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박명의 숙명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황원갑...소설가,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우리 역사에는 두 사람의 낙랑공주가 있었다. 한 사람은 호동왕자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목숨까지 바친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요, 또 한사람은 고려태조 왕건의 맏딸로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에게 시집간 낙랑공주이다.
후자의 낙랑공주는 왕건의 셋째 왕비인 유씨 부인의 소생인데,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가 그에게 시집보낸 여인이다. 이처럼 낙랑공주는 두 명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제 왕권시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낙랑공주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년 전,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국의 임금 최리(崔理)의 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민족적 주체성을 망각한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이 낙랑국을 이른바 한사군(韓四郡)의 하나인 낙랑군과 혼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한사구의 낙랑군은 지그므이 중국 북경 근처인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고, 최씨 낙랑국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한 남포시 수산리 벽화에 등장하는 해모양의 북. 고대 한반도에서 북은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종교적 신성물이었다. -사진제공 조법종 교수>

어쨌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이면서도 우리 고대사를 한 줄기 풍류의 멋으로 장식한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서기 32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이라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대무신왕에게는 두 명의 왕자가 있었으니 첫째는 제1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해우요, 둘째는 갈사왕의 손녀인 제2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동이었다. 호동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태어날때부터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자라면서는 성품 또한 착한 데다가 고구려 사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미더깅 무예와 담력까지 뛰어나 임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제1왕비와 그의 소생인 이복 형 해우는 호동왕자의 수려한 자태와 비상한 자질을 시기하고 미워했다. 호동에 대한 부와의 사랑이 변함없다 보면 장차 해우가 왕위를 이어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동왕자는 늘 수심에 잠겨 지내야만 했고, 자주 대궐을 벗어나 사냥으로 시름을 잊으려고 했다. 그날도 호동은 도성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사 수십명을 거느린 특별한 사냥길이었다. 사실 이번 길은 사냥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호동은 대궐을 떠나기 전에 부왕께 이렇게 말씀드려 쾌히 승낙을 받았던 것이다.

"아바마마. 이번 사냥길에는 남쪽 변경까지 내려가 보고 오겠나이다. 전에 요하서쪽에 있던 낙랑·대방·옥저 같은 소국들이 우리 나라의 남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은 뒤부터 그곳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하옵니다. 이에 소자가 적들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고자 하나이다."

그렇게 도성을 떠난 호동왕자와 부하들은 압록수를 건너 사냥을 하며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살수를 건너고 옥저를 지나 어느덧 패수 부근의 낙랑 땅으로 접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동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순시하던 낙랑국왕을 만나게 되었다.

"혹시 그대는 북쪽 나라 고구려의 호동 왕자가 아니오?"
"아니, 어찌 처음 만난 저를 알아보십니까? 공은 누구신지요?"
"나는 낙랑왕 최리라고 하오. 왕자의 풍모가 소문에 듣던 바와 같이 수려하니 어찌 몰라 보리오. 하지만 무슨 까닭에 아무통보도 없이 이곳에 온 거요?"
"미리 양해도 없이 이렇게 국경을 넘은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냥도 겸해 유람삼아 나섰는데, 산천경개가 너무나 아름다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귀국 땅까지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만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자 낙랑왕은 이렇게 만류했다.

"아니오! 이대로 돌아가면 섭섭해서 안되지! 누추하지만 우리 성으로 모실 터이니 좀 쉬었다가 가오. 귀국과는 이미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소?"

그렇게 해서 호동왕자는 낙랑왕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궁궐로 돌아온 낙랑왕은 곧바로 호동왕자를 위해 푸짐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여운 외동딸을 호동에거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운명적 첫 만남은 이루어졌는데, 이 두 아름다운 젊은이는 처음 보는 순간 그람 서로에게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호동왕자는 결국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무신왕은 오래 전부터 낙랑궁 정복을 계획해 오고 있었기에 어느날 낙랑공주를 데리고 도성인 국내성으로 돌아온 호동을 몰래 불러 이렇게 일렀다.

"얘야. 우리 대고구려가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밖에 없구나. 이제 우리남쪽 국경이 살수까지 이르렀지만, 그 아래 패수의 낙랑과 한수 이남의 백제와 신라의 힘이 갈수록 커지니 걱정이다. 내 먼저 낙랑을 쳐서 아우르고자 하나, 듣건대 그 나라에 두가지 신기(神器)가 있다니 어찌 했으면 좋겠는고?"

"낙랑국의 두가지 신기라면 적군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운다는 북과 나팔을 가리킴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대체로 군사를 움직여적을 치는 데에는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급습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니라. 따라서 우리가 낙랑국을 고격하기 전에 너는 반드시 구 북과 나팔을 없애야 하느니라!"

부왕의 명령을 받은 호동왕자는 어쩔수 없이 낙랑공주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낙랑공주를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낙랑이 한 나라가 되어야만 우리 부부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당신 부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당신 나라의 두 가지 보물을 없애야만 내가 죽지 않게 된다고 거의 협박을 했던 것이다.

꼼짝없이 사랑의 덫에 걸린 공주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수락했다. 호동왕자와 작별한 공주는 그 길로 시집인 고구려를 떠나 친정인 낙랑국으로 돌아갔는데, 사랑하는 낭군 호동왕자와는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낙랑국으로 돌아간 공주는 왕자와 약조한 날 밤 대궐의 보물창고로 모래 들어가 오직 낙랑국에만 있는 희귀한 보물인 자명고와 자명각을 영영 못쓰게 찢어 버렸다.

그 이튼날, 이미 국경을 몰래 넘어온 고구려의 대군이 도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낙랑왕은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이른 가운데서도 자명고와 자명각이 울지 않은 까닭이 궁금하여 군사들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북과 나팔이 찍어져 망가졌으며, 범인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 낙랑왕은 노발대발했다. 이런 천하에 못된 년이 있나. 사랑에 눈멀어 나라를 망치다니! 분노에 못 이긴 나머지 최리는 손수 공주를 찔러 죽이고 성문을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대궐로 달려간 호동왕자가 공주를 찾았을 때에 사랑하던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동왕자를 사랑했기에 낙랑공주는 나라를 배신했고, 사랑이란 이름이로 그 배신을 사주한 호동은 공주를 영영 잃어버렸던 것이다.

호동왕자가 자결로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먼저 간 공주의 뒤를 따른 것은 그로부터 반년쯤이 지난 그해 11월. 이미 오래전부터 해칠 기회만 UT보던 제1왕비가 부왕에게 끈질기게 모함을 해댄 탓이었다. 그것도 호동이 자기를 겁탈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무고를 했던 것이다. 대무신왕은 처음에 이를 믿지 않았으나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는 바람에 결국은 넘어가고 말았다. 예나 이제나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주위 사람들이 왜 억울함을 스스로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호동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비록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데 내가 사실을 밝히면 어머니의 허물이 드러나고 아버지가 걱정을 할 터이니 어찌 그런 불효를 저지르랴." 하고는 칼위에 엎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가인박명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랑공주와 비운의 사나이 호동왕자의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2천년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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