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강의들만 시험쳤지만, 그래도 시험이란 감옥이자 부담감이었다. 시험지에 한 장 가득 지식을 쏟아내고 나온 나는 바로 해운대로 갔다. 친구들이 몸보신 하고 싶다는 말에 아웃백을 갔으나, 그 날이 레인보우 할인 적용일이어서 자그마치 1시간 50분을 기다리란다. 그래서 윗층에 있는 베니건스를 갔더니 바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셋이서 세트 두 개를 시켜놓고 말 한마디 없이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운 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봤다. 따가운 햇살 아래 파랗게 보이는 바다에는 모든 근심을 다 털어버린 듯한 사람들이 제각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 나 역시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없는 사람이었다. 베니건스에서 나온 우리들은 해변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맨발 아래 느껴지는 따스한 모래의 감촉은 황홀했다. 아직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은 오후, 나른한 기분에 백사장을 거닐면서 파도를 희롱하며 그렇게 셋이서 말없이 걸었다. 이따금 서로 미소만 나누면서....

발을 대충 말리고 오션 타워에서 일하는 친구를 잠깐 본 뒤, 장산에 있는 삼성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다. 친구의 핸드폰이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곳에서 핸드폰을 수리하여 나온 우리들은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지하철로 가려면 자그마치 1시간이 더 걸리는데다가 1호선으로 갈아타야했다. 버스는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은 없고 눈 앞에 지하철 타는 곳만 보였다. 우리는 한숨을 쉬며 걷다가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변에 이질적이지만 고혹적인 한 커피숍을 발견했다. "들어가볼까?" "비쌀 것 같애.." "그래도 예쁘잖아.." 약간의 고민 끝에 우리는 들어갔고, 좁지만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에 잠깐 감탄했다. 2층으로 안내된 우리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메뉴판에는 차를 끓이는 방법, 역사, 종류 등이 나열되어 있고, 맨 뒷장에서 두 세장 정도 홍차와 커피가 있었다. 이 곳은 와인 바이기 때문에 커피는 별로 없고, 홍차는 많았다. 나와 한 친구는 종업원이 추천하는 아이스 커피-에스프레소에 연유를 가미한.. 집에서 당장 해 먹었다. 연유를 너무 많이 넣어서 그만..ㅠ.ㅠ- 를 주문했고, 다른 친구는 야생 딸기를 주문했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작열하는 저녁 시간... 피곤에 지친 우리들은 제각기 가슴 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풀어놓았다. 한 친구는 유아교육과였기 때문에 아동문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친구는 문예창작과여서 역시 아동문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상경계열이라서 그런 데에는 문외한이었다. 20여 분 왕따가 되었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꺼려졌다. 당연한 것이지만. 문득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올랐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제가 바뀌어 이제껏 읽은 책 중 다섯 손가락안에 꼽을 수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 명이 일치하는 책은 '주홍글씨'와 '제인 에어' 뿐..이었다. 펄벅의 대지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데미안,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백년동안의 고독 등...서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서로의 취향에 대해 공감하고 생각하고 비판하며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해가 지자, 우리는 고픈 배를 끌어안고 지하철 여행을 시작했다. 마침내 부대 앞에 내린 우리는 닭과 생맥주를 먹고 헤어졌다. 집에 들어가니 11시.

노곤한 몸을 뉘여 하루를 곱씹었다. 꽤나 자유스러운 하루였다. 시험에 대한 해방감,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수다, 그리고 바다... 얼마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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