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이미 진정한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인 듯 하다. 학점 관리에 열을 올리는 아이들은 졸업에 필요한 이수 학점을 맞추기에 급급하며, 어느 과목 성적이 잘 나온다는 소리가 들리는 과목만을 골라 듣기도 한다. 거기에 전공 과목과는 담을 쌓은 채, 컴퓨터와 영어, 각종 자격증에 몰두하며 오로지 취업을 위한 준비의 장으로서 대학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 간단한 진리[?]를 거부한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고 생각하지만 영어 한마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인턴 경력도 전무인지라 지금까지도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ㅠ.ㅜ)

하지만 대학은 분명 학문을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공간이다.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갖춘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공성을 지닌 교육을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공간은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적지 않은 책임성을 요구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이 많은 부분 변질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학생과 교수에게 주어진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 사회에 진정한 학문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숙연해지는 까닭은 왜 일까?

피히테의 이름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연설로 인해 많은 이들은 피히테를 민족주의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따로 있었다. 그가 적을 옮길 때마다 학자의 사명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학자의 역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알게 해준다. 오늘날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찰'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어쩌면 이는 그가 살아가던 시대가 여느 시대보다도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789년 이웃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은 피히테의 조국 독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처음 일었던 자유주의적 흐름은 피히테를 크게 고무시켰지만 어느새 혁명은 변질되어 독재자(!) 나폴레옹을 낳았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독일로서 프랑스의 강대해짐은 분명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사회를 불안케 만드는 원인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로서 학자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피히테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은 감성과는 달리 중심적이며 변치 않는 본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귀납적인 방법이 아닌 연역적이고도 선험적인 방법을 통해 학문을 하는 것을 그는 학자에게 필요한 요소로 파악했다. 이는 도덕적인 선과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도덕적인 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고, 감정은 이성에 의해 제어, 조절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부터 그는 점차 범위를 좁혀나간다. 인간은 거대한 공동체에 소속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학자는 그러한 상호 과정 속에서 타인에게 보다 많은 변화를 미칠 수 있는, 즉 자신의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타인의 변화를 위해 보다 많이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 듯 싶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된 태도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세 못지 않게 타인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달하는 능력 역시도 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자칫 잘못 이해할 경우 지독히도 보수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학자를 하나의 신분으로 보고 자유에 근거해 다양한 신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설명하는 과정은 마치 봉건적 신분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하지만 자유에 근거한 다양한 신분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지닌 능력을 극대화하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불평등을 없애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신분은 계급이나 계층이라기 보다는 '직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각종 비리, 부정부패. 한국 사회에 가득한 그 얼룩으로부터 우리의 대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학자의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어이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문제의 근원에 대해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피히테가 무려 200여년 전에 이야기한, 하지만 그의 웅장했을 연설을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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