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는 법상에 올라앉아 한참 양구(良久)하다가 법상을 한번 치고 말했다.
“저 태양이 언제부터 시방세계를 비추기 시작하였는가?”

또 한참 있다가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언제부터 돌기 시작하였는가?”


또 한참 있다가 다시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하였다.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이 세상 만물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이 있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다. 머나먼 시간을 씨줄로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즉 공간을 날줄로 하여 거기 인과의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아진다.


불란서 파리에 가면 일류 화가들이 걸레쪽지 몇 개를 드리워 놓고 헌 신짝 두어 개 모아 놓고 천하제일의 예술이라 자랑한다. 굴러가는 개똥이 우리가 볼 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 자리 그렇게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여건이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존재한다. 보잘것 없는 예술이지만 그것을 높이 음미하여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교훈 아닌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캐나다 토론토에 왔다가 자동차와 부딪쳐서 다리가 부러졌다. 관상가나 점쟁이가 보고 '당신은 그렇게 병신이 되게 되어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 사주 팔자를 누가 만들었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찌하여 토론토에 왔으며, 어떻게 길을 가게 되었나, 물론 아들 딸 사위가 있어 그 힘에 의하여 토론토에 왔고 일가 친척을 찾아보려고 거리에 나갔다. 하지만 내가 없는데 어떻게 아들 딸 사위 친척이 있어 차사고가 날 것인가. 내가 없으면 차 사고는 커녕 캐나다라는 명자까지도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원인은 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근본은 바로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태양이 언제부터 떠서 언제 질는지 모르지만 그 태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면 태양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태양이 시방세계를 비추기 시작한 것도 내가 존재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도리를 안 다면 도리어 환경을 지배하고 살 수 없다.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런 질문을 던졌으니 망정이지 지구가 1초 동안에 1.5㎞ 씩을 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둥글둥글한 공처럼 생겨 허공 가운데 둥둥 떠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지구 밑 쪽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땅 밑으로 떨어지고 말 것인데 어떻게 거꾸로 떨어지지 않고 살고 있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지구가 얼마나 큰 존재라고, 우리의 인력을 능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사람은 이미 허공의 가운데 팽개쳐져 이 지구처럼 돌고 있을 것이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중세기에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지구가 돌고 있다는 말을 한 사람들이 종교재판에 의하여 산화된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구가 언제부터 돌기 시작하였는가? 지구 그 자체는 한번도 돈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돈 까닭이다. 시계가 언제부터 ‘땡’하고 쳤는가? 사람이 맞추어 놓고 치기를 기다림으로 친 것이다. 그러니 시계는 한번도 친 일이 없다. 치게 만든 것도 사람이고, 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사람이며, 쳤다고 생각한 것도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이 이미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누가 만든 것인가?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사는 것을 보면 알고, 미래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사는 것을 보면 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 또한 누가 지어 주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날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야기이다. 쓰이는 것은 모습뿐이므로 모습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들은 판단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내 눈, 내 코, 내 입, 내 몸뚱이지 진짜 내가 아니다. 나는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 형상이 있는 것이라야 변질되는 것이지, 이미 나지 않는 것이라면 죽음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시초이다.


오뚝이를 일본 사람들은 ‘다르마'라 부른다. 달마대사가 9년 면벽을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았던 그 꿋꿋한 의지를 표한 것이다. 오뚝이가 되려면 염불 참선을 해야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계속 부르다가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불러도 좋고 ‘코카콜라’ ‘세븐업’을 불러도 상관없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보고 ‘콜라’ ‘세븐업’이라 하여 먹고 싶어하면 곤란하니 법신의 체상(體相)으로 인격화하여 부르는 것이다.


부를 때도 입으로는 부르면서 생각은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해서 쓰겠느냐. 자꾸자꾸 교섭하면 하나가 되지 않는다. 사람 생각, 돼지 생각, 소 생각, 뱀 생각 모두모두 놓아버리고 관세음이 되면 관세음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가 될 것이므로 세상이 한세상이 되어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길이요, 세계와 내가 하나되는 길이며 모든 인류가 한 식구가 되는 길이다."


출처 : 참선도량 화계사 - 이 달의 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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