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가 숨쉬는 아름다운 성-노이슈반타 

 

 


    
주의 고장 뮌헨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 유럽의 지붕 알프스의 거대한 산맥 북쪽 언저리 퓌센이라는 마을의 나지막한 산 중턱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성이 하나 놓여있는데 이름하여 노이슈반슈타인,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 불리는 성이다. 오늘도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성은 외벽이 흰 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중세의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밝은 색조를 띄며, 지붕 위에는 비대칭적인 여러 개의 푸른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유럽풍의 바탕에다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수 있을 법한 신비한 모습의 성이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방문객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은 루드비히 2세. 그는 당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왕으로서, 1845년 8월 25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하고 특히 성장하면서부터는 시와 음악, 그리고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에 심취하기 일쑤였고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1861년 2월 2일 그가 16세 되던 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부터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인생과 바그너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864년 타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관 1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제는 과거와 같은 절대군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대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하여 상황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체질적으로 워낙에 정치에는 소질이 없었고 음악과 시와 미술과 같은 예술세계속으로 빠져들기 좋아하는 심약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궁전이 있는 뮌헨을 가급적 피하려 들었고 오히려 궁전을 떠나 남부지방의 알프스 부근의 전원에 있을 때 더욱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1870년 초가 되자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이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는 더욱 더 성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정치에는 흥미와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예술가로 태어나 평생 성만 짓다가 죽었다고나 할까. 루드비히 2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침실에서 자던 어느 날 새벽 왕은 정적에게 납치 당하여 슈탄베르크 호수의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된다. 왕은 요양소에 갇힌지 사흘만에 자신의 주치의인 구텐박사와 함께 물에 빠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886년 6월 13일의 일이다. 이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우선 루드비히 2세는 1미터 90정도의 큰 키의 소유자인데다 어릴 때부터 선수에 버금 가는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는데 첫째는 왕의 무능을 보다 못한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과 두 번째로는 강제 연금된 자신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그를 말리던 구텐박사는 실수 또는 고의로 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살아 생전 성을 세 곳에 지었지만 그나마 완성된 곳은 신 백조의 성 하나뿐. 그러나 이 성 역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년 동안 지었음에도 3분의 2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루드비히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 재산을 모두 털어 지었으며 때로는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거나, 조금씩 돈이 생길 때마다 지었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가 죽을 무렵에는 축성에 따른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려 1천4백만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드비히 2세가 이 성에 살았던 것은 겨우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은 매우 성격이 여성스러우며 동물들,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에 등장하는 백조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성 안의 문고리는 모두가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고 벽화와 커튼의 장식에도 역시 많은 백조가 그려져 있다. 이토록 왕이 백조를 좋아하자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소피 샤를로트는 루드비히 2세에게 백조모양의 커다란 화병을 선물했다. 흰색의 백조모양을 한 이 화병은 백조의 발을 잡아당기면 밑으로 물이 빠짐으로서 물을 갈아주는데 편리하도록 설계된, 왕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것이었다. 소피는 나중에 이 왕과 약혼을 하기에 이르지만 결혼식 직전에 파혼하게 된다.


이 성은 산 중턱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규모가 큰 건축물은 예로부터 호숫가나 강가에 짓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마치 사람처럼 그 모습을 물에 비쳐본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3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남제' 등 세 개의 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성의 모습을 세 곳에서 비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대 규모의 성의 설계는 건축가가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성은 루드비히 2세와 뮌헨의 국립극장의 무대작가가 설계하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떠나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성 내부의 모든 그림은 뮌헨 미술대의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그려졌다. 성의 건너편 계곡 너머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생전에 지은 노란 색의 구 백조의 성이 저만치 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루드비히 2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분분한데, 첫째는 그가 바그너와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바그너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리스트의 딸과 결혼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 여자를 너무 밝히는 사람이었으므로 동성연애자라는 것은 당치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동성연애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한가지는 남자만 좋아하는 동성연애자가 있는 반면,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동성연애자도 있다고 함으로서 왕이 총각으로 살다가 죽은 이유는 그가 죽음을 당한 이유만큼이나 베일에 쌓여있다.
성 내부에는 그가 죽기 전 까지 지냈던 여러 공간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오리지날한 형태의 모든 방과 집기들을 볼 수가 있다. 접견실에 옥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옥좌를 놓을 접견실이 완성되기 전에 왕이 사망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왕이 죽은 후 성 안의 미완성된 부분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완성시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키가 1미터 90센티였을 정도로 큰 왕이었으므로 침대의 길이는 2미터 10센티가 되었고, 문마다 손잡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있다. 콘서트 홀, 또는 가수의 방이라는 커다란 방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영웅전'의 배경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1909년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이 성에는 왕의 초상이 어디에도 없는데, 이유는 왕이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 콘서트 홀에만 그나마 초상대신 왕가의 문장만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또한 성모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이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어, 그가 생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바그너를 위한, 아니, 바그너만을 위하여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하게 들 정도이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 둘러싸여 있고 창 쪽의 코너에는 사촌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 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며, 나머지 방들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의 회화들로 가득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않았다. 루드비히를 만났던 곳은 이 성 건너편의 호숫가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으로서, 루드비히의 아버지 막시말리안 2세에 의해 세워진 노란색의 여름 별궁이다. 이 호수에는 많은 백조가 있어서 루드비히가 백조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루드비히 2세가 이토록 바그너를 열광적으로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그너(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경찰서의 서기이며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한 아버지와 빵집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나게 된다. 당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아버지는 그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가이어라는 유태계 남자와 재혼하였는데 그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으며 화가이자 가수이기도 한 예능분야에 다재 다능한 인물로서 어린 바그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그너는 극도의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타고났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본능적으로 계부의 예술적 성향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같이 아버지로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서 출세를 해야만 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베토벤, 베버 등 당시의 기라성 같은 음악가와 그들의 오페라에 심취하였고 급기야는 자신이 직접 오페라의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21세 때 유랑극단의 악단장이 되었던 바그너는 먹고 살기 위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연주활동과 소규모의 오페라를 공연하였지만 벌이는 그다지 신통치 못하여, 끊임없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구걸하다시피 돈을 빌려쓰게 되고 그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가게 되었다. 1832년 첫 오페라 '결혼'을 필두로 1842년 10월 드레스덴에서 공연한 '리엔치, 최후의 호민관'이 성공을 거두면서 바그너는 마침내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당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형편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음악적 이해에 대한 편견으로 자꾸만 궁지로 몰리게 된 바그너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대표작 '탄호이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은 부채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많은 부채와 약속어음을 어긴 것 때문에 여기저기 끊임없이 도망 다니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864년 5월 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에른 국왕의 명을 받은 왕실 자문관이 찾아온 뒤 그 해 3월 1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를 만나게 됨으로서 바그너의 인생은 이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국왕은 그야말로 기적처럼 나타난 구세주였으며, 바그너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군주로서 문자그대로 천사와도 같이 바그너의 앞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 해주었는데, 이것은 바그너로 하여금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음악활동에 몰두하여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 열렬한 지지자이자 팬인 것처럼 바그너도 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가 루드비히 2세에게 1864년 5월 3일자 편지를 보면,
'오, 은혜로 충만하신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도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께 속해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왕의 바그너에 대한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성의 대부분 벽화를 바그너의 작품들로 장식하게 된다. 바그너는 이후에 왕과 더욱 친해져 왕의 친구가 되었으며,  때로는 왕의 신임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시인음악가에 대한 젊은 왕의 심취에는 처음부터 어린아이다운 면이 있었다. 그는 바그너를 조언자이자 친구로 대우했으며 이에 대해 바그너는 마치 부성에 넘치는 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루트비히 2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리는 왕처럼 되어버렸다. 바그너는 특유의 격렬한 어조와 강렬한 시로 젊은 루드비히 2세를 매료했다.

루드비히 2세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인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격정적인 언어로 수많은 전설을 뒤섞어 놓았고 루드비히 2세는 이 전설들을 항상 믿을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들 역시 언제나 바그너의 시와 음악처럼 격렬한 언어로 쓰여있었다. 바그너를 첫 대면한 직후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 여제(女帝)의 동생인 약혼녀 소피 샤를로트에게 '나와 바그너가 때때로 입장과 역할이 서로 바뀌어 버린 듯 한 인상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그가 지닌 극도의 여성스러움이 격정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바그너에게 깊이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원래 결혼날짜는 1867년 10월 12일로 정해놓고 황금마차와 기념주화까지 준비를 해놓았지만 결혼식을 이틀 앞둔 10월 10일 갑자기 파혼이 선언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바그너와의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이 결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바그너는 오늘날 가장 주목해야 할 음악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가 생전에 만들었던 주옥같은 오페라들은 끊임없이 전세계의 크고 작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를 열렬하게 후원하고 사랑했던 루드비히 2세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바그너라는 이름은 한낮 가난하고 불쌍한 무명의 음악가로서 기억의 저편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드비히 2세는 비록 비운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예술에 대한 헌신과 열정으로 후세에 기억될 아름다운 건축물과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오늘도 이 성을 보기 위해, 그리고 루드비히 2세와 바그너의 열정과 그들의 숨결을 만져보기 위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음악과와 예술가들이 경건하고 호기심 어린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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