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커피 사진만 서재에 올려대는 탓에 사람들은 내가 커피 맛에 조애가 깊은 줄을 알지만
사실, 난 커피 맛을 잘 모른다.
그저 싱겁지만 않으면 된다. 싱겁지 않게, 아무것도 넣지 않고, 강한 블랙이면 어느 커피든 만족한다.
내 생에 인상적이었던 커피를 어찌다 적을수있을까? 그냥 생각나는데로 몇개 적어본다.
처음으로 블랙 커피를 접한건 작은 언니를 통해서이다.
중학교때부터 추종자들을 끌고 다녔던 작은 언니는 고3때에도 한명의 열렬한 추종자가 있었다.
언니보다 훨씬 공부도 잘했던 언니지만 늘 작은 언니에게 "회색 노트" 같은 편지식 일기 노트를 보내왔고,
고3의 신분으로 캔맥주를 사마시는 행동을 보여 순둥이 우리집 애들에겐 놀라움을 안겨주던 언니였다.
(순둥이였는지, 늦둥이들였는지..하여간 우리집 애들은 늦게 트였다. )
작은언니와 그 언니가 합작으로 나에게
"커피를 조금만 넣고 물을 많이 넣어서 연하게 마셔봐. 이렇게 하면 블랙커피도 마실만해...." 라며 내게 블랙커피를 가르쳐줬고, 난 그후 지금까지 쭉 블랙만을 고수하지만,
그녀들은 지금 설탕, 프림 팍팍~ 넣어서 마시는 다방커피의 애호가들이 되어있다.
인상적인 커피 중에 베트남 출장중 길바닥에서 마신커피가 있다.
사실 오래되서 잘 생각도 안나는데,
그 무더운 날 현지 사람이 내게 사줬는데,
시커먼 블랙커피에 설탕을 아주 많이 넣은 달짝하면서 시원하고 맛있었던 기억이난다.
정확이 어땠는지 생생하게 기억도 안나는데, 그 진한 달콤한 맛은 늘 기억에 남는다.
아빠와 등산에서 마신 커피...
눈 내린 후의 산을 몇년전 아빠와 단둘이서 올라 가 어느 문 닫힌 야영장에서 밥을 해먹고 난후 코펠에 끓여마신 커피 믹스
- 아빠는 커피믹스를 그 어떤 비싼 커피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라고 생각하신다. -
식후의 그 커피 믹스가 당신이 누리는 유일한 사치였는데,
심근경색에 이어 당뇨가 발병한 후로는 그 사치 마저 끊어버리셨다.
내가 기억하는 맛을 아빠도 아직 기억하실런지?
올 봄 광주 터미널에서 마신 캔커피
- 심야 버스를 타고 처음 가보는 낯선 광주 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쌀쌀한 날씨에 땅끝마을 가는 버스를 타라고 호객하는 아저씨들이 따라 붙고,
날은 추워서 덜덜 떨다가 뽑아 마신 캔커피 그날의 그 떨림을 진정시켜준 커피의 따뜻함이란....
몇년전 호주여행에서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늙은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시켰다.
나의 의심스러워 하는 눈길에 자기 딸사진 까지 보여주며,
한국 학생들을 홈스테이 시키기도 했다는 말까지 곁들이며 어디가서 drink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까운 곳의 스타벅스를 가리쳤더니, 자기는 어디가서 술 한잔 하자는 말이었단다.
drink가 술의 의미인줄은 알았지만, 그런 대낮에 할아버지가 한잔 하자고 하는건지는 몰랐지...
결국 난 더운날 따끈한 카페 라떼 한잔에 의심을 조금 풀었고,
할아버지는 끝까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며 꼭 놀러와달라고 했지만,
뭐...할아버지의 전화번호와 주소는 아직까지 내 여행안내서 첫장에 적혀있을뿐 연락은 안했다.
언제부터인가 화나고, 우울하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두둥 떠오르는게 커피가 되었다.
그런 커피를 요샌 좀 자제 하려 한다.
가끔 제멋대로 심장이 뛰어대고
정확한 검사는 안했지만, 건겅검진때 의사가 커피를 좀 자제하라고 말했기에...
하지만, 이 친구 떼어놓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