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우스운 자의 꿈 러시아 고전산책 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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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순간일망정 그가 존재했던 것은

 정녕 그대의 심장과 함께 하고파서가 아니었는지...."

 

첫 장을 넘기면서 본 글이다.

 

투르게네프의 <꽃>을 변형했다는데, 가슴이 뛰었다. 아직 <백야>를 읽기 전인데, 읽기 전부터 난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낮보다는 어둡고 까만 밤보다는 밝은 그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화자가 알던 페테르부르크는 이사를 갔다. 어제까지 익숙한 곳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 혼자만 남겨진 기분 속에서 화자는 또 다른 상상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금 세상을 보면 페테르부르크가 낯설어진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것이라 여기지 않을까. 급변하는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적응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렇구나 싶었다. 하긴 꼭 섬세하지 않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낯설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거니까.

 

어쨌든 상상은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상상으로 기분이 좋아져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데, 운명처럼 여자가 있다. 그것도 우는 여자. 남몰래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 다가가지만 여자는 갑자기 다가오는 남자가 무서워 돌아서고, 위험에 처한다. 아, 이것은 영화인지 소설인지. 위험에 처한 여자를 구한 남자와 급박한 상황에서 구출된 여자의 대화는 설레고 두근거리고 풋풋했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노래 가사 같았다. '사랑으로 심장이 끓는 소리'라니...

 

아아, 나스텐카. 당신의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싫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p.37) 해가 지지 않는 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만들었다. 절망적인 세상에 꿈 같은 시간이 찾아온 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지만 사랑이, 진실함이 있었다. 물질이 주는 행복은 사랑이 주는 행복을 뛰어넘을 수 없다.  

 

꿈과 현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나 소외된 자들의 문제, 현대인의 고독 같은 거창한 주제들이 있겠지만, 정작 내게 이 소설은 한 편의 완벽한 사랑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가슴이 콩닥거렸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설렜고, 그저 상대만을 바라는 진실에 감동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 그저 3일, 그저 단 하루 중 일 분이라 할지라도 완벽히 행복한 순간을 보았고, 그 순간은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할 이유를 줬다. 사랑의 상처를 안겨줬을지라도, 사랑했던 그 사람의 찬란한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이유. 행복의 절정을 보여주고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니까. '그대는 다른 심장, 외로운 심장, 고마워할 줄 아는 심장에게 일 분의 지극한 행복, 행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야!'(p.116) 그래서 앞에 나온 투르게네프 구절 중 '그'가 존재했다는 부분에서 '그'는 '나'가 아니었을까... 비록 순간일망정 나는 존재했다. 그대의 심장과 함께하고 싶어서.

 

<백야>가 이렇게 완벽히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면, <우스운 자의 꿈>은 좀 무서웠다.

 

인간 세계가 언제부터 아름다웠다고,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다 파괴할 것만 같은데 말이다. 과연 그들에게 '원죄'가 없던 시절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럼 애초부터 '원죄'가 있는 존재라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없는걸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조차 잊은 현대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미친 사람 취급 받는 화자는 왜 꿈 속 세계를 타락시켰을까. 양심과 연민이 무엇이기에 모든 것을 망친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뜬 걸까. 어린 소녀를 찾았고...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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