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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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열심히 보던 드라마 하나가 끝이 났다. 가상의 도시에서 그 곳을 기반으로 권력과 부를 축적한 기득권(NR포럼)과 그 기득권에서 배제된 무리들이 형성한 또 하나의 기득권(빅마우스)의 대결을 그린 드라마였다. 다른 건 아니고 요즘 들어 이런 형식의 결말이 많은 것 같아서 아쉽다고나 할까. 몇 년 전부터 드라마에서 악이 법으로 심판 받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악은 돈으로 권력을 사거나 둘 다 갖고 있거나 해서 사법까지 장악했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온갖 인연이 다 악을 보호하니 이제 약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악을 심판하기 어렵게 된 거다. 오히려 법원이 악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더 큰 악이 나타나 악을 징벌한다거나 법인 아닌 사적 복수로 악을 처벌한다. 아니면 힘겹게 증거를 모아 밝혀도 법원에서 무시당하는 꼴을 보면서 씁쓸해 하거나. 이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판 중에 약자가 증거를 들이밀며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반전이나 카타르시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분명 저래도 빠져나갈걸 하는 마음이 드는 거다.


이 책이 그러했다. 어쩌면 위대한 여신들이 왜곡되기 시작한 때부터 그러했는지 모른다. 남신, 가부장, 가족공동체 등등의 이름 아래에서 끊임없이 착취 당하고 억압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들면서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 보내면 나쁜 여자가 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면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불의를 보고 조금이라도 말을 꺼내면 악마가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법은 여성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타의로 '회색 여인'이 되어버린 아나가 법에 기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나는 아망테와 자신의 힘으로 투렐을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증거를 모으지도 못했고, 증인을 찾지도 못했다. 철저히 통제되어 자신의 편이라고는 아망테 뿐인 아나는 증거를 수집할 수 없었고, 투렐이 무서운 사람들은 아무도 그에 반하는 증언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투렐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었고, 아나는 아망테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옛날 이야기 <푸른 수염>을 떠올렸고 그 이야기만큼이나 참혹했다. 아나는 아망테와 함께 자신의 친정으로 가려고 했으나, 당연히 투렐이 친정에 먼저 손을 뻗었기에 갈 수 없었다. 사실 투렐이 아니더라도 아나의 친정은 이미 아나의 편이 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아나의 아버지는 결혼한 이상 아나를 남편인 투렐의 소유라고 여겼고, 오빠의 아내인 바베테는 아나를 싫어했으니까. 


아나와 아망테의 도망 생활은 힘들었다. 아망테는 남장을 하고 아나와 부부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정말 뭐라도 실용적인 걸 배워야 먹고 살 수가 있다. 그러니 하녀인 아망테가 아나와 함께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나 역시 바느질을 할 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그 당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한정되어 있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다. 아이까지 있는 채로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나와 아망테를 보며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아망테는 소위 말하는 가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고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이어갔다.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이 둘이 가족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에 나온 당글라르의 딸 외제니가 떠올랐다. 외제니도 아나와 아망테처럼 자신의 가정교사와 함께 꿈꾸던 삶을,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까. 


투렐의 추적을 피하려 머리를 염색하고 얼굴에 흙칠을 하던 아나는 더 이상 그렇게 변장을 하지 않아도 반짝이던 금발은 색이 바랬고, 생기 넘치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회색 여인'이 되었다. 아나의 딸 우르줄라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막기 위해 아나가 써 내려간 자신의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까지 안타까웠다.


<회색 여인>에 이어 나온 이야기는 <마녀 로이스>로 제목만 딱 봐도, 로이스의 삼촌이 사는 지역만 봐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마녀, 세일럼. 1692년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근교 세일럼이라는 곳에서 마녀 사냥 및 마녀 재판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녀라고 하면 여자만 뜻하긴 하는데, 마녀 사냥의 광풍이 불 당시 유럽에서는 남자 마녀(?)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이 희생당했기 때문에 '마녀'라는 단어를 쓰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성형 단어 대신 마인(魔人)이라는 중성형 단어를 쓰자는 제안도 있었다고 한다.(주경철, 마녀, 생각의 힘, p.14) 그도 그럴것이 마녀 재판이란 것이 참회니 죄의 단죄니 하며 성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의 질투와 욕심 같은 추악한 감정과 두려움이 불러 온 것이니까. 실제로 남녀 모두 마녀로 몰려 자백을 하게 되면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아서 밀러의 <시련>에서 시작은 질투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국 토지 소유권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녀 재판이라는 이 형식 자체가 교회와 세속 당국의 지위를 공고히 해 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죄가 없더라도 고문을 통해 무고한 다른 이들까지 줄줄이 엮여도 풀어줄 수가 없었다. 1628년 밤베르크 시장인 유니우스 역시 무고한 이들의 증언으로 마녀로 몰려 화형 당했다. 중세 말 근대 초에 일어난 이 엄청난 광기는 1692년 세일럼에서도 불타올랐다.


로이스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만을 사랑하는 부모님 때문에 고아가 되어 한 때 의절했던 어머니의 남동생인 랠프 힉슨에게 보내진다. 도착하고 보니 외삼촌은 아프고 외숙모인 그레이스는 로이스와는 다른 신앙으로 똘똘 뭉쳐 있고, 사촌인 머내시는 어딘가 이상하고, 페이스는 조용하며, 푸르던스는 경우가 없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조현병을 앓는 것으로 보이는 머내시와 ADHD일 것 같은 푸르던스와 우울증을 앓는 것 같은 페이스가 있고, 인디언 하녀 네이티가 있다. 마녀 사냥은 성직자도 피해가지 않는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마녀가 될 수 있고, 탐나는 재산이 있으면 마녀가 될 수 있고, 예쁜데 혼자라면 마녀가 될 수 있고, 국적이 다르면, 피부색이 다르면 나이가 많은 여자라면, 고양이를 키운다면 마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국인이면서 카톨릭 신자에 찰스 2세를 옹호하고 아름다운 로이스와 인디언이자 늙은 하녀인 네이티의 운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무서웠다. 질투, 시기심, 두려움, 이기심, 욕심... 이런 것들과 성적 욕망, 내 것이 아니라면 파괴하고 싶은 감정이 어우러져 마을은 난장판이 되었다. 종교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세일럼 사람들은 피해자들을 목 매달았다. 실제로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머내시가 마법사일 것이다. 머내시가 보는 환영이 신이 보여준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머내시를 구하기 위해 그레이스는 로이스를 마녀로 몰아갔다. 머내시의 병이 로이스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페이스는 자신의 사랑을 전한 적도 없으면서 놀런 목사의 눈이 로이스에게 머무는 것을 참지 못하고, 푸르던스는 그저 '인싸'가 되고 싶어 마법에 걸린 척 연기 한다. 


광기가 지나간 후 가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 참회라는 것이 과연 피해자에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은 죄로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일까.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서 콤프라치코스 및 죄 많은 자들을 태운 채 그윈플레인을 버리고 간 그 배에서 그들이 한 참회나 세일럼의 사람들이 한 참회가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가 닿을지는 모르겠다. 루이스를 데리러 온 연인 휴 루시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아무리 회개한들 로이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고 로이스를 살려낼 수도 없습니다."(p.232)-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숙히 반성하고 추모하는 기념일을 4월 29일로 정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휴 루시는 로이스가 바라기 때문에 죄가 사해지길 기도한다고 말한다. 로이스는 자신을 탐탁치 않아 하던 네이티가 마녀로 몰려 자신의 감방에 들어오자 그녀를 위로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줬다. 마치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시드니 카턴이 단두대에 오르기 전 소녀를 위로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에게서 보살핌 받지 못하고, 사법이 짓지 않은 죄를 강제하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버리지 않은 로이스의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또한 영원히 숙제 같은 존재인 '엄마'를 부르는 모습에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없어, 로이스....


마지막 <늙은 보모 이야기>는 안타깝다. 그 이름도 안 나오는 음악가 쓰레기는 어디에 처박혀서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놈이 제일 먼저 교수대에 매달려야 하는데... 불쌍한 아기는 무슨 죄이며, 딸의 일탈을 집안의 체면과 연관 시키는 부정(父情)이라니. 그 집안 쫄딱 망해버려라. 


유령이 되어서도 전해지지 않고, 유령이 되어서야 말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참혹하고 끔찍하다. 아버지가 부당해도 딸은 호소할 곳이 없다. 응당 아버지라면 그 음악가를 잡아야지 딸과 손주를 잡을 게 아니라. 두 자매를 농락한 그 음악가가 나쁜 데 퍼니벌 부인은 모드 양을 질투했고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그렇다. 어릴 때 한 그 나쁜 짓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되돌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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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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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2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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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5 2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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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5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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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5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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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5 2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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