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에 온 몸이 쭈뼛해진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의 존재가 내 옆을 스쳤는지도 모른다.

 

이 뮤지컬이 그러했다. 그냥 지나갈수도 있었지만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약속을 했다. 꼭 후기를 남기겠다고. 그것이 비록 나 혼자 '그럴게'라고 했을지라도 지켜야했다.

그래서 이미 막공까지 지나버린 공연이지만, 후기를 남겨본다.
 
이 뮤지컬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기반해서 실존 인물이었던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를 모델로 한 것 같다. 용의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 받아 용 문장을 받았던 블라드 2세가 아버지이고, 루마니아어로 드라큘(dracul)이 용이니까 '~의 아들'이란 뜻의 라(-la)를 붙여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가진 블라드 3세는 용맹함과 잔인함 덕에 유명해진 인물이며 바토리 백작, 카밀라와 더불어 뱀파이어 전설의 굳건한 토대가 되는 인물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몰락시킨 메흐메트2세의 라이벌이자 당시 강력한 이슬람 세력과 대적한 거의 유일한 이 인물을 본 뜬 주인공답게 여기 나오는 드라큘라는 천하무적에 고결한 성품을 가진 훌륭한 군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는 내막을 가진 그 천하무적은 정작 본인에겐 저주이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유전의 고리일 뿐이다.

사랑하는 아내인 아드리아나는 피를 갈망하는 저주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오로지 그녀만이 각인처럼 그의 심장에 새겨져 그의 욕망을 멈춰준다. 피의 천사들도 그녀 앞에선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저 너머로 사라질 뿐이다.


하얀 잠옷 차림으로 가장 내밀한 욕망을 저주하지만 갈망하며, 무너지는 자아를 연기하는 엄큘은 그야말로 드라큘라의 비극성을 처절하게 보여줬다.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지 싶을만큼 비참하고 간절한데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절망 속에 비추는 단 하나의 빛, 그녀의 사랑은 그를 저주에서 거듭 구해주고 평범한 인간이길 원하는 드라큘라는 그녀의 품 안에서 불안한 안식을 얻는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무너뜨리고 유럽 대륙을 위협할 때 최전방에 있던 곳이 왈라키아 공국이었고,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 서유럽 등은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십자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십자군이라고 나선 이는 블라드 3세였고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했으며 적에게 자신의 힘을 보이고 흔들리는 공국을 바로잡기 위해 적에게 매우 잔인했다.(물론 나중에 메흐메트2세에 의해 목이 잘리긴 하지만. 이 때 목이 잘린 시체가 사라져서 드라큘라 전설이 더 더욱 공포스러워졌다.) 

하지만 여기서는 드라큘라가 돈장사를 하는 루치안 반 헬싱 교황에게 맞서는 것으로 나온다.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재물과 군사를 모은 반 헬싱은 고결하고 용맹한 드라큘라를 견제하며 그의 부를 탐한다. 실제로 4차 십자군 전쟁이나 그 후 교황들의 행태를 보면 드라큘라가 왜 그들을 저어했는지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사람들의 믿음 위에 군림하고 있었고, 구원과 심판이라는 이름 아래 드라큘라의 성은 결국 무참히 희생 당하고 만다.

드라큘라가 자신의 저주 때문에 수도원에 기도하러 간 사이, 반 헬싱은 드라큘라 성을 습격하고 성 안을 도륙한다.

마지막까지 십자군에게 저항하던 로레인과 디미트루는 그들의 칼에 쓰러지고, 드라큘라의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부상을 입은 아드리아나는 미끼로 끌려간다.

뒤늦게 도착한 드라큘라... 아들의 주검 앞에서 온 영혼이 뒤틀리듯 오열하다 마침내 이런 저주 받은 힘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다. 절대신을 저주하며 자신의 사랑을 찾는 드라큘라. 거듭 생각하지만 세상 어느 인간이 감히 신에 대항하여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했을까. 저주도, 믿음도 사랑 앞에서는 모두 바래져 버리고, 드라큘라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리고 만다...

아드리아나는 드라큘라가 주는 피를 거부하며 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 그녀의 별이 다시 떠 올라 그의 별과 함께 춤을 출 때, 그 때야말로 그의 저주가 끝나고 피에 묶인 영혼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이제 드라큘라는 그녀를 기다린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그녀를... 그의 시간은 멈추고 쏟아지는 별들 안에서 단 하나의 별만을 찾으며 웃음도, 생기도 모두 잃어버린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살아있는 시체'라는 표현은 정말 아드리아나가 없는 드라큘라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시간의 흐름 속에 멈춰선 채, 하나의 별만을 기다리는 드라큘라... 2막의 첫 장면은 그래서 너무나 아프고 슬펐다. 

400년 후, 아드리아나의 별은 파리에서 멈췄고, 운명처럼 드라큘라도 파리로 온다.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얼굴이지만 약간의 분노와 무언가 애타는 듯한 표정이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했는데, 거짓말처럼 기다리던 얼굴을 마주본다. 드디어!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라큘라는 400년을 아드리아나만을 그리워하며 드디어 만났는데, 아드리아나는 드라큘라를 알아보지 못한다. 실망하다 못해 좌절한 드라큘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만, 디미트루의 설득에 그녀와의 만남을 준비하게 된다.

 

여기서 드라큘라는 우리가 아는 소설 속 드라큘라와는 좀 다르다.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고 하니까. 거울 속 자신을 조우할 수 있는 존재... 그는 괴물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그저 사랑을 잃은 가여운 한 남자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군중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절박한 몸짓은 마치 운명을 예견하듯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그녀 때문에 더 애처로웠다. 이 부분 연출이 너무나 감각적이고, 드라큘라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줘서 너무 좋았다. 끝내 닿지 못할 사랑일까, 아니면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만나질 수 있을까...

 

그리고 마주한 자리... 그는 운명을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드리아나... 긴 세월의 강을 건너 드디어 만나게 된 영혼의 반쪽, 삶의 이유. 천 년을 산다한들 그녀 없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 하루를 살아도 그녀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일테다... 마침내 서로를 알아 보지만, 운명은 그녀만을 데려온 건 아니었다. 반 헬싱 주교의 환생이든, 후손이든 거짓된 믿음으로 무장한 반 헬싱 역시 나타났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피에 묶이도록 만든 자가 그 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아드리아나를 드라큘라와 만나도록 이끌었다. 신의 심판을 입에 올리던 반 헬싱은 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 그가 믿는 신은 그에게 어떤 심판을 내릴까... (뱀파이어 다른 전설에 따르면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한 영혼은 흡혈귀가 된다 하니 반 헬싱이 뱀파이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움직인 것도 잠시... 결국 드라큘라는 마지막에 아드리아나가 아닌 엘로이즈란 이름으로 그녀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녀를 놓아준다. 자신은 이미 400년 전에 사라졌어야 했지만, 단 하나의 기원, 간절한 맹세인 그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시간을 멈췄던 것 뿐이니까. 마치 40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드라큘라 성에 있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드라큘라를 마중나오는 장면은 너무 짠했다.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사랑을 지키고, 원한을 용서로 승화시킨 그는 드디어 자신의 저주를 벗고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 그 사랑을 이은 그녀의 기도에, 그를 위해 흘리는 눈물에, 그리고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을테니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롯이 그 사랑만을 남기고 간 최고의 로맨티시스트로 말이다.

 

액션씬들 다 좋았다. 드라큘라가 죽었다 살아나는 장면에서는 정말 놀랐고, 첫 흡혈 때 붉은 안개가 핏빛으로 퍼져 나가는 것도 좋았다. 파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흡혈귀의 소행이 아닐까 할 때는 왠지 영국의 유명한 살인마 잭더리퍼가 떠올랐다. 사람을 죽이는 건 보통 인간 아닌 존재보다 인간이 더 잘 하는 짓이기도 하니까.

 

보는 내내, 드라큘라의 그 감정들이 너무 생생하게 전달되어 나도 따라 울었다. 사랑, 분노, 절규, 슬픔, 오열, 기쁨... 엘로이즈 앞에서 순한 강아지처럼 긴장하는 모습에 더해 눈물 흘리다 못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까지...

하염없이 흘러 떨어지는 그 눈물 방울방울 모아 목걸이를 만들면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시킨다면, 이 눈물 목걸이는 사랑의 마음을 비출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눈물로 기도한다면, 내가 신이라면 그의 소원은 무엇이든 다 들어줬을거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드라큘라 : 엄기준

아드리아나 : 김금나, 권민제

반 헬싱 : 김법래, 이건명

로레인 : 쏘냐, 최우리, 황한나

디미트루 : 최성원,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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