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
박애진 외 지음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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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옛날 이야기를,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좋아할까? 그 이야기들에 어떤 힘이 담겨 있길래 관심을 가지게 되는걸까? 정명섭 작가님 말처럼 꿈을 노래하기 때문일까? 무엇을 배우기에, 무엇을 원하기에 이야기를 듣고 읽는걸까?


첫 번째 이야기인 <깊고 푸른>은 심청전을 재해석한 SF 소설이다. 눈 먼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쌀 삼백석에 제물이 되어야 했던 청이가 용궁도 다녀오고 연꽃 속에서 깨어나 왕비가 되어 아버지를 찾는다는 그 심청전 말이다. 난 가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효'라는 개념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효녀 지은' 이야기도 그렇고 부모를 위해 자신을, 자신의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과연 정당할까 싶었다. 부모의 은혜란 게 사람을 죽이더라도 갚아야 할 커다란 무엇인걸까? 효를 다한 청이는 그 마음에 감복한 용왕의 은혜로 살아나 부귀영화도 누리고 아버지의 눈도 찾아주지만, 진짜 삶에서 그렇게 했다간 그냥 죽고, 눈도 못 뜨고 아버지는 눈 먼 채로 쓸쓸하게 생을 마치게 될 확률이 아주 아주 높겠지. 교훈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더라도 너무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했더랬다. 그런데 희안하게 판소리 <심청전>을 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티비에서 방송해줬는데, 다 아는 이야기에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 봤더랬다. 아, 이것이 이 이야기의 힘인걸까.


그리고 이 <깊고 푸른> 역시 너무 재미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난 이후의 세상에서 하늘에는 뚜껑이 있어 진짜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빛이 없으니 전등에 의존해야 하고, 그 전등을 켜기 위해 하루종일 폐달을 밟아 전기를 만들어야 하는 그런 세상. 태양이 없으니 당연히 작물이 자라지 못해 단백질이나 기타 영양소는 인공으로 만든 것을 먹어야 하는 세상. 거기다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심해서 고위층은 늘 불이 환한 지역에 살고, 나머지는 단백질 공장 등에서 착취 당하며 하루 하루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 저 인당수 밑에 있는 광산에서 마스터 키를 찾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정부에서는 광산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자신들만이 그 곳을 독점하려고 한다. 청이는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기술자인데, 고위 관료 중 하나인 단발머리의 계략에 의해 광산에 들어가서 마스터 키를 찾는 임무를 맡게 된다. 말이 임무이지, 강요이자 협박이었다. 자신이 소모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짜 그렇다고 느껴지는 순간의 그 허탈감이란...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빵떡 할멈도 우습지만 불쌍했고, 빵집들 이름이 죄다 '바리'란 단어와 '쥬르'란 단어가 들어간다는 게 웃겼고, 한없이 다정할 것 같은 이웃들과 동료들도 자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불이익이 돌아갈 것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좀 아팠다. 먹는 것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수룡을 도와 하늘 뚜껑을 열게 되니 작물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눈도 찾아주게 됐다. 능력자 청이가 앞으로도 쭉 그렇게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멋지게 살아가면 좋겠다.


두 번째 이야기인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코닐리오의 간>은 강렬했다. 최강 전투 안드로이드 타르타루가와 용궁주의 클론인 코닐리오의 이야기이다. 결핍된 이들의 연대는 멋졌고, 안드로이드의 감정이란 '오류'가 아닌 '학습'이나 '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용궁주는 많은 수의 클론을 육지에서 키우며 자신의 망가진 장기를 '갈아 끼운다'. 클론의 장기를 적출하여 자신에게 이식한 뒤 클론은 없애 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클론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생명윤리는 우리가 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면서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 같다. 용궁주의 클론 중 하나인 코닐리오는 '간'을 위한 클론이다. 싱싱한 간을 유지하기 위해 늘 간에 좋은 음식만 먹었고, 술은 단 한 방울도 먹지 않았다. 용궁주가 그렇게 술을 퍼 마시며 간을 망가뜨리는 동안에 말이다. 용궁주는 벌써 두 세기가 넘도록 장기를 갈아치우며 살아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걸까? 자신의 장기를 학대하면서?


코닐리오는 자신이 클론인 것을 알았기에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언니들과 함께 만든 그 버킷리스트를 타르타루가와 하나 하나 이루면서 둘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대감을 쌓았고 결국 승리했다. 


약자들이 강자와 싸우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런 희생 없이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어릴 때 <별주부전>을 읽으며 용왕에게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고 했던 의사 물고기를 욕했던 기억이 났다. 토끼는 무슨 죄며, 거북이는 또한 무슨 죄인가. 인간 역시 몸에 좋다면 살아있는 곰의 쓸개즙도 빨아먹고, 죽어가는 노루의 목에 빨대를 꽂고, 살아있는 뱀으로 술을 담그는 데 제발 안 그러면 좋겠다. 제발. 


해와 달 이야기를 재해석한 <밤의 도시> 역시 저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밤만 있는 도시, 남자만 있는 도시... 이런 도시들이 있을 수 있다니 놀랍다. 하긴 미래에 저 광활한 우주에 뭐가 있다한들 다 놀랍겠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두 아이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약간은 무서운 모험담이다. 역시 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어른들이 찾지 못하는 것이 쉽게 보이나 보다. 간간이 나오는 호랑이 인간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까지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쫄았다고. 이 아이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란 결말이면 좋겠다.


<부활 행성>은 장화홍련전을 재해석했다. 옛날 이야기나 이 이야기나 계모는 나쁜 년이다. 이 이야기 속 계모가 훨씬 똑똑한 것 같지만, 옛날 이야기 속 계모보다는 덜 사악한 것 같다. 똑같은 죽음이라도 명예는 지켜줬으니까. 어릴 때 읽은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의 이불 속에 숨겨 둔 피투성이 쥐는 아직도 끔찍하다. 


꿈과 소원을 보여주는 그런 행성이 있다면, 죽은 이에게 사랑한다 한 번이라도 더 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라도, 그 말을 전하고 그들이 웃는 얼굴을 본다면 앞으로 살아갈 때 얼마나 힘이 될까. 홍련은 통쾌한 복수도 이뤘지만, 엄마와 언니를 만난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이야기는 흥부전을 재해석한 <흥부는 답을 알고 있다>이다. 이 이야기가 제일 고전을 비튼 것 같다. 과연 흥부는 착할까? 


난 늘 궁금했다. 흥부는 가난하고 또 가난한데 어떻게 그렇게 아이를 계속 낳을 수 있는건지. 영양상태가 안 좋으면 임신이 힘들지 않나? 게다가 집은 좁고 애들도 많은데 어떻게 아이 만드는 일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어쨌든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럴 수 있는 건지는 몰라도 밥주걱으로 뺨을 맞고도 뺨에 붙은 밥풀이 좋았다는 흥부는 엄청난 부자가 된다. 똑같은 '감사수'를 팔아도 흥부는 성공하고 놀부는 실패한다. 왜 일까?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놀부에게는 모자라서일까? 심보가 고와야 복이 온다는 말이 맞는건지, 아니면 흥부가 교묘하고 돈을 버는 기회를 잘 포착하는 건지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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