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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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얘기, 알고 있었다. 예전에 친구들이 영화 얘기를 할 때 대충 흘려들었는데, 그 아이들의 관심은 과연 이 여자가, 남편이 가짜였던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까에 쏠려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야, 그 여자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고 살게?" 그리고 다행히(?) 데이비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 듯하다. 그녀는 본래 줄거리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숨겨져 있던 베르트랑드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리하여 베르트랑드는 이제 "남자의 교활함과 간교함에 의해 쉽게 속아넘어가는 여성"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아래서나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 나가는 여성으로 재구성된다.
  '일반적인'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자' 챕터를 쓴 것도 흥미로웠다. 역사가 객관적일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가의 관점과 의지가 이야기 서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덕분에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원문을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책의 관점과 서술 방식을 대강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장은, 어떤 사실이 기록되는지, 그 사실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은 서술자의 가치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문제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였다.
  그러나 정작 읽는 내내 내게 전율을 안겨 주었던 건 베르트랑드가 아니라 나탈리 데이비스였다. 그녀는 아르티가 주민들이 '기장뿐 아니라 밀, 귀리, 포도를 재배하고 소, 염소, 특히 양을 키우며 생활했다.(p.26)'에 넣을 단어 하나를 위해, '곡물과 포도주 역시 현물로 지불되는 임대의 형식으로 거래되거나 또는 르 포사와 파미에 농민들의 구매품으로 거래된다.(p.27)'라는 문장 하나를 위해 며칠씩을 서고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 광경이 눈에 보인다. 50여 쪽에 달하는 후주와 참고문헌도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이 사람, 미쳤거나 너무 똑똑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것이건, 그녀는 내게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평생 이런 책 한 권만 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T.T)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역사학계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이 책이 역사책인가 소설책인가를 놓고 말이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걸까? 아니, 굳이 그어야 하는 걸까? 모든 학문은 궁극에서 만난다는 논리에 기대지 않더라도, '객관적'인 척하는 역사가 역시 사실(事實)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해 서술하지 않는가? '글쓴이의 시점'이 기술(記述)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와 문학적 글쓰기 사이에 그리 큰 간격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역사학은 역사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구체적인 사료가 근거로 제시된다는 점 외에, 문학과의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이 '역사'가 아닐 이유가 대체 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인간의 힘". 작가 성석제는 '오봉선생 실기'라는 짧은 글을 가지고 '인간의 (의지의) 힘'을 보여주는 장편소설을 한 권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와 같은 상상력이 아닐까. 성석제가 문학적 상상력으로 한 인간의 생애를 복원해내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우리 또한 역사적 상상력을 가지고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 사료를 찾아 우리 여성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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