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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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전체 형식으로 써 내려간 역사서이다. 사마천 자신이 생각한 역사의 기원을 신화 시대까지 끌어올린 것을 보면, 황제 헌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헌원은 덕치로 세상을 다스렸는데, 사마천은 사기 본기에서 덕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헌원은 신화에서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이 아닌 자들을 중용하고 본인 역시 신과 같은 모양이나, 여기서는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본기 12편 중 1편은 오제 본기이다. 오제란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등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다섯 제왕이다. 치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로마의 오현제 같다고나 할까. 어디에도 유적이나 증거가 없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현명한 사람을 계승자로 삼았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안정시켰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사마천도 태사공왈 하면서 남아있는 기록이 있어 적으니,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못 배운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증거가 없으니 이거 진짜야!라고 하기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 때 학자들이 적어둔 게 있으니 진짜라고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오제가 토벌하려고 하는 축융이나 공공, 도철, 궁기 등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들은 전설 속의 흉 또는 흉수인데, 인간의 역사 속에 넣어두려니 뭔가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순 임금의 부인은 신화 속에서는 요 임금의 두 딸로 아황과 여영이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녀들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으니 서운하기도 하다. 어쨌든 사마천은 이 전설의 오제 시기를 인간의 역사 속으로 편입하면서 시기도 한참을 앞서고 영토도 아주 넓어지게 되었다.


2편은 하 본기이다. 하나라 왕은 우로 시작한다. 우 임금은 치수에 성공한 임금인데, 현대도 마찬가지로 치수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편 역시 전설 시대의 일이니 아주 재미있다. 우 임금 때부터 구주(九州)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 같다. 우 임금은 구주를 다스렸는데, 앞선 오제 시기에는 열 두주 였던 것이 구주로 정착한 것 같다. 


3편은 은 본기이다. 은 왕조는 구체적으로 고증된 왕조다. 이 편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17대 주왕에 이르기까지 은나라 600여 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은'이란 지명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의 수둔촌을 말하는데, 실제로 은나라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이 편은 은의 시조인 설()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간적이 알을 삼켜 설을 낳고, 순 임금은 설을  상나라에 봉하고 자씨를 성으로 내렸으며, 설이 죽자 아들 소명이 즉위하고,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가 즉위하고,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이 즉위하고,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가 즉위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즉위하고 하다가 주계가 죽어 아들 천을이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성탕이다. 성탕은 덕을 잃은 하나라 걸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덕을 잃고 온갖 폭정을 가한 끝에 주나라 무왕에게 망한다. 사마천은 은 본기에서도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다.


누가 신묘한 영능으로 태어나고 그의 자손들이 태어나고 죽으면서 공적을 쌓고 결국은 중요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마천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고려 왕건이나 태조 이성계를 보면, 이들의 조상을 기술할 때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4편은 주 본기이다. 주나라 8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주시대와 춘추 전국시대를 포함한다. 주로 서주의 역사에 중점을 두었고 평왕이 동천한 이후 각 제후들의 세가도 잘 드러나 있다. 주나라는 후직(요 임금 때 농업의 스승)이 선조인데, 그 때문인지 농업을 중시하고 공유나 고공단보 등의 업적 역시 농업과 관련되어 있다. 주나라의 경우, 앞선 나라들과 달리 남아 있는 기록들이 많기 때문에 사마천은 기록에 입각하여 주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주나라는 무왕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기와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이후 257년의 서주 시기와 평왕이 동천한 이후 동주 시기와 원왕 이후의 전국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동주 시기는 춘추 시대, 원왕 이후의 시기는 전국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주나라 876년의 역사는 덕으로 다스리던 시기에서 힘으로 다스리는 시기로 넘어가며 진(秦)나라에게 천하를 넘겨주게 된다. 


주 본기 마지막은 이러하다. "동주와 서주는 모두 진나라에 편입되고, 주나라는 망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p.164) 흥망성쇠란 이토록 허무한 것일까 싶은 문장이었다. 그래서일까, 태사공은 한(漢)나라가 일어나고 나서 90여 년 후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주자남군'이란 칭호를 내렸고, 이는 열후와 지위가 같아 비로소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마무리한다. 


5편은 진(秦) 본기이다. 진나라는 전욱제의 후예인 여수가 선조라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족보를 잘 기록하고 간수했는지 신기할 따름이긴 하다. 은 시조인 설이 알에서 태어났고, 주 시조인 기가 거인의 발자국으로 인해 태어난 것과 유사하게도 여수는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을 낳았다. 진 본기도 읽다보면 아주 재미있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진나라 역시 부침이 많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진시황이 진시황이 되기까지 역시 온갖 역경과 고난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진나라 왕 정은 자리에 오른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하여 서른여섯 개의 군을 만들었으며, 호칭을 시황제라고 했다. 시황제가 죽고 아들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고, 환관 조고가 이세를 죽이고 자영을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다.


사기 본기는 신기한 편이 몇 편 있다. 오제 본기도 신기한 편이지만, 진시황 본기가 별도로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항우 본기도 있고, 여 태후 본기도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이란 인물을 보다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항우의 경우, 사마천은 항우를 영웅으로 본 듯 하다. 본기는 제왕들의 전기인데 여기에 항우를 포함시킨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목상 황제는 의제였으나, 항우는 스스로 서초 패왕이 되어 제후를 임명하는 등 실질적 황제였다. 여 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여씨 천하를 만들어 실질적 황제 노릇을 했으니까. 이렇게 본다면 사마천이란 사람은 참 재미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6편은 진시황 본기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을 이룩한 황제이다. 출신성분이 불분명하고, 어린 나이에 볼모 생활도 하고, 후계 구도 자체에 들지 않았으나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누구보다 권력의 힘을 잘 알았고, 권력을 잘 휘둘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고, 도로를 닦았다. 하지만 아방궁을 짓고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가혹한 법치주의를 실시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불로장생에 현혹되었고 마침내는 애써 일군 나라의 기틀을 무너트렸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보면서 계속 떠오른 사람이 바로 일론 머스크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성향이 비슷해 보였기 때문인데, 아마 냉혹한 결단력과 추진력, 불로장생이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7편은 항우 본기이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며 패왕이었다. 장기에 나오는 초와 한은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다. 진나라의 폭정으로 우후죽순 반란이 일어날 때 항우 역시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 사람들을 모았다. 뛰어난 장수였으나 생각이 좁았고, 책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의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했다. 진나라를 멸망시켰고, 천하를 손에 거머쥘 순간이 눈 앞에 있었으나 유방에게 패했다. 사면초가 이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신화에 보면 순 임금은 눈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주생(사마천이 알고 지낸 유학자)이 항우 역시 눈동자가 둘이라고 들었다 한다. 아무 세력이 없던 항우가 패왕이 되기까지 순 임금과 같은 천명을 받았으나 스스로를 꾸짖지 아니하고 덕이 아닌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 했기에 천명을 잃은 것일까. 


8편은 고조 본기이다. 고조 본기는 읽다보면 하늘의 뜻이란 게 진짜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유방은 평민 출신의 건달이었다. 항우에게 계속 패했으나 결국 뜻을 이뤘고, 중국이란 나라의 기틀이 되는 한나라를 세웠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고, 능력 있고 어진 사람을 적재적소에 썼으며, 쓴소리라도 잘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력욕도 굉장해서 자신의 권력을 넘볼 것 같으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자신이 제일 중요했기에 항우로부터 도망칠 때 부인과 자식을 몇 번이나 마차에서 밀어 떨어트렸고, 여인 2천 명에게 갑옷을 입혀 내보낸 뒤 도망치기도 했다. 여색을 밝혔고, 술 먹고 빚을 지고 거짓말 하고 허세를 부리는 등 건달이 하는 짓은 다 했다. 하지만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 사마천은 한 고조가 겉으로는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속은 좁고 치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또한 그가 세운 한나라가 하, 은, 주의 병폐와 그 병폐를 다스리는 식의 통치의 순환을 이어갔다고 평가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그 병폐를 다스리지 않고 형법으로 가혹하게 통치했으니, 한나라가 병폐를 계승하기는 했어도 이를 개혁해 백성들을 곤하지 않게 했으니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말이다.


9편은 여 태후 본기이다. 사마천은 고조 본기 이후, 한 고조 사후 즉위한 혜제 본기가 아닌 여 태후 본기를 배치했다. 실질적으로 황제 노릇을 한 것은 여 태후라고 본 것이다. 여 태후는 이름은 치이며 고조 유방의 정식 황후이다. 유방이 죽은 후 자신의 아들인 유영이 즉위했는데, 그가 혜제이다. 여 태후는 황로 학설을 신봉하여 도가의 무위를 통치의 근본으로 생각했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이는 한나라 이전에 횡행했던 법가의 가혹함을 생각하면 백성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공로를 인정했다. 하지만 또한 여 태후의 전횡으로 유씨 일족을 내쫓고 공신들을 모욕해서 쫓아낸 후 여씨 천하를 만든 것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정적이자 연적이었던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결국 명분은 유씨에게 있었기에 여 태후 사후 여씨 일족은 몰락하지만, 여 태후란 존재가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듯이, 한 고조 유방의 곁에 여 태후가 있었기에 한나라가 설 수 있지 않았을까.

 

10편은 효문 본기이다. 효문제 유항은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유방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에게 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효문제는 주발 등이 여씨들을 평정하고 난 후 황제에 즉위해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사마천이 성군이라고 칭송하는 황제로 덕치를 보여 준 황제이다. 황제는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겼고 늘 백성을 생각했으며 덕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불합리한 법령을 없애려고 했는데, 제나라 태창령 순우공이 죄를 지어 처벌받게 되자 막내딸 제영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자신이 노비가 되어 아비의 죄를 갚겠으니 아비를 용서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천자는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부터 가하니 그 형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부도덕한 것인지 안타깝다면서 육형을 없애도록 했다. 제영의 효심은 오늘날 경극의 주제로도 널리 공연될 정도로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11편은 효경 본기이다. 효경 본기는 사기 본기 중 가장 짧다. 목록만 있고 내용이 없으며 <한서> 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다. 위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 역시 없으므로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12편은 효무 본기이다.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그 한무제가 효무 본기의 주인공이다. 한(漢)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이고 업적 또한 어마어마한 황제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업적은 잘 안 보인다. 눈에 잘 보이는 것은 무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계속 신선을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인 '효무'를 붙인다든지, 문장이 처음 60여 자를 제외하면 <봉선서>와 완전히 일치한다든지 하는 점 등 때문에 위작 시비가 있는 편이다. 정말로 사마천은 무제를 폄하하고 그의 업적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무제는 다른 어떤 중국의 제왕보다도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제후국들이 천자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것을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진시황이 했던 생각과도 비슷한 듯 한데, 무제는 자신이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목 공사나 흉노 원정 등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화려한 제국을 위해 백성들의 피땀이 동원된 것이다. 또한 마음에 안들면 가족에게까지 가혹하여 무고(巫蠱)의 난 같은 참혹한 일도 일으키면서 한나라가 전한, 후한으로 나뉘고 또다시 중국이 쪼개지는 원인이 되었다. 어떤 학자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유사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을 들어 실제로 사마천이 한무제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하늘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치가 있어 그 이치에 합당하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가진 것도 다 버리고 스스로 희생하기까지 하는 반면, 누군가는 가진 것에 더해 더 큰 것을 바라고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킨다. 큰 권력은 베풀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작은 권력까지 빨아들여 결국 혼자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나라의) 기계가 휴읍을 제나라에 바친 것에 대하여 <춘추>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췄다.

-반고의 <전인>에서 - P280

주9) 치사(致師)를 번역한 것인데 치사란 전쟁을 하기에 앞서 소수의 날랜 군사들을 적진에 보내 약을 올리며 싸움을 거는 것을 말한다.

(주 본기 중에서)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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