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홍콩이다!!!

 

처음 문이 열리고 자호와 마크가 트렌치 코트 휘날리며 등장하는데, 진짜 홍콩 느와르 보는 느낌이라 좀 설렜다. 빠바밤 노래가 나오면서 둘이 계속 문을 넘나드는데,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하지만 소위 암흑세계에서 전설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관문'을 통과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호는 동생이 밝은 세상에 살기를 원했다. 엄마처럼, 형처럼 자걸을 보살폈다. 자걸 입장에서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情)보다는 형에 대한 애정이 더 컸기에 뒤에 배신감도 컸을테다. 훈련 도중 도선에게 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사랑이 흘러 넘쳤다.

 

흑사회에서 자호는 신망 두터운 형님이고 마크 역시 자호와 함께 전설 같은 존재이다. 마크가 아성에게 이야기할 때 주윤발 같아서 정말 깜짝 놀랐다. 아마 그 장면 하나는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병원에 있는 아버지 병문안을 온 자호는 아버지로부터 자걸을 위해 손을 씻으라는 충고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번 건으로 끝내리라 생각했을텐데, 그 마지막 한 번이 결국 발목을 잡고 만다.

 

경찰 세계이든 깡패 세계이든 배신자는 있기 마련이다. 여기 저기 욕망을 위해서든 이익을 위해서든 말이다. 결국 대만에서 있던 거래에서 자호는 함정에 빠져 감옥에 가고, 아성의 음모로 아버지는 희생되고, 자걸은 모든 분노를 자호에게 쏟아 붓는다.

 

사랑한만큼 미워한다던가... 사실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신을 키워준 건 형이라고 하면서 형을 그토록 경멸하다니. 비록 형이 나쁜 짓으로 돈을 벌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은 나쁜 사람의 계략 때문인데 모든 책임을 형에게 돌리는 자걸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형의 전과 때문에 진급이 누락되기는 하지만.

 

아성의 음모 때문에 페기의 아버지가 죽지만 페기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이해하려 했다. 만약 자호가 죽었다면 자걸은 어떠했을까...

 

물론 고회장과 자호의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자걸이 조금은 자호를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긴 그러면 극이 막을 내려야겠지.

 

자걸이 어린아이 같던 모습에서 형을 이해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마크는 지난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자신의 이상을 찾는다. 친구... 우정을 위해 불꽃처럼 타오른 마크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영화에서 좋아했던 인물은 자호였다.

 

과거가 궁금해지는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길래 이런 삶을 사는 것일까. 동생을 위해 흑사회에 들어간 것일까. 뮤지컬에서도 역시 멋진 인물이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모두를 품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의지를 잃지 않는 인물. 고회장이 딸바보라면 자호는 동생바보라고나 할까. 새 인생을 살다가도 동생이 위험하다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유명한 마약왕이었던 고회장이 개과천선해서 바르게 산다한들, 과거의 검은 물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걸은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전과자 형을 둔 죄로 잠입수사를 하게 되고, 진부하지만 사랑에 빠진다.

 

처음만 거짓이었단 말은 사실이었다. 수족관에서 수많은 물고기들 이름을 나열하며 -가물치, 잉어, 붕어, 문어 이랬으면 기억했을텐데 선셋프리티 밖에 모르겠다. 남미의 석양? 이런 거?- 너무 귀엽고 예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에게 배신감을 느낀 채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자걸이 무장해제되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웠다. 거짓으로 다가갔지만 어느새 진짜가 되어버린 마음이 가슴 아픈 사랑으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듯 하지만 결국 갇힌 공간인 수족관이라는 곳은 그래서 예뻐도 안타까웠다. 

 

스파이의 삶은 쉽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땐 빌리였다가 안경을 벗으며 자걸이 될 때는 소름이 돋았다. 진짜 같은 사람이야? 하지만 내리는 비에 옷이 젖듯, 사랑은 빌리와 자걸의 마음에 이미 스며들어버렸다.

 

자호는 견숙의 정비소에서 일하게 되는데, 여기 견숙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stand up' 노래는 정말 흥겨워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춤 춰야 할 것 같았다. 우중충한 삶에 빛 같은 존재. 견숙은 그렇게 전과자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여전히 아성은 탐욕의 화신으로 모두를 수렁으로 몰고 있었다. 아성의 음모 때문에 자호는 자걸을 위해 다시 흑사회로 돌아가고, 형제는 비극적인 순간에 서로를 마주본다. 겨누는 손 끝도 떨리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나 시간 순서의 배치를 어긋나게 하는 것 등 연출이 참 좋았다. 이미 유명한 영화를 각색해서 뮤지컬로 올린다기에 어떨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좋아서 놀랐다. 하지만 넘버들이 전부 과하게 끝을 지르는 것으로 끝이 나서 감정이 좀 깨지기도 했다. 조용히 읊조리듯 끝나도 좋았을텐데. 엘이디도 너무 현란할 땐 눈이 좀 피곤하기도 했다. 번쩍번쩍 홍콩의 밤거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되려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저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가겠지.

 

그 유명한 장국영의 전화박스 씬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했는데, 비장함은 덜 하지만 간절함은 그대로였다. 살아남기를, 나는 죽어도 그대는 어서 도망치기를 바랐는데 결국 페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 내부에 있던 배신자 때문에 정체가 탄로난 자호, 자걸, 마크는 이제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마크는 이대로 끝날 수 없다 절규하며 위조지폐 테이프 원본을 훔쳐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건 친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여전히 형을 용서하지 못한 자호와 자걸을 뒤로 한 채 보트를 타고 가던 마크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 형제란!을 외치며 죽는다. 벽에 피가 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친구를 지키고 친구의 품에서 죽는 건... 그가 원한 삶이었을지도 모르지...

 

마크의 죽음으로 자걸은 비로소 마음의 빗장을 풀고 형을 이해하려 한다. 어쩌면 자신이 형을 그 길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형을 애써 미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동생을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 준 자호는 여전히 동생을 사랑한다.

 

결말은 영화대로였다. 포스터대로 같은 수갑을 찬 두 사람은 차가운 쇠조차 녹일만큼 뜨거운 심장으로 형제애를 나누었다.

 

뮤지컬 내내 자호가 부르는 넘버들은 어딘가 짠했다. 세상 풍파 다 맞고도 여전히 누군가를 지키려는 그 마음.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자호는 자걸의 영웅이 될 만 했다.

 

자걸이 빌리의 모습으로 아성을 협박할 때 온갖 물고기 이름 다 대며 안 예뻐! 하는데 너무 웃겼다. 하하

 

자호, 자걸, 마크 모두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몰입해서 봤다. 셋이 같이 있을 땐 뭔가 훈훈하지만 처연했다. 바람결에 모든 것이 다 흩어진다 해도, 언젠가 삶의 저 끝에 서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있었음을 기뻐하며 함께 해서 행복했음을 기억하기를...

 

자호 : 유준상

자걸 : 한지상

마크 : 박민성

아성 : 박인배

한전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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