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 설씨녀


 

설씨녀(薛氏女)... 들어들 보셨남? 성이 설씨인 신라의 여인이다. 이름은 모른다. 이 얘기 <삼국사기> 열전에만 달랑 나온다. 근데... '설씨녀', 이거 읽기도 쓰기도 번거럽다. 걍 줄여 '설녀'라고 하자. '설녀'? <지옥선생 누베>에 나오는 '설녀(雪女)'와 헷갈린다. 글치만 뭐 어떠냐. 돗자리, <지옥선생 누베>에 나오는 설녀 업빠 좋아한다. 그러니 걍 '설녀'로 한다. 꼬우면 그대들이 중간에 '씨'자 넣어서 읽으시라.

  가실, '몸빵'으로 미녀를 얻어내다

신라 제26대왕 진평왕(재위 579~632) 때 일이다. 율리(栗里)에 사는 설녀는, 비록 집안은 개뿔도 없이 가난했지만 얼굴과 맘씨가 곱디 고왔다. 하는 짓도 반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녀를 본 남자들은 첫눈에 안구가 돌출했단다.
그치만 그저 그러고 말 뿐, 용기를 내어 수작을 거는 놈들은 없었다. 너무 예쁜 여잘 보면 감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돗자리 세대엔 그랬다.
근데 설녀 집안에 시련이 닥쳤다. 늙고 골골한【年老... 衰病】아빠가 국경지대에 가서 복무를 해야 될 차례가 온 거다【番當防秋】. 아니, 그 나이에 뭔 군대냐고? 당시엔 군역의 의무란 게 좀 복잡하다. 관련 자료도 밸로 없지만 대충 일케 본다. 일단 15세가 되면 군인이 될 자격을 갖춘다. 글고 적어도 3년은 국경지대, 즉 전방에서 뺑이친다. 그걸로 땡인가? 아니다.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해져 국가께서 부르시면 몇 번이고 겨나와야 한다. 늙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 샤량부(沙梁部)에 가실(嘉實)이란 소년이 있었다. 얘 역시 집안은 찢어졌지만 성품은 괜찮았단다. 글고 딴 넘들과 마찬가지로 설녀를 짝사랑했다. 그치만 가진 거라곤 두 쪽밖에 없는데다 사랑을 고백할 용기마저 없으니 속만 끓일 뿐이었다. 이런 가실의 처지를 터보는 이렇게 읊어댄다.

처음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한다는 그 말을 그때야 알게 되었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너의 눈빛조차 쳐다볼 수 없었지
너를 만나면 아무말 못하고 애매한 담배만 피워댔고
너와 헤어지고 나서야 못다한 말들을 후회했어

그러던 중, 늙은 아빠를 군대에 보내야 하는 설녀의 슬픈 얘길 듣고 그 집을 찾아간다. 지가 설녀 아빠 대신 군대에 나가주려고다. 가진 건 두 쪽 달린 몸땡이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른바 '몸빵'이다. 가실의 얘기를 들은 설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빠에게 이 얘길 한다. 아빠 역시 입이 찢어진다. 글고 가실을 불러 일케 말한다.

 
"그대가 이 노인을 대신해 군대에 가준다니 기쁘고도 미안하구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네. 싫지 않다면 내 딸을 아내로 삼게 해주고 싶은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

지 대신 군대 가준다고 개뿔도 없는 넘한테 덥석 딸을 앵겨주는 이 아빠, 예사롭지 않는 분이다. 가실이야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몸빵' 하려는 목적이 바로 그거였는데. 가실은 바로 설녀에게 묻는다. "언제 결혼할까여?" 그치만 설녀의 대답은 가실을 맥빠지게 한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갑자기 할 수는 없지요.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했으니 죽어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군대에 갔다가 돌아오고 난 뒤 결혼을 해도 늦지 않아요"

뜨바... 어차피 할 결혼이면 언능 하면 좀 어떠냐. 없는 집안끼리 하는 혼인인데 체면이니 격식이니 따질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돗자리같으면 '젠장... 없던 일로 합시다' 하며 네고를 벌였을거다. 그치만 우리의 가실, 돗자리와는 달리 착실한 청년이었다. 아쉽지만 설녀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근데 말이다. 요 얘길 그대로 믿는다면 당시엔 대체 복무도 가능했단 거 아닌가. 텍스트엔 가실이 '소년(少年)'이라고 나오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청년(靑年)'이다(울나라 옛날 기록엔 '청년'이란 단어가 안나올 거다. 울나라에서 '청년'이란 단어를 쓴 건 1897년이 첨 아닌가 싶은데... 뭐 틀리면 좀 갤챠주시라).
그럼 지도 일단 징집 대상 아녔을까. 근데 아직 영장이 안나와서 그럴 수 있었던 걸까. 돈  주고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설녀네나 가실네나 모두 가난했으니까. 국가의 입장에서야 골골한 노인 대신 팔팔한 청년이 지원한다니 밑질 건 없겠지만, 좀 알쏭달쏭하다.

  오호~ 구리거울을 뽀개시겠다?

암튼 우리의 설녀, 당장 결혼하지 못해 맥풀린 가실이 딱했는지 거울을 두 쪽으로 뽀개 건네주며 일케 다독인다.

 
"이걸 신표(信標)로 삼아 한 쪽씩 갖고 있다가 뒷날 맞춰봅시다"

여기서 좀 딴지를 걸어보자. 설녀는 거울을 두 쪽으로 뽀갰단다【取鏡半分】. 당시 거울이라면 구리거울, 즉 '동경(銅鏡)'이다('유리+수은'으로 맹근 거울이 나온 건 15세기인가 16세기인가 유럽에서였다).
그럼 구리거울을 뽀갰단 말인데, 이거 결코 쉬운 일 아녔을 거다. 뭐 쇠톱으로 잘랐다면 할 말 없지만. 글고 구리거울은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없는 살림에 이걸 왜 뽀개냐. 부엌칼을 쪼갤 수도 있고 숟가락을 쪼갤 수도 있다. 그 비싼 구리거울을... 하긴, 부엌칼이나 숟가락 쪼개 나눠가졌다면 분위기가 폐품수집같이 엿 같기는 했겠다. 뭐 백년가약의 상징이니 비싼 거울 뽀개도 이해한다고 치자.

근데 말이다. '달랑' 3년 군대 갔다 오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가. 3년 만에 모습이 달라져야 얼마나 달라진다고 아무렴 서로 얼굴을 몰라볼까. 멀쩡히 돌아왔어도 거울쪼각 잃어버렸으면 걍 쌩치잔 속셈인가. 잘 이해가 안가기도 한다. 그치만 정말로 몰라보는 경우도 있었나보다. 한참 뒷 시기인 조선시대이긴 하지만,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어떤 선비의 아들이 결혼한 지 3일만에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다. 졸지에 생과부가 된 아내는 수절하며 지낸다. 근데 수십 년이 지나 웬 낯선 남자가 찾아와 지가 남편이라고 하네. 근데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아내는 물론 부모조차 누군지 모르겠단다.  
그러자 기발한 방법으로 진짠지 가짠지를 가려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그 남자에게 신혼 초 3일 밤 동안에 있었던 정황을 각각 묻고 나중에 서로 맞춰본다. 딱이다. 그래서 진짜로 판명이 났단다(그 당시 신혼 첫날밤 테크닉이야 다 그게 그거 였을텐데... 안 맞으면 이상하쥐).
근데 이게 이 집만의 일이 아녔단다. 심지어, 좀 의심이 가긴 하지만 포로로 끌려갔다 온 남편인 줄 알고 같이 살았는데 알고 보니 딴 넘인 경우도 있었단다. 뭐 그러니 설녀의 처사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나중에 적절하게 쓰였으니 대충 넘어가자.

  "그말 듣자마자 군대를 가버렸던거야 애마(愛馬)에게 널 맡기고 내 자릴 비웠찌"

가실은 떠나면서 설녀에게 말 한 마리를 맡기며 일케 말한다.

 
"이 말은 천하의 명마(名馬)이니, 뒤에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거요. 이제 내가 떠나면 길러줄 사람이 없으니 부디 맡아두었다가 쓰도록 하시오"

돗자리, 요 대목을 첨 읽었을 때 과연 이 말이 나중에 어떤 눈부신 활약을 펼칠까 기대에 부풀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대 갖지 마시라. 그랬다간 이따가 이루 감당하기 벅찬 허무감이 노도처럼 밀려온다. 돗자린 앞으로 꼬꾸라져 한참을 웃었지만...

  Love is... (3+3=6)

1줄 건너뛰니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근데 가실은 안 돌아온다. 1칸 건너뛰니 다시 3년이 흘렀다. 벌써 6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마침 나라에 뭔 일이 생겨 군인들을 교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會國有故 不使人交代】. 뭔 일이 생겼을까. 뻔하지 뭐. 딴 나라랑 치고 박고 한 거다.
진평왕 25년(603)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한 뒤 계속 신라의 변경을 위협하자, 신라는 진평왕 30년과 33년에 수나라에 청병(請兵)한다. 이듬해 수나라가 마침내 고구려를 공격하고,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쌈질은 한동안 뜸해진 대신 신라는 백제랑 엉겨붙는다.

그럼 가실이 복무할 때는 고구려와 싸우던 때일까 백제와 싸우던 때일까. 고구려로 보는 게 나을 듯 하다. 앞서 텍스트에 보면 설녀의 아빠가 '방추할 당번이 되어【番當防秋】'라 나오는데, '방추'란 '북적(北狄)'의 침입을 방어하는 거란다('북적'은 항상 가을에 침입하기 때문에 글케 부른단다).
그럼 뭐 고구려밖에 더 있냐. 따라서 가실이 전방에서 뺑이치던 때는 대략 진평왕 25~33(603~611)년 정도가 아녔을까. 우리의 가실, 재수도 드럽게 없구나.

허나 일케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마을에서 전방으로 끌려간 넘이 가실 혼자가 아니라면 그 넘들도 못 돌아왔을 거다. 그럼 뭐 단체로 뭔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고구려와 한참 치고 박고 하는 사정이야 신라 백성들도 모르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어쩜 이랬던 건 아닐까. 가실은 3년이 지나자 제대할 준비를 한다. 근데 3년 더 뭉개란다. "왜여?" 하고 물으니, "이 시캬! 쫌 있으면 진짜로 니 차례 돼서 다시 와야 혀. 왔다 갔다 하느니 걍 3년 더 눌러 있어, 스캬" 했을 수도 있쟎은가. 그래서 '3+3=6'이 된 거라고 말이다. 그래야 3년이면 돌려보낼 넘을 3년 더 잡아놓는 명분이 서지 않을까.

  설녀, '미녀+효녀+열녀' 3관왕에 오르다

암튼 기다리다 지친 설녀의 아빠, 이제 단념하고 딴 넘에게 시집가라고 딸을 꼬신다. 충분히 이해한다. 3년 만에 돌아오기로 한 넘이 암 소식이 없다. 글고 나서 3년을 더 기다린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만하면 설녀도 아빠도 할 만큼 한 거다. 딴 넘한테 시집가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설녀도 혼기가 꽉 찼고 아빠도 이미 늙었다. 또 솔직히 가실이 그리 조건이 좋은 넘도 아녔다. 그치만 우리의 설녀, 일케 말하며 아빠에게 개긴다.

지난번엔 아버지를 편안케 해드리려고 억지로 가실과 약혼을 했으며, 가실은 그걸 믿고 군대에 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가실은 춥고 배고파 고생하며, 더구나 국경지대에 있어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고, 마치 호구(虎口)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늘 물릴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신의를 저버리고 식언을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아버님의 말씀은 결코 따를 수 없사오니, 다시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허거덩~ 이거이 먼 말인가. '억지로 가실과 약혼을 했다【强與嘉實約】'는 대목에 유의하자. 설녀의 속내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별로 끌리지 않는 약혼이었단 거다. 즉, 가실이 별로였나보다. 그치만 늙은 아빠를 위해 지 한 몸 바친 거다.
아빠를 위해 내키지 않는 넘과 약혼한 효성이 눈물겹고, 그 미모를 갖고도 이상형을 만나지 못한 신세가 안타깝고, 내키지 않는 약혼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신의를 지키려는 그 모습이 애처럽다. 그래서 돗자리는 삼국을 탈탈 털어 최고의 효녀이자 열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설녀를 치켜세운다. 게다가 미녀이니 뭔 말을 더 하겠는가.

   "어차피 너의 곁에 남은 채로 너만을 사랑할테니"

그치만 이 아빠, 어케든 설녀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설녀 몰래 동네 청년과 약혼시키고 그 날이 되자 그 넘을 집으로 맞아들인다. 그러자 우리의 설녀, 굳게 버티다 몰래 도망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놓고 간 말을 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눈물을 떨군다. 글타면 이 명마(名馬)의 활약은? 암껏두 없다. 이게 전부다. 싀퍼... 이게... 대체... 무슨 명마냐.
근데 말이다. 놀랍게도 바로 이 때 가실이 돌아온다. 말 보고 한숨쉬며 울었더니 말이다. 암껏두 한 일은 없지만, 명마는 명마구나. 허나 가실이 뼈만 앙상한 거지꼴로 나타나니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이 때 가실은 뭘 하나 툭 내던진다.
오홋~ 거울쪼각이다. 그걸 주워든 설녀, 서러워 통곡한다. 그제서야 이 넘이 그 넘인 걸 안 설녀 아빠와 집안 사람들이 기뻐한단다. 아무도 깽판 치지 않는다. 모두들 맘씨는 착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동정의 눈길을 줘야 할 딱한 인간이 있다. 그 누구도 모른 척 하는 이 얘기의 유일한 희생자, 바로 설녀와 결혼할 뻔한 그 동네 총각이다. 가실이 며칠만 늦게 왔어도 설녀는 그 넘 차지였을텐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근데도 설녀와 가실이 결혼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걸 보면, 피 튀기는 복수극은 안 벌어졌나보다. 아~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그 넘이야말로 진정한 싸나이다. 이런 넘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만한 거다.

  가실은 어쩌다 '꽃제비'가 되었을까?

근데 말이다. 왜 가실은 군대 갔다가 그만 '꽃제비'가 되어 돌아왔을까? 그게 일반적 현상이었다면 사람들이 그리 놀랠 일도 아녔을텐데 말이다. 아무리 물자가 딸리고 군역이 힘들다 해도 일상적인 현상은 아녔을 거다. 혹시 군수품을 중간에서 언 넘들이 빼돌려 결국 쫄따구들만 죽어난 건 아녔을까. 이런 꼬라지를 하고 어케 고구려군하고 싸웠을까. 허긴, 그쪽 넘들이라고 해서 뭐 특별히 사정이 나았겠는가.
일케 생각할 분들도 계시겠다. 가실이 군대에 있을 때 꼭 누가 중간에서 삥땅치지 않았어도 워낙 물자가 부족하니 그럴 수도 있쟎겠냐고 말이다. 그럴 듯한 말씀 되시겠다. 그치만 말이다, 글케만 보기엔 당시 공무원들의 기강이 너무 개판이었다. 다음은 설녀와 가실이 살았던 진평왕 때의 일이다.

사량궁(沙梁宮)의 말단관리인 사인(舍人) 중에 검군(劍君)이란 청년이 있었다. 진평왕 47년(627), 때는 바야흐로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사는 형편이었다【民賣子而食】. 근데도 관리들은 서로 짜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 나눠먹었다.
오직 한 사람, 검군만 예외였다. 부정부패엔 모조리 한 통속이 되어야 서로들 든든한 법이다. 예외가 생기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 넘들은 검군에게 일케 묻는다. "모두 곡식을 받는데 오직 너만 버티는 이유가 뭐냐? 적어서 그래? 그럼 더 줄께 받을래?" 이 얘길 들은 검군은 씨~익 쪼개며 일케 대답한다.

 
"내가 화랑인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두고 풍월도(風月道=花郞道)를 닦았으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千金)의 이로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련다"

근랑은 아빠가 이찬이었으니 고위층 자제였던 셈이다. 그 밑에서 낭도(郎徒)로 있던 검군은 결코 부정부패에 끼어들 수 없다고 버틴 거다. 검군이 근랑을 찾아가려 하자 관리들은 불안해한다. 틀림없이 말이 샐 거 같아서다. 그래서 서둘러 검군을 불러들여 죽이려 한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근랑에게 "이제 다신 만나 뵙지 못하겠습니다"라 말한다. 근랑이 왜냐고 물었지만 이유는 말하지 않고 버틴다. 허나 자꾸 근랑이 캐묻자 결국 이실직고한다. 그러자 근랑은 "왜 관청에 알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에 검군은,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워 다른 사람을 꼰지를 순 없다고 말한다.
그럼 차라리 도망가는 게 어떠냐"고 근랑이 물으니,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치는 건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호~ 간만에 대단한 인물 만났다.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별로 본받을 자신은 없지만...
암튼 검군은 죽을 줄 알면서도 관리들을 찾아간다. 그 넘들은 술자리를 벌여놓고 지들이 잘못했다면서 검군에게 독이 든 술잔을 건넨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검군은 술잔을 비운다. 그리고 죽는다. 뜨바... 눈시울 붉어진다. 뭐 일케 허전하게 죽냐. 검군... 똘똘이냐 띨띨이냐.

진평왕 47년이면 고구려가 못 살게구니 그 놈들 좀 때찌해 달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며 징징대던 때다. 더구나 흉년이라지 않나. 그런 때라도 해먹을 넘들은 해먹는다. 중앙정부의 기강이 이 정도인데 군대라고 뭐 얼마나 달랐을까.
글고 생각해보자. 검군이 섬긴 화랑인 근랑은 아빠가 17관등 중 2nd 고위인 이찬이다. 지 아빠 빽 동원하면 검군 살리는 게 뭐 어려웠겠냐. 부정부패 척결하잔 거니 명분도 좋다.
그치만 근랑은 그러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관청에 알리던가 도망치든가 하라는 거다. 왜? 잘 모르겠다. 어쩜 말이다. 지 아빠도 그 더러운 먹이사슬에 낑겨 있던 건 아녔을까. 말단들만 썩어 있는 공직사회는 없다. 말단들도 다 윗넘들 하는 거 보고 배우는 거다. 상납과 묵인의 상호관계 없인 부정부패도 없다. 즉, 부정부패는 시스템 전체의 문제란 거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아시는감?

아무리 그래도 글치 평시도 아니고 한창 적군과 싸우고 있는 전시에 설마 군수품을 빼돌릴 나쁜 넘들이 있겠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다. 순진한 분들 되시겠다. 난세일수록 이권도 커지고 협잡도 넘친다.

멀리 갈 거 없다. 6.25전쟁 때 일어난 그 유명한 '국민방위군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게 머냐고? 이러심... 곤란하다. 이거 상식으로라도 알고 계셔야 한다. 우리의 평생 도우미 <네이버백과사전>엔 일케 나온다.   

  6.25전쟁 중의 1.4후퇴 때 국민방위군의 일부 고급장교 사이에 일어난 부정사건. 1951년 1월 후퇴작전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1950. 12. 11. 설치법 공포)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 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아사자(餓死者),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수만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국회조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51년 3월 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금품만도 현금 23억원(圓), 쌀 5만2천 섬이나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이 물러났고,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민의 의혹을 풀기 위한 국회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였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관련된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그 해 7월 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金潤根),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 12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대단타. 정말 대단타. 띵겨먹을 게 따로 있지 전쟁 중에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불쌍한 군인들 보급품을 쓱삭해서 굶어 죽고 얼어죽게 만들다니. 트바르너무쉐이드르... 일케 죽어간 군인들은 암매장되기도 했단다.
글고 1950년 당시 23억원? 5만2천섬? 이게 대체 5명 사형으로 끝날 일인가.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느그들은 정말 관련 없냐(근데 신성모라... 올만에 듣는 이름이다. 백범김구암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에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이다. 그 넘두 나쁘지만 끝까지 감싸준 이승만이 더 나쁘다).

잠시 옆으로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이제나 저제나 '말단' 공직자들은 박봉에 시달린다. 그러니 애교스런 '삥땅'까정 비난할 생각은 별루 없다. 그치만 백성들이 굶어죽는 판에 창고의 곡식을 뽀리치고, 군인들이 굶어죽는 판에 군수품을 삥땅쳐댄 넘들까정 동정해선 안된다.

  해피엔딩인데도 으째 이리 뒷맛이 띱띨한가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설녀와 가실의 어정쩡한 러브 스토리는 어딘지 씁쓸한 뒷맛을 남겨놓는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고구려네 백제네 쌈질은 이어지고, 애비는 늙고 골골해도 전방으로 불려가야 하고, 놈씨는 결혼하고 싶어 '몸빵'으로 대신 끌려가고, 딸년은 맘에 없어도 아빠 위해 약혼을 하고, 서로들 뭐가 못미더워 멀쩡한 거울 박살내고, 놈씨는 3년이면 땡일 줄 알았는데 3년 더 구르고, 아빠는 딸년을 딴데 시집보내려 안달이고, 딸년은 버티며 도망치다 붙잡히고, 요긴히 쓰이리라던 말놈은 암껏두 하는 일 없이 멀뚱대기만 하고, 기다리던 놈씨는 '꽃제비'가 되어 돌아오고...

이런 총체적 난국이 없다. 암 상관도 없는 돗자리까정 절로 한숨이 팍팍 나온다. 효녀지은이 그랬고 도미부인도 그랬듯이, 왜 옛날 울나라 여인네들의 삶은 이다지 고달팠던 걸까.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울 할머니들의 삶만 봐도 글치 않았나. 갑자기 <집으로>의 김을분 할머니가 생각나네. 에잇~ 날씨도 기분도 꿀꿀한 토요일 오후, 나가서 영화나 한판 쌔리고 꼼장어에 쏘주나 걸쳐야겠다.

끝으로 여러분들께 한 가지 묻겠다. 터보의 노래방 가면 <Love is...> 제목에 붙어 나오는, 그 괄호 속의 <3×3=0>이 대체 뭔 뜻이냐? 왜 여기서 '곱하기'가 나오냐? 갤촤주시라.

딴지 역사부 / 돗자리 (e-rigby@hanmail.net

- 딴지일보 117호(2003.7.13)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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