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시대 - 캐롤라인 왕비의 1460일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2
페르 올로프 엔크비스트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18세기.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유독 많은 일들이 일어난 때가 있다. 국가의 멸망과 건립, 체제의 변화, 혁명.. 같이 굵직한 사건들 말이다. 18세기는 바로 그러한 일들이 떼거지로 일어난 시기였다. (물론 삶의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을 들라치면 -물론 서양사 입장에서- 프랑스 혁명을 꼽을 수가 있겠다. 선하지만 무능한 왕 루이 16세와 지독히도 운 없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생의 마감으로 끌고 간 그 혁명은 '화려한 불꽃' 같았지만 '비탄의 폭발' 같은 것이기도 했다. 

18세기는 정치, 경제, 문화 어디를 보나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혁명도 일어났고, 계몽주의 사상도 넘쳐났다. 산업혁명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런데. 

이 시기의 덴마크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정말로. 생각해보면 서양사를 공부할 땐 언제나 중심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러시아, 독일.. 여기까지였다. 다른 곳들은 부수적으로 배울 뿐이었는데 그나마 잘 나오지도 않았다.  

스웨덴의 작가를 처음 접한 건 「밀레니엄」시리즈였다. 스티그 라르손. 완전 반했는데, 이 책에 꽂히게 된 것도 작가가 스웨덴인이라는 게 어느 정도 작용했다. 거기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의 궁정의 역사라니. 거기다가 허구헌날 왕의 정부 이야기만 보다가 왕비의 정부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인가. 

슈트루엔제와 캐롤라인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사랑을 엿보는 건 그닥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왕의 정부들을 대할 때의 편안함은 없었고,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수시로 정부를 갈아치우는 왕의 변덕 때문에 일어나는 짜증은 없었지만, 죽음을 상징하는 왕비의 성에 대한 신성성은 무서웠다. 말 그대로 그 시대의 여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어쩐지 인형 같은 존재였다. 높은 신분의 여성은 정략의 인형, 낮은 신분의 여성은 남편의 하녀로서의 인형, 야심 가득한 여성은 신분 상승을 위해 몸을 던지는 인형...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게 된 게 얼마 안 된다는 생각에 좀 숙연해졌다. 

좀 우습지만 처음 덴마크를 떠올렸을 때 난 덴마크 우유가 생각났다. 그리고 책에도 나오지만 고뇌에 찬 우리의 햄릿도. 크리스티안 7세를 통해, 슈트루엔제를 통해, 캐롤라인을 통해 본 덴마크의 왕실은 말 그대로 미친 곳이었다. 방탕한 왕과 왕의 마음을 빼앗긴 왕비의 비탄, 왕의 정부들, 권력의 부스러기를 얻으려는 수많은 아첨꾼들, 왕의 권력을 나눠받은 권세가들. 그리고 차기 권력자를 향한 그들의 시선. 그런 삭막하고 미친 곳은 아이가 자라기엔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캐롤라인은 영국의 왕 조지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했고,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할 남자를 골랐지만, 결국 시대에 순응하는 척했다. 자신의 아들과 딸을 지키고자 적들이 원하는 걸 내 준 것이다. 그것이 그녀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캐롤라인의 남은 생 동안 살아있었다.

오늘날처럼 사랑이 각광받는 시대는 없었다. 사랑은 그저 감정의 찌꺼기, 불필요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었고 중요한 건 신의 의지, 집안끼리의 관계, 의리, 충성, 효와 같은 가치들. 그런 면에서 캐롤라인의 사랑은 실로 놀라웠다. 그들의 사랑은 짧았지만 결실을 맺었고, 루이제의 핏줄이 다시 덴마크의 왕위를 이었으니까.  

역사의 껍데기를 둘렀어도 소설은 소설이지만, 그래도 난 이들의 사랑이 안타깝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된 두 사람. 하긴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언제나 되어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는걸까. 그런 세상은 있기나 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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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는 것, 그것은 제가 진정 바라는 세상이죠. 물론 죽을 때까지 그 세상이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태어나서 사는 인생, 모두가 행복해 지는 세상에 1%라도 근접할 수 있도록 삶을 살려고 불꽃 결심을 마구 마구 합니다. ㅋ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으며 여성에게 참으로 잔혹한 시대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랑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권력 다툼의 희생양으로 시집을 여러 번 가는 여성들을 보며 남자라는 동물의 한 없는 권력욕에 치를 떤 적이 있었죠. 흠..어찌보면 지금 태어난 것이 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랑하는 여자를 뺏긴다면 그처럼 열 받는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꼬마요정 2011-06-23 00:05   좋아요 0 | URL
크으~ 맞아요!! 남자든 여자든 지금 태어난 게 다행인 것 같아요~^^ 보다 행복한 세상을 살기 위해 노력합시다~^*^

노이에자이트 2011-06-2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덴마크도 한때는 강대국이었죠. 아이슬란드의 축제를 보니 덴마크가 아이슬란드를 지배했던 시절의 원한을 상기하며 옛날의 덴마크 왕의 가면에 돌을 던지는 놀이가 있더라고요.덴마크 사람들이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봤어요.

꼬마요정 2011-06-24 17:3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정말 덴마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우유랑 햄릿 밖에 없어서 좀 답답했답니다. 이 책 읽고 이리저리 뒤져봐도 맘에 차는 게 없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