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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하얀 대지와 하얀 밤.. 온 세상이 하얗게 되어버린 어느 밤, 깊은 향기를 풍기는 커피 한 잔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겠다. 세상 어디를 가든 커피와 함께라면...
따냐와 함께 하는 동안 나는 '노서아 커피'를 상상하며 집에 있는 드립커피를 마셨다. 검은 액체를 홀짝이며 조선에서 러시아로, 청국으로 다시 조선으로 부지런히 책장을 넘겼다. 물 흐르듯 흐르는 사건들 속에서 나는 숨 죽였다. 혼탁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였음에도, 치욕의 역사 한 가운데임에도 울분보다는 피식 나오는 웃음과 궁금증과 또.. 묘한 감정들이 솟아났다. 따냐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유쾌해질까..
따냐는 사기꾼이니까 따냐의 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종 황제의 바리스타라.. 정말 그럴까??
러시아의 어느 곳에서 커피 향기 풍기며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놓는 그녀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녀가 이야기하던 이반이든 정 도령이든 종식이든 그 매력이 철철 넘치는 남정네처럼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고 사랑해도 마지막 마음까지 내어주지 않는 그녀와 닮은 꼴인 남자.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 하나는 반드시 남겨놓는 그 남자.
어쩌면 이반은 따냐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자신은 아닐까.. 읽는 내내 무덤덤한 어투로 사랑을 나누는 일, 사기치는 일, 일상 속에 일어나는 단순한 일 등을 이야기하는 따냐의 모습은 따냐가 덤덤하게 설명한 이반의 모습과 닯아 있었으니까.
내가 처음 이 매혹의 액체를 알게 된 건 중3 때였다. 그 당시 파란 캔커피가 내가 마신 첫 커피였다. 나는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커피는 하얀 밤이라는 사실을 알려줬으니까. 처음 커피를 마신 그 날 나는 밤을 하얗게 지샜다. 아침 9시가 되도록 나는 잠들지 못했다. 감정이 예민하던 그 때 홀로 내 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 때 따냐가 있었더라면 훨씬 멋진 추억이 되었을텐데..
커피는 지나가버린 기억들을 회색 빛깔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되살려준다. 유쾌하던 순간도, 고통스럽던 순간도, 미칠 듯한 그리움이 눈물이 되던 순간까지도. 잠들지 못하는 밤 동안 가슴 속으로 젖어들던 숱한 감정들을 아로새기게 하는 신비로운 힘.. 추억이라는 향기 가득한 커피는 되살렸던 그 감정들을 까만 액체 속으로 빨아들인다. 커피 한 모금이면 어둡던 세상도 살만한 곳이 된다.
커피는.. 그윽한 향기와 더불어 아련한 추억을 부르는 마법같은 내 삶의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