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웬디고 - 코즈믹 호러, 만물의 의식에 가닿다
앨저넌 블랙우드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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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결코 이해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가 있다. 이 우주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다고나 할까. 코즈믹 호러라고도 불리는데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가 그런 공포를 잘 보여준다.


처음 <버드나무>를 읽었을 때, 러브크래프트가 떠올랐다. 그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버드나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자연은 인간을 집어삼킬 거대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러브크래프트는 블랙우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블랙우드의 <버드나무>는 정말 읽다보면 스산하고 음산한 분위기에 뒤이어 어딘가로 끌려가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자연의 무시무시함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가. 나와 스웨덴 친구는 다뉴브 강을 따라 가다 만난 버드나무 늪지대에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를 내주어야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인간의 손(제의, 문명)을 허락하지 않고 자연이 그러한대로 처리된다.


이 책에 나오는 단편들은 모두 희생양을 요구한다. <웬디고>는 우리가 어느 정도 인식할만한 존재다. 하지만 그 존재는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을 본 인간에게 불타는 발과 피 흘리는 눈을 주었다. 의기양양하게 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간은 반드시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막스 헨직>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간 우리에게는 친숙한 이야기다. 세균전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소재이지만 블랙우드가 살아간 시절에는 정말로 놀라울 이야기였겠지. 인간의 촉도, 인간의 집요함도 모두 공포스러웠다. 특히나 인간의 생명을 자기 뜻대로 없애려는 그 집요함이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엿듣는 자>는 어쩌면 흔한 공포 소설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막스 헨직>과 더불어 도시가 주는 삭막함과 인간이 모여사는 곳임에도 비인간적인 느낌으로 가득하다. 우주적 공포는 경외감만은 아니었다. 비정한 도시에서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남긴 흔적 역시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저 나에게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


인간은 세상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저 깊은 바닷속이나 까마득하게 높은 저 우주가 아니더라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 한 자락조차 모르는데 말이다. 

그는 매우 거칠고 맹렬하게 떠들었다. 비참한 공포에 휘둘린 채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그가 오래 저항해온 공포, 그러나 마침내 그를 사로잡고 만 공포. - P86

나는 진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저 싸늘한 두려움이 내 몸을 덮치는 감각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순전한 공포가 내 몸에서 신경을 찢어내 이리저리 비틀더니 떨림만 남게 만들었다.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기도를 틀어막았다. 내 의식이 확장해 저 멀리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내가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죽어가고 있다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변했다. - P89

나는 풍경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시점이 바뀌어 풍경이 변한 게 아니었다. 변화는 분명 텐트와 버드나무 숲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분명 숲은 지금 훨씬 더 가깡이 다가와 있었다.
... 수시로 모양이 바뀌는 모래밭 위에서 버드나무들은 조용한 발로 부드럽게, 서둘지 않는 움직임으로 서서히 조금씩 더 가까이 기어온 것이다. - P47

버드나무 숲은 무슨 대홍수 이전의 괴물 같은 생명체 무리처럼 한데 몰려 물을 마시러 다가오는 것 같았다. - P19

그림자가 깊어질수록 내 주변 사방에서 점점 더 검게 물들며 빽빽이 늘어선 그 행렬, 광포한 바람 속에서 기묘할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버드나무들이 내 안 어딘가에 달갑지 않은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존재가 필요치 않은 낯선 세상에 초대받지도 않은 우리가 무단 침임했다는 암시였다. 우리는 침입자였다. 위험한 모험을 품은 이 낯선 세상에서!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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