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의 세상 시크한 사노 요코의 젊은 시절 한국의 지식인 최정호 씨에게 보낸 편지글을 묶은 책이다.
벗으로서 40 년간 서로 주고 받은 편지라 무람없이 사노 요코의 다정한 기본 성정이 엿보인다.
그래도 작가는 작가!
역시 간간이 사노 요코의 시크하고 유쾌한 부분들도 없진 않다.
암튼 읽으면서 사노 요코의 새로운 친밀함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가지고 있었던 카드에는 베니스의 운하 그림이 있었습니다. 강물이 이발소 간판 같은 흰색과 빨간색 줄무늬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베니스에 진짜 갔더니 그림 그대로인 거예요.
하도 우스워서 하마터면 쭈그리고 앉아서 자지러지게 웃을 뻔했습니다. 미스터 최,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요?
그림처럼 아름다운 베니스가 아니라 그림과 똑같은 베니스를 보고 저는 몹시 화가 났어요.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보고 실물을 보러 갔는데 전혀 아름답지 않더라는 게 철칙이잖아요. 인생은 그런 식으로 기대에 어긋나야 해요.
그림 그대로의 풍경이나 기대한 대로 되는 삶은 우습지 않아요? 그림과 똑같은 베니스는 너무 시시했고, 그래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일본 대중목욕탕에 가 보셨어요? 페인트로 그린 큰 그림이 반드시 있어요. 그림에는 꼭 원경에 아름다운 후지산이 있고 앞쪽에 바다가 있고 오른쪽에 튀어나온 바위산에 모양새 좋은 소나무가 두세 그루 그려져 있어요. 아주 일본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데도 없는 풍경을,
일본 사람들은 목욕 중에 구경하며 느긋한 기분에 젖어요.
베니스는 목욕탕 그림 같았어요.
어느 날 국내여행을 하다가 목욕탕 그림과 똑같은 경치를 봤어요. 그때 마침 석양이 바다로 가라앉으려고 하고 - P83

있어서 그림이 더 완벽해졌어요. 그때도 무척 우스웠어요.
웃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도 역시 우스웠어요. 저는, 그림과 같은, 있을 수 없는 경치를 진심으로 경멸했어요.
저는 진짜가 아닌 여행밖에 못하는 불쌍한 사람 같아요.

미스터 최, 어서 오세요. 여행은 좋으셨나요?
- P84

신은, 세계에 불공평을 창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놀라운 일이에요. 당신의 나라에는 지금도 낭만과 농담과 사내대장부들이 있다니, 마음에 들어요. 미스터 최에 대한 일 중 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미스터 최가 대학이 생긴 이래 가장 짧은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는 일화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마음에 들어요..
뭐, 재벌의 실세하고 술을 마시고 술기운으로 한바탕 행복론을 연설하셨어요? 그래서 연구비를 내도록 만들었다고요? 웃겨 죽겠어요.
그 재벌도 역시 행복을 찾나요? 옛날에 중국의 왕이 장수를 바란 것처럼, 재벌이 되어도 더욱 더 행복을 찾는 걸까요?
그리고 당신의 탁월한 두뇌도 역시 그것을 원하시나요?
(저는 재벌 실세의 구두끈 조차도 만진 적이 없는데요.) 신은 불공평을 창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자에게도 우수한 두뇌에게도 신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 P102

신은 세계가 불완전하면 할수록 균형 잡힌 완전한 우주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에요. 미스터 최, 당신이 그 우수한 감성과 지성으로 행복론을 완성하면 당신은 더 고민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미스터 최의 행복론을 기다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감성도 지성도 없지만 성질이 나빠서 역시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제 인생은 남의 불행과 행복을 보는 재미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남이 쓴 행복론을 열심히 읽어요. 저 같은 사람이 있는 한 미스터 최의 행복론은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될 거예요.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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