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여인이 어디까지 미치고 잔인해져야 자신의 혈육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할 때마다, 악녀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메데이아 이야기를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었다. 딱히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결코 메데이아의 결백을 의심치 않았던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기본적으로 이아손은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가 메데이아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지조 없고, 방탕하며, 부에 욕심 많은 그는 자신이 필요할 때만 그녀를 원했을 뿐이었다. 코린토스의 공주와의 결혼 제의가 들어오자 이아손은 가차없이 그녀를 버린다. 아이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가차없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이리저리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될까.. 이런 고민.

메데이아는 코르키스의 공주이다. 그녀가 태어난 그 곳에 아르고 선이 도착할 때는 과도기였다. 모권에서 부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그들에게 지금 중요한 건 황금양털 따위가 아니었다. 누가 살아남고 누가 사라지느냐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모권은 패배했다. 이 때부터 코르키스에서는 부자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예고된 것이다. 아비와 아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 아비는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아들은 아비가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우습게도 거기에 여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인들이란 남정네들에게 복종해야 하니까. 그런 상황이 시작될 시점, 총명하고 지혜로운 메데이아는 그 곳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아손에게 자신의 미래를 내 건 것이다.

메데이아가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는 건 그녀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죄를 그녀에게 떠 넘기기 위한 치사한 술수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녀의 아이들을 죽였다는 거나, 가엾은 글라우케 공주를 죽였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메데이아, 그 당당한 왕녀에게 경외심을 느꼈던 것은 그녀가 여자, 남자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그녀에게 부권이니, 모권이니, 왕위니 하는 것들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에게 의미있는 것은 다름아닌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양심, 그리고 그런 원칙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했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가 행한 바는 사람들이 가진 추악한 내면을 깨닫게 하고 말았다.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혐오스러움을 그녀에게 전가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저주받아야 할 것인지를 드러내고 만 셈이다.

가엾은 메데이아. 그녀에게 가엾다는 말은 모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을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었으니 어찌 가엾다는 말을 하지 않을까.

전정한 비극의 탄생. 다른 어떤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인 이 이야기는..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오는 고통과 좌절을 끊지 못하고 침잠해 버려 오롯이 비극만이 남아버렸다.

아크로니. 나는 이 책의 말미에 가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결코 그 시대의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다. 이전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죄없는 희생양과 선구자에 대한 탄압. 뭉쳐지면 어리석어지는 대중들을 현혹하는 위정자들. 양심은 눈을 감고, 책임 전가만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

메데이아, 메데이아. 그녀가 최고의 악녀라는 사실이 곧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07-06-2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새벽별님~ 맞아요~ 오늘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죠~~~ 홀딱 반한채로 말이에요^^지금도 기분이 묘해요~ 붕붕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아아~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요~^*^

비로그인 2007-06-2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아손은 기회주의자였던가봅니다..
메데이아의 분노는 폭발적이었지요.


꼬마요정 2007-06-2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그는 비겁한 사람이었어요~~ 나쁜 x.
이 책에 따르면 메데이아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모두를 죽였다고 누명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하구요~ 너무 몰입해서 읽어서인지 애착이 남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