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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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면,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고소한 커피를 마시며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면 그 순간이 그렇게나 예쁠 수가 없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가득하지만 벚꽃은 봄이 왔다고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드러낸다. 바람에 실려 저 멀리까지 봄의 기운을 전해주려는 건지 길 위를 누비며 높은 건물들을 지나 가버린다. 어디에 봄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리고 어김없이 벚꽃은 지고 푸른잎들이 나무를 뒤덮는다. 봄은 지나갔지만 내년에 다시 올 것이다.


재호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장례식장에서 알바를 한다. 마리 역시 알바생이었는데 둘은 정규직이 되고 싶은 평범하지만 외로운 20대 젊은이들이다. 둘은 장례식장에서 알바가 끝나면 재호의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의 밤거리를 누빈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보이는 해머링 맨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정규직이라서 좋겠다는 말을 하는 그들은 밤이랑 닮았다. 모두가 자는 밤에 차비를 아끼기 위해 첫차를 기다려야 하는 그들은 처음에는 맥도날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 이입하면서, 그 시간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그리고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려 재호와 마리는 오토바이를 탄다.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까지, 코리아나 호텔도 지나고, 더 플라자 호텔도 지나고 수많은 신호등과 횡단보도를 지나면서 둘은 불안한 미래를 애써 잊어본다. 광통교 아래에 있던 수많은 물고기등을 하늘로 날려 보내기도 하고 서대문에서 본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면서 조금은 낙관적인 미래를 희망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재호의 아버지는 '아죽사' 회원이다. 처음에 나는 아죽사가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인가? 했다. 남편은 제목만 보고 뱀파이어물인걸까? 라고 했고. 아죽사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줄임말이었고, 뱀파이어가 주인공이 아니라 알바가 끝나고 첫차를 타기까지의 시간을 버텨야만 하는 두 청춘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재호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어머니는 재혼해서 다른 가족을 이루고 있지만 재호의 생일이나 누나의 기일이면 찾아오곤 한다. 재호의 아버지에게 세들어 살던 히로시는 고베 대지진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무서워하고, 재호의 아버지는 그런 히로시를 아죽사 모임에 초대했다. 빨간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가는 히로시는 아죽사 모임에 참여하면서 점점 용기를 가지고, 부모님의 죽음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게 된다. 그가 고베로 돌아가는 날 아죽사 회원들은 모두 히로시에게 선물 받은 빨간 양복을 입고 그를 배웅한다. 죽음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간의 이별, 혹은 새로운 출발.


누나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재호는 늘 하얀 뱀을 본다. 만화 <이누야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사혼을 꺼내 금강에게 가져다 주는 그 하얀뱀을 닮은 요괴가 떠오른다. 누나의 영혼을 삼킨 그 뱀은 장례식장에 있는 벚꽃나무에서 자주 보인다. 자신이 누나를 죽였기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생각하지만 말조차 꺼내볼 수 없었던 재호는 자신만의 어둠과 외로움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마리를 만나고, 아죽사 회원들을 만나고, 히로시를 떠나보내고, 아빠와 엄마를 보며 마침내 껍질을 부수고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산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누나의 죽음을 마주 볼 용기를 얻은 재호는, 장례식장에서 알바를 하는 것이 숙명 같았던 재호는 이제 미래를 향해 한 발을 디뎠다. 마리와 함께 상조회사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본 것이다. 둘이 무사히 합격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잘 위로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을 어슬렁거리는 하얀뱀과 도심 곳곳을 배회하는 고양이, 그리고 광통교 아래에 떠 있던 수많은 물고기등이 모두 번뇌에서 자유로워지길.


하지만 아마 그렇지 못하겠지. 죽을 때까지 모두 지독한 외로움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이 책의 모두를 사로잡은 것은 아닐까.

마리는 욕실에서 나와 내 옆에 서더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가리쳤다.
-경주에 있으면서 맥도날드가 그리울 때면 휴대폰으로 검색해 저 그림을 봤어. 그림 속에 앉아 있는 우리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도 저 그림을 보면 너와 같이 있는 것 같아. 언젠가 우리도 저 그림 안으로 들어가자. 환한 불빛이 있는 저 안으로. 저 자리에 앉아 창밖 풍경을 구경하자.저 너머엔 장례식장도 있고 화원도 있고 부동산도 있을테니까. 서대문을 걸어다니는 우리도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광화문과 종로를 달리는 우리도 있을 테니까.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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