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영시경 - 배혜경의 스마트에세이 & 포토포에지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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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를 사랑한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화. 둘이 있을 때보다 혼자가 되어 서로를 더 가슴 아리게 그리워하는 영화. 화면 가득 뒷모습이 쓸쓸하게 자리하는 영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리첸과 차우가 서로의 손을 온전히 겹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도 천천히 읽었다. 내 마음에 스며들도록.

 

보랏빛 가득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정겨움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진들을 찬찬히 보았다. 흔들리는 꽃잎과 시간이 멈춘듯 한 나뭇잎들, 이 세상이 아닌 듯 보이는 바다까지, 주위에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았던 풍광들을 눈에 담았다. 그럴 때면 책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본다. 비 온 뒤 느껴지는 물내음과 디지털이 표현해내지 못할 깨끗한 색감의 하늘이 있다. 언제나 있지만 언제나 느끼지는 못하는 자연... 그런 풍경들이 다시금 내 안에 담긴다.

 

첫 장을 읽으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그렇게 길진 않지만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특히 아버지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사주셨다는 이야기에서는 눈물이 났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거나 이해해주지 못했던 어린 날이 떠올라서다. 그 나이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무언가를 끄적였지만, 두툼한 공책 한 권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었다. 그 쓰레기통에는 찢은 이의 비웃음과 방조한 이의 무관심과 내 눈물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내 감정, 내 상황, 내 주변, 이 풍경들을 솔직하고 고즈넉한 말로 풀어낼 재간이 없는터라, 응원에 힘입어 글을 잘 썼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일상 풍경들을, 경험들을, 추억들을 아련하고 처연한 말투로 물빛 가득하게 그려낸 이 책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 걸까. 갑자기 마음이 과거로 날아갔다.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옛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차우가 앙코르와트 벽에 비밀을 남기고 봉인한 것처럼.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 풍경인데, 나는 어두운 기억을 불러와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붉은 꽃가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좋지 않은 기억 곳곳에 좋은 기억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푸르름 가득하던 그 때 따뜻한 말로 날 위로해준 친구가 있고, 집에 가기 싫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무슨 일인지 들어준 선생님도 있다. 사랑하는 고양이들이 있고, 내게 힘을 주는 책이 있다.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 즐거운 음악이 있다.

 

기억을 불러온다는 건,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 같다. 시간은 상처를 흔적으로 만들고, 환희를 따뜻한 미소로 만든다. 그 흔적들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따뜻한 미소는 내게 안식을 준다. 나는 좀 더 어른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어린 수도승이 왕금수도복을 벗고 어른이 된 것처럼 말이다.

 

덧글)5부 책 들려주는 시간에 수록된 책들 대부분이 읽지 않은 책들이다. 프레이야님이 들려주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읽어보고 싶다.

무언가에 집중하여 걸어가는
저 앞발의 우아함,
발레리노의 까무룩대는 발끝을 닮았다.
허공을 치고 가르다 유연하게 돌아가는
발끝에 쏠린
고통을 닮았다. - P62

멀리서 보이는 대상과 가까이서 보이는 대상, 앞에서 보는 대상과 옆이나 위에서 보는 대상 그리고 뒤에서 보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르게 보인다. 원형은 그대로이나 시각은 착각을 불러온다. 중요한 건 어쩌면 사실보다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 P161

서로 빈구석을 예쁘게 봐준다면 금상첨화겠지.사람은 누구나 못난 구석이 있는 예쁜 존재이니까.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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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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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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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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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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