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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길상문연화루 - 하 ㅣ 길상문연화루 3
텅핑 지음, 허유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양촌에는 홍염각이라는 곳이 있고, 왕팔십은 그 곳에서 일하는 아주 불운한 사람이다. 부모는 어릴 때 다 돌아가시고, 증조모가 여덟 살인 그를 홍염각에 팔십 전을 받고 하인으로 팔아버렸으니 그 때부터 그는 왕팔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홍염각에서 일 하면서 모은 돈으로 결혼도 했으나 아내는 그가 키가 작고 못 생겼다고 이웃집 남자랑 도망 가 버렸다. 하지만 왕팔십은 그저 묵묵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또 나쁜 일이 생겨버렸다. 왕팔십의 집 대들보에 여자 옷을 입은 암퇘지가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딱 마침 그 곳에 있던 우리 이연화는 왕팔십에게 밥을 사 주게 되었고, 그 때 왕팔십의 집이 불타버리게 된다. 불운한 듯한 그이지만, 이번엔 다행이었다, 그가 없을 때 불이 나서. 그리고 백천리가 등장하며 소사가 나타났다.
소사검은 검은빛이 도는 장검으로 그 검은빛에서 짙은 쪽빛이 은은하게 돌고, 검집에선 어두우면서도 매끄러운 윤기가 흘렀다. 이연화는 검자루에 애자(용의 아홉 아들 중 둘째)가 조각되어 있고 애자의 입에 검수(검자루에 달린 술)를 끼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십오 년 전 이상이가 교완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검자루에 한 장이나 되는 붉은 비단을 묶은 뒤 양주 강산소의 청루 지붕 위에서 취여광삼십육 검을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는 이 검이 적비성과의 싸움 때 적비성의 탄 배의 돛대를 부러뜨린 뒤 뱃머리의 쇠사슬 틈으로 떨어졌다가 갑판이 갈라질 때 튕겨나가 망망대해에 가라앉는 것도 보았다. 이연화가 이 검을 손에 쥐었을 때, 전운비의 말을 떠올렸다. "미련 없이 검을 버리는 이도 있지만, 일평생 저버리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신념이 다른 법이지요." 이연화는 자신이 저버린 것들 중 소사검에게 제일 미안했다.
부러진 창날, 금엽 명패, 붉은 콩, 꼬깃꼬깃 접힌 종이... 이 사건은 근친과 치정이 얽힌 끔찍한 사건이었다. 강절 최고의 무림성지 만성도 총단의 총맹주 봉경과 관련된 추악한 사건은 금원맹의 후신인 어룡우마방의 일품독 청량우와 봉소칠의 사랑, 가짜 소사검, 만성당 제자 소소오가 얽혀 있었고, 일련의 살인들을 목격한 증인의 증언과 태아의 시체, 그리고 진짜 소사검으로 인해 밝혀졌다.
봉경은 어떻게 이연화에게 소사검을 내 줄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 이연화가 파사보로 봉경의 혈도를 찍어 그를 무력화 시킨 뒤 백천리 등과 함께 검을 빼앗았겠지. 아니면 상이태검이라는 절세무공으로 그를 제압했든지... 하지만 그 일을 보지 못한 방다병은 믿지 못할 밖에...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이상이가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워졌다.
이제 사건은 막바지로 치달아간다. 봉소칠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종이는 청량우의 것이었는데, 종이에 풀을 붙여 만든 육면체로 모서리마다 자르는 선이 그어져 있고, 안 쪽에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연화는 이 물건이 청량우가 구하려던 사람과 관계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방다병은 그 동안의 반항이 부질없게 부마가 되기 위해 전신 스물여덟 곳의 혈도를 짚인 뒤 경덕전으로 끌려간다.
경덕전은 황궁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황제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제 황궁까지 왔다. 첫 사건인 푸른 창의 살인귀부터 목을 매단 돼지 사건까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결국 이연화가 황궁까지 오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극락탑'은 천하를 손에 쥐고 싶어 한 각려초의 비장의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가 될 터였다.
십삼 년 전 어느 날 밤 황제 형징이 궁중에서 술을 마시는 데 신선이 나타나 궁에 피어난 우담화를 안주 삼아 지붕에서 술을 마셨다. 우담화 서른 세 송이가 질 때까지 앉았다가 검을 들고 떠났다고 한다. 흥이 다하자 훌쩍 떠나버린 그 초연함에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동경했다고. 그리고 십삼 년 후인 이 날, 황제 형징이 있는 지붕 위에서 방다병에게 전음입밀로 사건의 진상을 알려준 이는 이연화였다. "닮았구나"라고 중얼거리는 황제는 몰랐다. 그 신선이 이상이였다는 것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황제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고 그 증거를 제시하여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일련의 일들 또한 무시무시했다. 만약 황제가 조금이라도 무도하거나, 자격지심이 있거나 한다면 이연화는 물론이고 방다병과 그 집안의 구족까지 몰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슬기롭고 총명했으며 대범했다. 황궁 시위 중 가장 강한 어사천룡 양윤춘과 함께 금원맹의 삼맹(염제백왕, 사상청존, 염라심명) 중 한 명인 사상청존을 잡았다. 그는 관리가 되어 있었고, 많은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이연화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채 사건의 진상을 모두 듣기 위해 그와 대결했는데, 내력이 부족한 이연화였으나 너무나 멋진 장면을 연출해버렸다.
유가화는 사상청승도 열 개를 동시에 날려 이연화가 열 개를 동시에 막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십성일도참'으로 목을 누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연화의 검이 허공을 '한 번' 가르자 순식간에 암기 열 개가 튕겨져 나갔다. 이는 그가 휘두른 검이 두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가 첫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보다 빠르고, 세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가 두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보다 빠르고, 이렇게 암기를 하나씩 쳐 낼때마다 베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마지막 열번째 암기를 쳐 낼 때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암기 열 개가 찰나의 간격도 없이 동시에 튕겨나갔고, 검신에서 터져나오는 울림 역시 열 번이 아닌 하나의 장음처럼 들렸다. 이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방다병과 양윤춘이 유가화를 제압하려 했으나, 얼음바늘 같은 검기와 머리카락도 베어낼 것 같은 예리함을 가진 일격에 모두 주춤했다. 그리고 그 일격을 받아낸 것은 이연화였다. 붉은 옷의 여자, 각려초는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고도 깔깔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이연화는 피를 토하면서도 유가화에게 그의 스승이었던 옥접선자 완운낭이 자신의 검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유가화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 뒤 학정홍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방다병은 부마가 되었다.
극락탑 사건을 해결한 이연화는 연화루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누군가 찾아왔고, 소사검으로 그를 찔렀다.
각려초는 적비성을 사랑했고, 이상이를 미워했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를 잠시나마 차지했다. 칼에 찔린 채 각려초에게 사로잡힌 이연화는 탈출했고, 적비성을 구했다. 오랜 적이나 서로를 잘 아는 둘은 거리낌없이 서로의 목숨을 내맡겼다. 그리고 금원맹이든 어룡우마방이든 무너졌다. 오래도록 준비한 백천원의 첩자가 속죄와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짠 계획에 자신들의 힘을 보탠 것이다. 운피구는 각려초의 신임을 얻어 치미전 등 어룡우마방 본진에 기관들을 설치했고, 설공공을 죽였다. 그리고 오명을 쓴 채 죽으려고 했고, 이상이가 나타났다.
결국 모든 인연을 매듭지었다. 이상이가 죽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운피구는 가장 늦게, 그리고 참혹한 속죄 끝에 용서 받았다. 적비성은 상이태검과 다시 한 번 겨루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초자금은 드디어 온전한 아내를 얻었으며 이상이에 대한 자격지심을 털어냈다.
이상이를 흠모하던 방다병은 끝끝내 이연화를 찾아냈고, 속았다고 화를 냈던 시문절은 드디어 이연화를 알게 됐다. 어쩌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 옛날 오만하고 도도했던 이상이가 배신에 고통스러워하고,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강호를 호령하던 사고문 영패마저 팔아야 할만큼 처지가 비참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명예나 권력보다 자유가 더 소중함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정의를 외치며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부질없음을 말이다. 지난 사건들을 돌아보면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믿어 행하는 것들이 때론 추악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많지 않았는가.
그토록 잊히고자 했으나 결코 잊히지 않았던 이상이는 도리어 이연화라는 인물까지 잊히지 않도록 만들었다. 부존재(不存在)하는 이 하나가 존재(存在)하는 다수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건 그가 그토록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가 품은 양주만(揚州慢)이 양주만이라는 이름인 것은 남송 때 시인인 강기의 시 '양주만'에 흥망성쇠의 슬픔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흥한 것은 쇠하기 마련이니,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울 때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밀려오는 불행을 받아들이고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 않았나. 가장 순수하고 조화로운 심법, 어쩌면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을까.
이연화는 정말 미쳐버렸을까?
이연화가 돌연 진지하게 물었다. "날 죽이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은 없어? 가령 금원맹의 부흥이라든가. 은원맹, 철원맹, 금앙교, 금조방 같은 이름으로 말이야. 아니면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 청루를 차리고 아내를 얻는다든가." "왜 아내를 얻어야 하지?" 적비성이 반문했다. 이연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는 다 그러니까." 적비성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이연화를 흘긋 보았다. "너는?" "나도 아내를 얻었었지. 아내가 재가를 했을 뿐……" 이연화가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 "십이 년 전 모두에게 약속했지. 완만이 혼인하는 날 희당을 나눠주겠다고. 완만이 자금과 혼인하던 날, 난 무척 기뻤어. 완만이 더이상 불행하지 않을 테니까." 횡설수설하는 이연화의 얘기를 적비성은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적비성이 마지막 술 한 모금을 입에 털어넣은 뒤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여자 하나일 뿐."(376/490) - P376
이연화는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아미타불, 시주님의 그런 생각으로는 평생 아내를 얻을 수 없습니다."(376/490)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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