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알케스티스 지만지드라마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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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아폴론이 키클롭스를 죽인 일이 있었다. 아폴론이 사랑한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로 죽은 사람까지 살려서 하데스가 다스릴 사람이 없어지자 제우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여버린 것이다. 아폴론은 화가 나서 벼락을 만들어 준 키클롭스를 죽여 버렸다. 제우스에게 반항하고 제우스의 아들들을 죽인 죄로 아폴론은 올림포스에서 도망쳤는데, 누군가는 아폴론이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인간인 아드메토스 밑에서 일해야 했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아드메토스가 도망친 아폴론을 친절하게 맞아들여 자신의 목동으로 위장시켜 주었다고도 한다. 어떻게 된 것이든 아드메토스는 아폴론을 신으로 대우하였고 감동받은 아폴론은 아드메토스의 명이 짧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운명의 여신에게 부탁해 죽음을 피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은 아드메토스 대신에 죽을 사람만 있으면 아드메토스는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드메토스는 자신 대신 죽어 줄 사람을 찾게 되는데...


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이 희곡의 시작이자, 대부분이다. 나 대신 죽어 줄 사람이 있으면 내가 살 수 있다고 해서 당당하게 나 대신 죽어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공평한 게 있다면 바로 누구나 죽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엎어버린다고?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디스토피아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돈으로 생명을 사는 이야기의 최초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드메토스 대신에 죽어 줄 사람은 돈을 보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드메토스의 부모님도, 아드메토스가 다스리는 테살리아 페라이 성의 백성들도 아무도 대신 죽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알케스티스는 남편 대신 죽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자신이 죽으면 아이들은 엄마 없는 신세가 될테니 아이들을 후처에게 맡기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드메토스는 아내가 대신 죽는다고 하니까 막 울면서 다시는 결혼을 안 하느니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어쩌느니 하면서 막 슬퍼한다. 


심지어 아드메토스는 부모님이 자신 대신 죽어주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부모도 아니라며 막말을 하며 부모를 쫓아낸다. 이거 코메디인가? 자기가 죽기 싫으면 남도 죽기 싫은 거고, 누구도 대신 죽어 줄 의무 따윈 없는데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아드메토스 대신에 알케스티스가 죽겠다고 하자 아드메토스는 생기를 되찾고, 알케스티스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린다. 도대체 알케스티스는 왜 대신 죽겠다고 했을까.


어떻게 보면, 알케스티스는 고귀하고 의무를 다한 사람일테고, 아드메토스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일테다. 당시 테살리아 지방이 전쟁에 시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드메토스 아버지도 살아 있고, 자식들도 있으니 왕권이 심하게 흔들린다거나 하지도 않은 듯 하다. 게다가 아폴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굳이 아드메토스가 있지 않아도 나라가 막 망할 지경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다른 어떤 이유를 들기 보다 아드메토스 본인이 죽기 싫어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이 맞겠다. 물론 아내를 대신 죽이고(?)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방문한 헤라클레스를 극진히 대접한 까닭에 감동한 헤라클레스가 타나토스를 물리쳐주긴 했는데.


결국 아드메토스는 알케스티스를 돌려받아 그를 대신해 죽은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럼 지옥의 사자는 분명 아드메토스를 방문하게 되겠지. 자, 그건 언제일까? 그 때도 과연 알케스티스는 대신 죽어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처음에 아폴론은 아드메토스 뿐 아니라 알케스티스까지 구하려고 타나토스와 흥정한다. 하지만 실패하게 되고, 알케스티스는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도 할 수 있고,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 신의 개입으로 알케스티스가 살아돌아올까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원인제공자인 아드메토스의 생떼를 보며 내 마음 속에는 분노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히 알케스티스는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황은 열 두 과업 중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 트라키아로 가던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면서 더 어이가 없어진다. 어수선한 가운데 혼자만 흥겨운 그를 보며 아드메토스에게 또 화가 나게 된다. 일부러 헤라클레스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왜 말을 안 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언동을 하게 하느냐 말이다. 아드메토스는 솔직히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아내를 대신 죽게 하는 상황이 말이다.


결국은 행복한 결말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행복한 결말일까. 한 번 죽음의 공포를 맛 본 알케스티스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과연 신에게 감사하며 살아갈까 아니면 이런 죽음의 공포를 자신에게 떠넘긴 남편을 증오하게 될까.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사랑하니 신에게 감사하니 하는 아드메토스이지만, 곧 다시 나타날 타나토스에게 누구를 떠넘기려고 하게 될까. 


내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최악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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