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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된 슬픔, 또는 대면하는 척 외면하기 /변정수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에 전혀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적어도 그 슬픔의 표현에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차이도 무화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차라리 누가 더 슬퍼하며, 심지어 누가 더 진정으로 슬퍼하는지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누군가의 실존적 부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기실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그래서 지구 반 바퀴 너머에서 한 젊은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언필칭 '비보(悲報)'임에 틀림없다. 그 죽음이 슬픈 까닭은, 그가 '무고하게' 죽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참혹하게' 살해당했기 때문도 아니며 심지어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의 현실감이 슬픔이라는 정서로 표현되는 것이다.

국상(國喪)을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전국민적인' 비통과 애도의 물결이 내게 적지 않은 당혹과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그 죽음 자체가 개별적인 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혹시나 망자와의 기억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가족'들이나 '불알친구'들의 또래 집단이라면 모를까, 도무지 '함께 슬퍼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아니 심지어 가족이나 불알친구라 해도 그에 속한 각자에게 고유한 기억이 있을 터이므로 각자가 느끼는 망자의 부재감은 철저하게 개별적인 영역에 있다. 하물며 김선일씨라는 개인과 일면식조차 없었던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슬퍼한다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어디에선가는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는' '무고한' 사람들이 심지어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죽음에 한결같은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부재가 새삼스럽게 슬픔으로 다가올 까닭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생전의 김선일씨와 교분은커녕 면식조차 없었던 이 수많은 사람들 또한 적어도 그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김선일이라는 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슬퍼하도록 하는 것일까.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을 마치 잘 알던 사람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래서인지 슬픔의 표현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망자와의 크고 작은 공통점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논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감정이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려는 흔적이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격한 슬픔의 정서를 과장하는 표현일수록 제시된 공통점이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절대적인 근거로 설정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김선일씨가 죽었다면 나 또한 똑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인질로 잡혀 살해당할 가능성,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그 주체가 누구이건 간에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전쟁에 휩쓸려 비무장 민간인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지금 당장 집 앞 골목을 지나다가 공연히 시비를 걸어오는 깡패를 피하지 못해 날벼락 맞듯 살해당할 가능성이나 고층 아파트 밑을 우연히 지나가다 20층 높이에서 고의로 내던진 물건에 깔려 생명을 잃을 가능성, 또는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얼마든지 완치될 수 있는 질병에 걸리고도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낮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매일 밤 뉴스에서 이런 어이없는 죽음의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가해자를 욕할지언정 피해자를 위해 슬퍼하지는 않는다. 유독 김선일씨의 죽음만 '다름 아닌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아니 좀더 정직해지자. 당신이 윤리적으로 매우 고매한 사람이어서 이 모든 죽음들, 적어도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생리적 수명이 다하기 전에 맞이해야 하는(즉 크건 작건 사회적 책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나누어야 할) 모든 죽음들에 대하여 언제나 한결같이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하자. 아마도 당신은 존경할 만한 사회운동가나 종교인이 되기 전에 노이로제에 걸려 정신과적 치료를 먼저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특별히 무감각하거나 무책임하지 않은 지극히 평균적인 수준의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갑남을녀들이 이 수많은 '무고하고,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죽음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일 터이다.

물론 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슬프지 않은 데도 슬픈 척하는 것뿐이라고 매도할 의사는 전혀 없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애통해한다는 것을 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유독 김선일씨의 죽음을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등가인 다른 숱한 죽음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는가. 게다가 존재하던 누군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죽음 앞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죽음은 심지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사형 집행조차도 실존적으로는 등가(사람의 목숨 값에는 차등이 없다!)라는 점은 다시 상기되어야 한다.

가능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이것은 김선일이라는 개인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 수많은 '추모'객들은 김선일이라는 개인을 알지도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건 망자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 심리적 투사일 뿐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 모든 슬픔은 '정치적'이다. 즉 개인 김선일의 죽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나'의 죽음인 것이다. 물론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예컨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낙후한 의료보장 체제는 '정치적'으로 등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에 전혀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적어도 그 슬픔의 표현에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차이도 무화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차라리 누가 더 슬퍼하며, 심지어 누가 더 진정으로 슬퍼하는지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과잉된 슬픔의 행렬 속에 정작 서른 두 해 동안 이 세상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 개인 김선일의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집단'에 의해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명된 추상적 상징으로서의 김선일'들'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모든 상제례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는 해도, 비통과 애도가 '전국민적으로' 흘러 넘치는 자리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정작 망자의 실존적 부재가 '소외'된다는 것은, 그 어떤 '정당한' 명분을 끌어댄다 해도 기실 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죽음의 개별성을 실존적으로 대면하지 않은 채로(기실 그럴 방법도 없지만) 마치 대면하고 있는 양 슬픔의 정서를 제의(祭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죽음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적' 욕망은, 비겁하게 망자에게 투사시킬 일이 아니라 정직하게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정치적 견해를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해 '파병 반대'의 머리띠를 두를지언정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다는 것을 사양한다. 당장 '무고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절박한 사회적 의제들에 책임 있는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실천을 모색하고자 하는 한편으로 그 피해자들을 위해 일년 내내, 하루 이십사시간을 비통해하지는 못하듯이.

출처: http://www.cultiz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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