럽보다는 동방에서 먼저 커피문화가 형성되었다. 1554년 현재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에서 문을 연 커피점은 너무나 번창하였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많은 커피점이 세워졌다.

지식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곳>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 당시의 커피점에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체스를 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그곳은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은 유럽 카페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의 커피점이 언제나 번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모임을 두려워한 군주에 의하여 세번이나 완전히 폐쇄된 적도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의 반대에 부딪쳐 오래지 않아 다시 문을 열었다.
유럽에 커피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유럽에서는 커피가 초기에 이교도의 음료라고 하여 거부되었으나, 교황 클레멘트8세가 이교도만 즐기기에는 너무 훌륭한 음료라고 하여 커피에 세례를 줌으로서 기독교인도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만들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점은 베니스에 개점되었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커피점을 모방하였다. 중산층을 주요고객으로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방향을 바꾸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자 베니스의 커피점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645년이었다.
비엔나의 커피점은 1687년 군인이었던 게오르크 콜시츠키(Gerog Kolschitsky)가 처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커피점 그는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던 터키를 물리친 공적을 인정받아 터키가 후퇴하면서 남겨놓고 간 커피 500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아랍 풍습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볶는 법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커피를 제공할 때 터키를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제국이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손님에게 접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관습이 되어 오늘날에도 중부유럽에서는 커피와 함께 케이크 또는 달콤하게 가공된 고기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편 지중해의 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베니스의 상인들은 동방의 향신료 무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 등의 상인들에게 그들의 영역을 점차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상권을 되찾기 위하여 베니스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고 있던 아랍인들과 손을 잡고 커피무역을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의 모카항에서 선적된 커피는 베니스항에 내려지고 이곳에서 유럽의 모든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클레멘트 4세 이때까지 아랍인들은 커피를 독점생산하기 위하여 외국인에게 커피를 판매하기 전에 커피 씨앗을 볶아버리거나 삶아 싹이 틀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커피가 아랍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으나 17세기 초 인도의 바바 부단(Baba Budan)이 라는 한 순례자에 의하여 아랍의 커피 독점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1616년 아랍에서 훔쳐낸 7개의 커피 씨앗을 인도로 가져가 마이소아 지방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규모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90년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한 커피묘목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인도에 보냈으며, 그리하여 1699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커피는 이 지역의 기후에 잘 적응하였다. 수년이 지나자 네덜란드 식민지는 커피 주 생산지가 되었고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은 커피무역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커피가격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면 과잉 생산된 커피를 과감하게 폐기처분까지 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기호음료로 차를 주로 마시고 있었는데 자국내 식민지에서 쉽게 커피를 구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차와 커피 어느편이 더 나은가에 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3세 자신은 커피만을 마시면서 궁중의사에게는 차만을 마시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의사가 83살까지 장수를 하였고 왕 또한 의사와 같은 나이에 죽었다. 물론 현대 의학실험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당시 의 유럽사회에 커피를 보급시키게 된 재미있는 실험이라 하겠다.
베니스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의 커피점은 번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주로 가정에서 커피를 마셨다.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식민지에서 많은 양의 커피를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상술을 지니고 있어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왕 루이14세에게 커피나무 한그루를 선물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이미 커피에 매료되어 있었다.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시는 습관도 바로 이때 왕실의 여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설탕 대신 꿀을 섞기도 하였다. 베르아이유 궁전 온실에서 자란 커피 나무는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되었다. 즉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Martinique)섬에 근무하던 끌류(Gabriel de Clieu)대위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임지로 다시 떠나면서 묘목 몇 그루를 갖고 가기를 원하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험난하였다.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폭풍우 때문에 거의 죽을뻔 하기도 하였다. 항해도중 물이 떨어지자 끌류대위는 자신에게 할당받은 식수마저도 커피묘목을 살리기 위하여 나무에 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간신히 도착하였을 때 어린 묘목은 모두 죽고 단 한 그루만을 겨우 살 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그루는 카르티니크 섬에서 무성하게 번식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팔백만 그루가 되었다. 이곳의 커피는 그후 프랑스령 기아나(Guianna)로 옮겨져 울창하게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 한 그루의 묘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 부르봉 왕조 이름에서 인용하여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를 부르봉 커피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식민지에 커피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서인도 제도에, 영국은 1730년 자메이카와 1740년 인도에 대규모 커피농장을 만들었다.
세계 최대의 커피생산국인 남미의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1727년 사랑에 빠진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부인이 포루투칼 연인과 헤어질 때 그에게 보낸 꽃다발 속에 커피나무를 숨겨 선물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브라질은 그 토양과 기후가 커피재배에 너무나도 적합하여 곧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커피 생산국가가 되었다.
북미대륙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끌류대위의 커피나무가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영국에 정복되어 오늘날 뉴욕으로 불리우고 있는 당시의 뉴암스테르담에 1660년 커피가 등장하였다. 당시 북미의 영국인 가운데 부유층은 커피를 즐기고 있었으며 중산층은 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1773년 영국의 조오지 국왕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되고 있던 차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였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보스턴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상선에 한밤중에 올라가 그배에 실려있던 차를 대서양에 모두 던져버렸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보스턴 차사건이다. 그후 미국에서는 차를 대신하여 커피가 기호음료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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