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본 만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에 죽은 이가 빠지면 존재 자체가 소멸한다고.
살아있던 아킬레우스는 스틱스 강에 몸을 담가 아킬레스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불멸이 되었는데, 죽은 이는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니... 그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찾아 온 의문.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는 건 어떤걸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 경험한 일, 내가 맺어온 관계들...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라는 인식 자체도 사라진다는 걸까?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는,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의 말조차도 허공 중에 재가 되어버리고 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존재 자체가 없다... 이건 또 '공(空)'과는 다른데 '무(無)'랑은 같은 걸까? 있던 존재가 없어진다는 건,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진다는 걸까? 사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서 잊혀지지만 영혼은 남아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도리천이든 어디든 있다고 생각했다.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 돌수도 있고, 천국에 갈 수도 있고, 극락에 갈 수도 있고... 이렇게 말이다. 주로 우리가 무서워하는 귀신들은 바로 이렇게 죽어 혼만 남은 존재니까, 잘은 모르지만 죽는게 끝은 아니라는 걸테다.
하지만... 소멸된다는 건, 무(無)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그 존재가 존재했다는 자체가 사라지는 건.. 그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의식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걸까? 그게 가능한 걸까? 분자, 원자 등 우리가 물질의 크기를 나타내는 용어를 총동원해서 가장 작은 입자를 말한다 한들, 그조차 사라진다는 건데, 그럴 수 있는걸까?
나는 내 존재가 없어지길 바라는걸까? '아무것도 아니다'와 '없음(無)'은 다른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던 와중에 웃었다. 이런 게 집착인 걸까. 아 모르겠다.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또 웃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는데, 나는 그냥 내가 정말 모르는구나..를 알 뿐이다. 다행이네, 모른다는 걸 알아서.
그리고 이렇게 웃고 있는 나도, 모르는 나도, 알고 싶은 나도 모두 나이지만 또한 지나가는 나라는 걸. 그래서 이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적어본다는 걸. 하지만 글로 적은 이 느낌은 또한 내가 방금 느꼈던 그 느낌과는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어 씁쓸해졌다.
나는 여전히 '나'라는 인간에 얽매여 있다. 내가 세운 기준에 미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그런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인간이 되면 뭐가 좋은걸까? 내가 기분이 좋아지나? 떡이라도 생기나? 아니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그런 인간이 될 수는 있는건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걸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은 한낱 먼지인걸까?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생각, 저 생각 떠다니다가 익숙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놀라 펄쩍 뛰었다. 아, 정말 놀랐다...
통화를 하고, 다시 생각하고 싶었는데 딱 저기까지만 생각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갑자기 배가 고프고, 뭔가 먹고 싶고, 목이 마르고... 몸이 온 몸을 내던지며 나에게 원하는 바를 외쳤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위(胃)'를 다스려야 하나.. 였다. 무가 되든, 공이 되든 이 육신이 나를 부르는데 결국 난 존재가 없어진다거나, 공이 된다거나 하는 문제에 앞서 배고픔부터 달래기로 했다. 그게 사는 건가 보다. 이런 생리적인 현상들을 뛰어넘기엔 난 너무나 부족하니까.
시작은 참 커다랬는데... 마무리는 좁쌀만하네. 그래도 웃으며 끝내고 싶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