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랜드마크)
박서련.한유주.한정현 지음 / 아침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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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난 몇 번이나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표현에 대해 둘째 동생은 살짝 비아냥거리긴 하지만. 늘 시장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가 늘 두리번거리며 시장 구경 하다가 엄마 손을 놓쳤다. 난 두 번 밖에 기억 나지 않는데, 몇 번을 엄마 손을 놓친 그 자리에서 울고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했다. 한 번은 울고 있으니 어떤 언니가 나를 파출소에 데려다줬다. 지금 생각하면 난 운이 참 좋았다. 그 다정하고 착한 언니가 파출소에 데려다줬으니까. 파출소에 갔더니 엄마 손을 놓친 애가 나만은 아니었다. 나보다 덩치 큰 남자애는 정말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경찰 아저씨가 집주소나 전화번호 등을 아무리 물어봐도 울기만 했다. 나는 그 언니를 만난 후부터 울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도 뭔가 안도했던 것 같다. 경찰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난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곧 나를 데리러 온 엄마랑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크으, 그 때 영리해서 다행이야.) 그 와중에 단팥빵도 하나 얻어 먹었다. 경찰 아저씨들 고맙습니다.


난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 약국이 떠오른다. 국제시장에 있는 그 약국을 지나서 파출소로 갔으니까. 나에게 내 삶의 사물들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한다면 '천우사 약국'은 꼭 들어갈 것 같다. 그 때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파출소에서 울다가 전화번호를 말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박서련 작가는 어린 시절 장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정말 집과 학교, 교회만 왔다갔다 했다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지 짐작도 안 가지만(사연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한 멋진 글이 나왔다. 블러바드라는 단어와 달리 폐허 같은 그 모텔은 좀비와 미션을 수행하는 '나' 뿐이다. 그리고 방 하나 하나 탐색하며 목적인 듯 목적 아닌 목적 같은 '그래니 온 그래니'를 찾는다. 그냥 미션이니까 찾는다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나 앞에 '소냐'가 나타난다. 좀비가 출몰하는 세상에서 딸을 찾는다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된 나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삶이란 것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처럼, 죽음이 목적이자 끝이라면 사는 동안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허망하지 않을 것 같다. '나'가 마체테를 습관처럼 휘둘러 사는 대로 살아버려 불안해 하는 모습은 결코 좋아보이지 않았으니까.


한유주 작가의 수많은 6월들은 여행 같았다.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는 내가 자주 보던 미드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너무 많이 보았던 그 곳. CSI:NY에서, 블루블러드에, FBI 에서 보던 곳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난 가보지 않은 곳의 여행자가 되어 다리와 지하철과 히잡 쓴 남자를 상상한다. 


홍콩은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전 갔었다. 시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더 이상 응급실이든 어디든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던 그 때, 홍콩 가는 비행기 표를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트도, 장국영이 뛰어내린 만다린 오리엔탈도 보았다. 슈퍼마켓에서 과일도  사 먹었고, 항구에서 페리도 기다렸다. 그렇게 읽는 내내 추억을 더듬었고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도 느꼈다.


로마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이번 생에 더 이상 해외여행을 갈 수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로마의 피제리아는 어떨까. 여행자에게 낯선, 그래서 들뜨게 하는 이 도시들은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이야기는 그렇게 거주민들에게는 가혹하고 여행자들에게는 설레지만 동시에 무섭게 느껴지는 도시들을 노래한다. 그리고 서울, 무너진 다리를 추모한다.


한정현 작가의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은 가슴 아프게 읽었다. '코타르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자신이 죽어 영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는 그 병에 걸린 이모, 박덕자 씨는 자영이란 이름의 영혼이 되어 자신의 지난 날을 증언한다. 평생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는 영혼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강남의 커다란 백화점이 무너지던 때,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끝내 다 들어주지 못했기에, 평생을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뻔하디 뻔한 통속극 같은 위장 취업한 대학생 남자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같은 그런 상황이 사실은 뻔하지 않았다. 성별이 어떻든 한 쪽은 자신의 위선에 죄책감을 느꼈고, 다른 한 쪽은 모르겠다. 나오지 않으니. 하지만 둘은 함께일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서로를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삼풍 백화점과 관련한 에세이는 좀 생소했다.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은 당연히 백화점 사장 및 경영진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니까. 그 곳에 여자들이 명품에 미쳐서 혹은 돈 쓰러 가서 죽었다며 백화점을 이용한 사람을 욕하지 않으니까. 먼저 빠져나간 사장놈들이 미쳤다며 욕 하니까. 그 처참한 현장에서 도둑질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니까. 


서울, 강남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사건이 된다는데, 지방에 사는 내겐 삼풍 백화점이 강남에 있는 줄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야 삼풍 백화점이 서울에 있었던 것을 알았다. 나 역시 이제 강남을 생각하면 삼풍 백화점을 떠올리게 될까.

당사자만이 아는 슬픔, 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낯설었다.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병이라니... 그로부터 이모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기까지 1년여를 나는 자신을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죽은 이모와 함께 살았다. 자칭 영혼, 죽은 이모. 아니, 죽었지만 산 이모.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모는 그제야 자신의 ‘생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 P105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애틋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삶은 기억만으로 이뤄지는 건 또 아니다. 비록 이모의 마음에서 이모는 죽었겠지만, 현실에서 이모는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니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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