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영국 스트래트퍼드 출신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확실한 기록은 아니며 단지 그각 1616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추정해 낸 것에 불과하다. 또 하나 그가 1564년 4월 26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그것을 보충해 주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위대한 문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확실한 자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조부인 리처드 셰익스피어는 농부로서 장남 헨리와 차남 존의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존 셰익스피어는 스트래트퍼드에서 농산물 판매에 손을 대어 상당한 치부를 했으며, 중에는 그곳에서 유력한 명사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557년 그는 스트래트퍼드 근방에 있는 윌름코트의 지주인 로버트 아든의 막내딸인 메리와 결혼하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그들 사이에 출생한 8남매 중 장남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나, 사업의 부진으로 가산이 기울기 전인 1580년까지는 그래머 스쿨(Grammer School)에 다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8세가 되었을 때 윌리엄은 앤 헤서웨이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보다 8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들 사이에는 스잔나와 햄닛, 주디스의 3남매가 있었다.

 윌리엄이 어떻게 청년기를 보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구구한 억측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그가 1590년을 전후한 무렵에 런던에서 극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는 설이다. 셰익스피어가 최초의 작품집을 출판한 것은 1593년으로 되어있다.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그 작품집의 제목이었다. 그는 <소네트>의 대부분을 이무렵 집필했다. 이 무렵 그는 벌린 맨(Lord Chamberlain's Men)이라는 극단의 단원으로 희곡 작품을 쓰는 한편 배우 생활도 겸했다. 

 32세가 되었을 때 그는 극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해 있었다. 이때부터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연극계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굳혀 갔다. 또한 사교계에도 진출하여 사우댐프던 백작을 비롯해 각계의 명사들과 알 게 되었다.  그는 1596년에서 1600년 초까지 주로  희곡에 있어서의 시의 기능적 역할에 관한 탐구를 계속했다. 결국 그는 수많은 시작을 통해 극중인물의 대사를 더욱 심도 깊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1596년 8월 아들인 햄림의 죽음으로 인해 셰익스피어는 고향인 스트래트퍼드를 방문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옛 친지들을 만나본 뒤 그는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는 데 힘을 썼다. 스트래트퍼드에서 돌아온 그는 1599년 템스강가에 건축된 글로브 극장 부근에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셰익스피어는 1600년 이후 일련의 비통한 비극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을 시도하게 된 그의 내적인 변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1601년 에섹스 경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절친한 친지이며 후원자였던 사우댐프던 백작이 종신형을 받은 사실과 아버지 존의 죽음이 셰익스피어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게다가 막내 동생 에드먼드가 유행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1608년에는 어머니 메리까지 사망하여 셰익스피어는 매우 심각한 실의에 차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언제 다시 고향인 스트래트퍼드로 돌아왔는지 그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런던의 유행병을 피해 낙향해있었던 듯하다. 그는 1610년에서 14년까지 스트래트퍼드의 많은 부동산을 사들였고 이후에 그곳에 머무른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1616년 1월 25일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한 그는 3월 25일에 그것에 서명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아마 이때 이미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던 듯하다.  이렇게 해서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 5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친구여, 제발 여기에 뭍힌 흙을파내지 말아주오
       .이 묘석을 아껴주는 이에게는 축복이
       ,나의 유골을건드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

   이런 소박한 묘석에 안타까움을 느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 또 지역민들이 세익스피어를 지 상 최고의 천재들   서열에 올리고자 그후 7년만에 라틴어로 된 기념비를 세웠다.

 대부분의 걸출한 문호들의 천재성이 먼 훗날에야 인정받아 발굴작업이 뒤늦게 시작되는데, 세 익스피어는 생전에 발군의 성가를 누렸고, 사후에도 극장폐쇄령이 내린 1642년까지 그의 극이 무 대에서 공연열기를 더해 갔으니 성가는 생존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인 정한 동시대의 극작가이자 평론가 벤 존슨(Ben Jonson)이 문학이론의 바탕 위에서 세익스피어의 진가를 논하여 널리 알렸다. 이에 힘입어 극장폐쇄령으로 지하에 묻혀버릴 뻔한 보석이 영원 히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는 작가에게 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다행스런 일이다.

  세익스피어의 실체 논란   

 지금 세익스피어의 창작물로 알려진 작품들이 스트라트포드에서 탄생한 세익스피어가 아닌 다 른 원작자가 있다는 설이 심심찮게 대두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런 설은 세익스피어 개인 의 천재성을 아무리 인정한다 해도 그런 거작을 그 기간 동안에 연속 창작할 만한 재능을 닦은 수학 경력을 세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유일의 수학경력으로 치는 그 래 머스쿨의 경우도 공식기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 연령 때 아버지의 지위나 가세의 유복함 등 으로 미루어 추정된 것이라며 그의 방황기에 보인 질낮은 행위 등으로 봐서 도저히 그런 차원높 은 걸작을 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여러가지 반증을 제시한다. 스트라트포드 출신의 세 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을 묶어 앤티스트라트포디이언(Anti-Stratfordian)이라 하는데, 이들이 내세 우 는 제3의 인물도 제각기 구구하여 30여명이나 거명된다.

 그중에서 크게 득세한 설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설, 옥스포드 백작(Earl of Oxford) 설,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설, 엘리자베스 여왕의 숨겨진 사생아 설 등이다. 베이컨 설은 세익스피어의 동시대인으로서 최고지성인이었던 베이컨 정도 의 통찰력이 없이는 그런 대작을 창작할 수 없다는 가정에다 베이컨의 저술이 세익스피어의 글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근거에 바탕을 둔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생아 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숨 겨 진 사생아가 때로는 프란시스 베이컨, 때로는 윌리엄 세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는데, [햄릿]을 쓴 것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불륜으로 자신을 낳은 데 대한 힐책의 행위라는 등의 주 장 을 편다. 그러나 이런 설들이 모두 세익스피어의 사후 200년이 지난 19세기에 고개를 들기 시 작 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려하다가 설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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