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 있어서 밥을 같이 먹는 이유
미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보면 한 진열장에 '일심단선(一心團煽)' 이라는 원형의 한국 부채가 하나 전시되어 있다. 1871년 신미년 강화도 광성포대에서 있었던 한·미 전쟁때 노획해간 전리품 가운데 하나다. 부채살 줄기마다 가느다랗게 이름들이 적혀 있었는데 전투에 임하기 전 부대 단위로 이 일심단선에 각자의 이름을 적고 일심사생(一心死生)을 맹약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선 일심배(一心杯)라는 커다란 술잔에 술을 담아 순배(巡杯)로 돌려 마시고 또 일심반(一心飯)이라 하여 이날만은 밥그릇 없이 한솥밥을 나눠 먹음으로써 일심동체의 맹약을 다지고 확인했다. 이 일심선, 일심배, 일심반의 정신적 구속 때문인지 미 해군측 기록에 의하면 그 전투에서 구현된 공생공사의 우리 병사들 정신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한 사람의 패주 없이 전원이 포대에서 옥쇄(玉碎)하였고, 부상당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의 예외 없이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한 것이다. 부상당한 병사 가운데도 미군의 총부리를 끌어 가슴에 대고 쏘아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는 눈물겨운 종군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한국인의 집단을 일심동체로 구심(求心)시켰던 것은 한잔 술에 더불어 입을 대는 순배를 하고 한솥밥을 더불어 먹었던 의식에 있었다. 곧 나눠 마시는 한잔 술이 한국인에게 술 이상의 뜻이 있듯이 나눠 먹는 한솥밥도 밥 이상의 뜻이 있었다.개화기 때 6 조에서의 점심은 으레 오시(五時)부터 신시(申時)까지 계속되었다. 지금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상을 물려 밥을 먹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식사 유형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판서, 참관 등 당상관(堂上官)이 맨처음 먹고 나면 그 상을 물려 정랑(正郞), 좌랑(佐郞) 등 당하관(堂下官)이, 다시 그상이 물려져 아전이, 아전이 물려 종들이 먹고 보니 그만한 시간이 소요했던 것이다.속칭 '네 물림 상'이라 불렀던 이같은 물림유형은 계급 사회의 비인간적 차별 행위로만 봐서는 안된다. 한솥밥을 물려가며 그 모두가 나눠 공식(共食)함으로써 상하의 일심동체를 다지는 한국인의 집단 영위의 슬기가 식사 형식에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윗 사람은 물림을 배려해서 오히려 종들만도 못먹게 마련이다. 이에 벼슬아치를 송덕(頌德)하는 상투적인 문구 가운데 양상수척(讓床瘦戚)이라 하여 "상물림으로 얼굴이 메말라 수척해지고…" 운운하는 대목이 생기기까지 했다.따라서 한솥밥을 먹고 안먹고는 한국인에게 큰 뜻을 지녔었다. 이를테면 법도 있는 집에서는 첩(妾)을 들이면 첩에게 한솥밥을 먹이지 않고 시앗(妾)솥이라 하여 솥을 따로 두어 따로 밥을 지어 먹였던 것이다.떠돌이 행상인들이 사랑에 묵으면 끼니 때 반찬은 차려도 밥만은 내질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역시 한솥밥이 갖는 정신적 플러스 알파 때문이다. 그래서 행상인들은 '단지밥' 이라 하여 손수 단지에 밥을 지어 먹고 다녔다. 가족을 우리나라에서 식구(食口) 혹은 식솔(食率)이라 부른 것도 바로 한솥밥이 갖는 정신적 유대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수작(酬酌) 이나 한솥밥이 산 사람 사이의 연을 확인하는 공식 문화라면 비빔밥은 살아 있지 않은 조령(祖靈)과의 연을 확인하는 공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제사를 지내고 나서 조령에게 바쳤던 신주(神酒)를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 절차 역시 젯상에 올렸던 갖가지 음식을 골고루 한데 섞어 비빔밥으로 나눠 먹는 절차이며, 또 그 제수를 이웃 친척과 나눠 먹는 이바지 절차로 신인공식(神人共食)을 한다.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보면 이바지는 곧 신령에게 바친 음식을 뜻하였는데 그것은 연이 닿는 사람끼리 나눠 먹는 음식이란 뜻으로 진화한 데서도 신인공식 문화의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따라서 비빔밥은 신인공식의 제사 절차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신령이 내려와 드셨던 그 모든 찬을 골고루 한데 비벼 먹는 것 이상으로 보다 철저한 공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삿날 자시(子時)를 기다리지 못해 곧장 잠들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제사 비빔밥을 남겨 두었다가 꼭 먹이곤 하였는데 그것은 신인공식에서 아들 놈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전통적 의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