다. "아름답지 못한"이라는 형용가가 가리키는 대상이 없다. 당신의 그 마음은 나를 알 수 없다.

 

2. 장식적 언어 쓰지 말고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단어만 쓸 것. 책이나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해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할 것.

 

3. 맨 마지막에 지키지 못할 말, 예컨대 "앞으로 자본주의사회 전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다"와 같은 다짐 제발좀 쓰지 말 것.

 

4. 무분별하고 지나치게 다른 학자들 이름을 거론하지 말 것. A4 1매 쓰면서 이러면 지식과잉이다. 반드시 필요한 말만 무미건조하게 철필로 쓰듯이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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