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22-26[내가, 내 안의 님이-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이야기에 이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는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본다고 믿지만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닫힌 눈이 빛을 보는 길, 뜨인눈을 품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소경을 고쳐주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여러 번 나타나지만, 이 이야기는 그 방법이나 과정이 독특하다. 두 눈에 침을 뱉고, 손을 얹는다. 이런 예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 번에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짧은 몇 마디 말씀으로도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는 예수가 여기서는 침을 뱉고 손을 썼는데도 한 번에 되질 않는다. 눈먼 사람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지만, 사람이 나무같아 보일 정도로만 회복되었을 뿐이다. 그러자 예수는 다시 그 사람의 눈에 손을 얹었고,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자, 드디어 시력이 완전히 회복된다. 바로 이 장면, 병이 치유되는 절정의 이 순간이 정지 화면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에 병의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지 못하던 눈이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그 길의 열쇠가 숨겨져 있다.

어설픈 치료는 오히려 더 큰 병을 부를 수 있다. 종기가 아프다고 고름을 끝까지 짜내지 않고 설건드리면 더 크게 곪것 처럼, 설익은 신앙이 오히려 더 큰 죄악을 부르곤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지 않던가.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은 차라리 믿지 않는것보다 더 위험하다. 예수 곁에서 제자로 힘겨움을 함께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 그를 죽도록 판 것이 제자였고, 모두 도망쳤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준다. 가려진 눈이 조금씩 떠지면서 예수를 봤지만, 바로 보지 못하고 욕망과 두려움에 흐려져 팔아넘기고, 도망치는 방관자이자 공범으로 죽이는 제자들. 그런 썩은 열매는 예수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는 앞 선 장면에서 이미 잉태되어 있었던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소경이 처음 치료의 손길로 조금씩 보기 시작하는 단계가 아마도 여기쯤이었을 것이다. 보이기는 보이는데, 사람과 나무가 구별되지 않는 단계. 사람을 나무인줄 알고 도끼질 할 수도 있고, 나무를 사람인줄 알고 우상처럼 섬길 수도 있는 어설픈 눈뜸. 예수의 삶을 나누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한탄에는 이런 어설픈 신앙의 무서움과 그 결과의 끔찍함을 이미 아는 걱정과 눈물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의 신앙을 향해서도 그런 한탄과 염려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우린 모든 것을 밝히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위험들을 생각할 때, 완전한 치유, 성숙한 신앙의 중요성은 너무도 분명해 진다. 그런 완전한 치유는 예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잘 되지 않는다고 당황하지 않는 치료자와 조급해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환자의 잔잔한 마음에서 싹트고 있다. 아무 말없이 다시 손을 얻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 손길을 느끼며 스스로 보기 위해 뚫어져라고 보는 소경의 믿음이 어울어져 기적은 일어났다. 우리의 가린 눈, 썩어가는 마음의 상처, 어설픈 신앙도 그처럼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스스로 보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것이다. 이미 예수는 말없이 손을 얻고 계시니까..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지만, 교회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맹목적 신앙이 강조되면서 스스스로 고민하고 깨닫는, 의심하고 반문하는 신앙이 오히려 죄악시 되고 있지 않던가? 우리의 신앙이 자칫 이성을 버리는 것으로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신앙은 이성을 넘어서지만, 이성을 건너뛰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기도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잃고 외쳐대는 것만이 최고인듯 흘러가는 것도 이를 보여주지 않는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고 자식의 중병과 끔찍한 고통을 방치시키고 기도만 하는 부모의 왜곡된 신앙도 바로 이런 뿌리에서 자라난 결과가 아니던가?

어느 유명한 목사가, 신학자가, 심지어 예수가 깨닫고 한 말도 내 안에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깨닫게 되지 않는다면, 그냥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는 설익은 신앙이 되기 쉽다. 불교에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화두가 있다. 부처가 아무리 위대해도 자신 안에서 깨달은 진리가 아니고 그냥 맹목적을 부처의 가르침만 따르면 않된다는 것이다. 부처보다 내 안의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는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화두이다.

우리에 적용하면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렇게 살고 죽게 한 진리가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예수는 자신을 강조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했다. 단지 그의 제자들과 그 이후의 교회들이 예수를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어느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그런 "예수는 없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그런 예수를 죽여하지 않겠는가? 우리 스스로 깨닫고 보게 하는 노력을 상실케 하는 예수를...

이 본문의 소경도 스스로 보려는 노력을 통해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된다. 예수의 손길만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로만 가능하다는 은총의 신앙이 이런 중요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내가 하는 일, 내 안에 무엇인가가 울려와 움직여지는 마음과 노력은 왜 하나님의 능력에서 무조건 제외시키는가? 단지, 내 안에 가득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의지를 맑게 드러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세상의 욕망과 왜곡된 욕심이 우리 안에 이미 가득한 하나님의 마음을 흐리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흐린 마음을 부정한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 안의 참된 의지와 힘마져 한꺼번에 마비시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자식의 병을 기도로만 고치겠다고 방치시키는 부모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내가 하고 싶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왠지 자기 이기심을 위한 욕심인 것처럼 죄악시하는 왜곡도 이런 잘못에 한 몫하고 있다. 오히려 나를 참으로 자유케 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음을 망각하게 한다. 맑고 잔잔한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우리 생명과 영혼의 뿌리가 되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완전한 치유와 맑게 뜨인 눈으로 모든 것을 똑똑이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힘과 의지를 무력하게 하는 교리의 예수는 죽여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깨달음을 막는 예수, 우리의 의지와 모든 노력을 무력화하는 예수는 죽여야 한다. 비록 그런 예수가 완벽해 보이는 정답인양 안심케 하기 때문에 그를 죽여버리는 것이 사람과 나무를 구별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혼란 중에서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스스로 보려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노력은 내가 하는 것이되, 이미 내 안에 계신 님이 하시는 구도의 여정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나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 안에서도, 내 노력까지도 하나님의 노력과 하나되어 나를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다. 장성한 분량은 예수 없이도,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모든 것이 하나님일 때, 거기엔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이 아닌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체인體認하는 경지에선 하나님마져 없이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물 속에서는 물을 보지 못하고, 물 밖에 뛰어올라야만 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마치 부모가 자식이 스스로 설 수 있기를 바라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그렇게 자라가길 바라실 것만 같다.

이 치유의 장면에서도 예수만이, 혹은 소경의 노력만이 그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혹은 그 둘이 협력해서? 그것도 뭔가 부족한 대답이다. 그 순간엔 예수도 소경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경의 아픔과 하나된 예수의 마음, 자신을 치료하려는 예수 안에 샘솟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로 공명하는 소경의 노력, 하나님과 예수와 소경의 경계가 무너진 경지에서 기적은 일어난다. 결국 그 기적은 하나님이 한 것이면서, 예수가 한 것이고, 또한 소경이 일으킨 기적이다. 동시에 하나님, 예수, 소경도 없는 기적이다. 안과 밖,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 여실如實한 세계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뿐이다. 이미 모든 곳에 가득한 기적의 흐름을 밝히보며 자유롭게 흘러가는 삶, 예수를 만나 그를 죽이고 그 삶을 살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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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11-13 [표징을 거절하시다]

1. 감춰진 욕망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향을 바꾸고, 앞으로의 삶 전체를 걸어야할 결단은 그만한 무게의 이유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단의 근거, 증거에 대한 필요를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음흉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는 특정한 때에만 이런 고민을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그런 근거를 찾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검증하거나 확인하지 않은 수많은 전제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거나,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덩달아서.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욕망을 채우려는 집착에 붙들려 있을 뿐, 그 욕망의 근원이나 방향,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는 모습은 흔치 않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 욕망을 포기해야하는 결단이 요청되면, 완벽한 근거, 증거를 요구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증거없이 살아왔으면서도. 얼핏 보면 완벽한 근거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질문은 자기기만이자 위선이다. 그 질문은 진실하게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착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표적도 해답이 될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의심의 눈으로 노려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당연히 그런 증거가 필요하고, 상대는 그런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래서 난 믿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여긴다. 그것이 바로 자기기만이다. 바로 이 기만 때문에 당시의 세대나 오늘 우리 세대도 표적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위선과 기만은 단순히 표면적인 선악의 구분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 본문에서 예수를 시험하고 거부하는 집착에만 이런 기만적 질문이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자신이 정립한 신앙의 내용과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확실한 근거를 대라고 반문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신념체계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진리를 외면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정된 신념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000 여년의 역사 속에 굳어진 기독교가 오늘날 새롭게 주어진 계시에 대해서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면서 이단으로 낙인 찍고,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히 돌아봐야 할 것이다.

2. 표징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까지. 그러나 그 표적을 본 사람들조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거나 적어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서 놀랍고 기이한 기적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설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례자 요한에게 말한 것처럼 수많은 표적이 있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복음 7:22)
예수는 이런 일들이 충분한 표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람들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곤 더 놀라운 무엇인가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대해서는 그 무엇을 보인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격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않은가? 게다가 사람들은 사건들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똑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서로 말하는 것은 제각각이지 않은가?
결국 우리에겐 표증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흔적이요 음성이건만 따로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일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무늬를 발견하고 매만질 수 있는 깨인 시선이 있어야만 우리는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시선에게는 새순이 돋는 것이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 만큼이나 큰 기적이요 감동이다.
그렇다면 그런 깨인 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다양한 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분명한 길은 이웃-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는-의 절망에 함께 참여하는 삶에 놓여있을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 죽음의 그림자에 함께 공명하여, 그를 위해 내 생명을 내놓는 순간 그 길은 밝히 보일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상대의 생명이 되살아나고 치유될 것이고, 그 부활이 바로 내 기쁨이 될 것이다. 바로 그 기쁨은 내 아픔을 맑끔히 잊게 하고, 죽음을 극복해내는 모든 생명의 율동을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하게 할 것이다. 또한 생명들을 치유하고 살아숨쉬게 하는 모든 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바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체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어떤 변증을 시도하기 보다는 내가 길이니 나를 따르라고 하였고, 그 길에서 체험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예수가 바다를 건너가고 남겨진 빈 자리에서 그에게 던졌던 질문과 요구를 거두고, 내 안에 감춰진 기만적인 욕망이 없는지 반문해야 한다. 그리고 건너편에 이미 도착한 예수를 쫓아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비록 그 사이에 놓인 바다를 건너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삶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바로 그 불안의 물결 위를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 새로운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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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1-6 [고향에서의 배척]

자신의 고향에서 놀라운 가르침과 병고침의 기적을 보여주고도 달가워 하지 않는 의심의 눈초리만을 받고 떠나야 했던 예수의 이야기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주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같은 동네에서 비슷하게 자라났던 그 누군가가 뭔가 뛰어난 존재로 다시 나타날 때, 우린 보통 달가워하지 않고, 사실은 나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못한 점도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운이 좋았다거나 누군 좋겠다는 등의 시기심, 그 탁한 마음에 흔들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곤 한다. 이 이야기는 그런 우리의 벌거벗은 마음을 비춰준다.

[촛점없는 시선]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2절)" 먼저 이 질문이 눈길을 끈다. 이 질문은 상황에서 떼어내서 생각할 때는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문장이다. 지혜와 기적의 근원에 대한 탐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도는 시기심에 뿌리를 둔 욕심일 뿐이다. 3절 하반절에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묘사가 이를 뒷받임해준다. 그 대답을 원하기 보다는 상대를 깍아 내리려는 욕망이 더 강했던 것이다. 혹은 그 질문은 대답을 통해서 누군가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어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쓴 가면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는 생각은 그 근원에 어떤 욕망과 의도가 자리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을 만나면서 비판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세를 따르며 타성에 젖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오히려 그 욕망에 속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무의식의 덫, 기도는 그런 깊은 곳을 사랑으로 응시하는 시선이자 가면을 벗어던진 맨 얼굴이어야 할 것이다. 그 잔잔하고 깊은 눈빛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바라보는 촛점없는 시선일 것이다.

[전능과 무능]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5절)"

별 생각없이 스쳐가기 쉬운 이 구절이 바로 이 이야기의 마무리이다. 하나님의 아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그 전능한 존재가 무능한 모습으로 당황해하는 모습.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논리적이고 개념적 사고가 지닌 왜곡에서 시작된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의 사고는 유한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은 당연히 표현 그대로 그림자도 없고, 흠이 없는 최고의 존재일 거라고 추측된다. 이런 추론은 음과 양 중에서 양만을 지향하는 집착에 뿌리를 두고, 음에 대한 차별의 억압을 열매맺는다. 이런 관점에서 영생은 죽음을 통해 모두와 함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생명이다. 아니 죽음을 상실한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생존일 뿐이고, 혼자만 살겠다고 모두를 죽게 하는 암과 같은 것이다. 이런 추측은 모든 존재를 파멸로 몰아갈 불균형을 머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불안의 거센 손길에 떠밀려 확신이자, 진리로 변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우리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소한 것이나 죽음까지도 생명의 씨앗으로 볼 수있는 믿음의 사람이 없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예수의 모습, 모든 것을 다 알고 예측할 수 있을 거라던 예수가 의외라는 듯 당황하는 모습.
이것은 기적이 단순히 절대적 힘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억압적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어울어져 이뤄내는 자발적 사건임을 암시한다. 기적은 잔잔한 바람, 산뜻한 햇살, 말없는 바위, 지나가는 행인, 그에게 짙밟힌 잡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함께 한 흐름으로 어울어질 때에만 이뤄지는 축제인 것이다. 결국 이런 의외의 장면은 우리 모두가 온 우주와 함께 지금 이순간도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진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게 될 것같지 않은가? 모든 지 할 수 있으면 무엇을 해도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 그 능력 자체는 폭력일 수 있다. 오히려 기꺼이 무능해질 수 있는 여백이 생명과 기적의 자리인 것이다. 그렇게 전능과 무능이 균형을 이뤄야진 모습이 하나님의 뒷모습이자 그 긴 그림자이다. 가득함이 빈 것이듯, 전능함은 무능함인 것이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는 예수의 모습도 새로움을 준다. 예수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에게 어떤 매력이 있겠는가? 뭐든 지 다 알고 하는 행동, 뭐든 지 다 할 수 있는 힘으로 하는 행동에는 어떤 긴장도, 긴박감도, 힘겨움도 없지 않을까? 이것보다는 몸의 일부를 못쓰는 사람이 해내는 작은 일이 더 위대하지 않은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고통과 두려움, 분노와 짜증스러움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긴박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낸 "길"인 것이다. 그런 무능력한 예수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또한 그럴 때, 내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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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나타나신 예수

고전 15:3~11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15: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 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15: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5:6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f)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f. 그) 잠들었지만)
15:7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5: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5: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5: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늘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입니다.
15: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다 같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부활 하셔서 게바와 열두 사도, 그리곤 후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고 결국엔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바울에게도 나타나신 예수. 마침내 못난 자신 앞에도 나타나신 예수가 마침내 바로 지금 나에게도 나타나야 할텐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내게도 나타나셨다. 헤아리기 어려운 삶의 질곡 속에서도 못난 아들을 사랑해주신 어머니의 삶 속에, 전신 마비의 몸으로 십 년동안 죽어가신 아버지의 고독한 절규 속에서 예수는 나타나셨다.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과 그 속에서도 나를 사랑해주시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고통에 통참하는 부활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깨달음이 내가 이 모든 세상보다 더 귀한 존재였음을 탈은폐시켜 주는 은혜인 것이다.
바로 이런 체험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존재들 속에 그 몸으로 함께 계신 하나님의 성육신을 계시해준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을 일상 속에서 새롭게 깨닫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주검의 신앙일 뿐이다. 단지 어떤 지식-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을 주문처럼 되뇌이며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게 될 뿐이다. 거기에서는 예수처럼 사는 삶이 잉태될 수 없다.
이런 정황 속에서 어떻게 오늘의 삶, 그 일상의 현장에서 예수를 볼 수 있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움터온다. 그렇게 열매없이 썩어가는 신앙인들의 부폐된 삶이 거름되어 새로운 생명이 움터온다.
사실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어디에도 그 모두가 예수를 봤다고 되어있지는 않다. 오늘 이 순간도 모두에게 나타나시지만 모두가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가? 성경 속에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막16: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우선 무엇보다 위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서 만나 볼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바로 중심이 아닌 변두리, 낮고 천한 곳, 고통과 신음 소리가 가득히 맺히고 고여 썩고 있는 곳에 이미 가 계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갈릴리의 또 다른 십자가에서.

눅 24:15,16, 30,31
24: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몸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24: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24: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24: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 속에 이미 임재해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가리운 눈, 그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 어느 구석, 혹은 하나님의 우편에 자리잡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이미 태초에 그분을 통해서 모든 존재가 창조되고, 모든 존재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눈이 가리워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끈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가리고 있다. 그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 속에서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보지 않으려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어두움을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

빌립보서 2:13
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는 우리가 지나는 객에게 음식을 베풀 때, 빵을 나누는 행위 속에 함께 계시는 모습을 살며시 드러낸다. 그리곤 부끄러운 듯, 그득하게 채우시곤 홀연히 사라지신다.

이처럼 예수는 오늘도 갈릴리처럼 낮고 천한 고통의 시궁창에서 아픔 속에 임재해 계시고, 그 속에서 서로를 치유하고 나누는 손길 속에 함께 계신다. 물론 내 고통을 치유해주는 타인의 손길 속에서 먼저 찾기 쉽겠지만 그 손길은 바로 나의 손일 수도 있고, 타인의 손길일 수도 있다. 나를 돕는 손길 속에서 만난 예수는 다시 내가 나서서 나누고 돕는 손길 속에서도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들 서로 속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또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손길로서 예수를 비춰 보여줘야 한다. 그 실천 속에서 우린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홀연히 지우고 예수만을 남겨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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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방도 없이, 구유에서...

눅 2:1~7여관방이 없어, 구유에 태어난 예수....

“어디에 있는가?”라는 공간의 문제는 상징투쟁의 문제다. 어떤 공간을 얼마만큼 점유하고 있는가는 실존의 영역에서 자신이 가진 힘과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출생은 바로 이런 공간 점유를 통한 상징투쟁의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물어오신 것처럼 자신이 어디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중요한 문제다. 자신의 선 곳이 그 사람을 구성하고 만들어 가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생명의 힘도 있는 그대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생은 “기원” 즉, 인과간계에 의한 결과의 관계를 담고 있다. 물론 그에 따라 부여된-가치를 의미한다. 한 인간이 시작된 지점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흐름의 연장으로써 앞선 흐름의 영향 아래 존재하게 되고, 그 자신 역시 그 이후의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느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 역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강력한 현실적 힘에 의해 그 사람의 삶은 눌려있기 쉽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하던가...
이런 흐름 속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났음은 “공간”과 “기원”이라는 가치기준에 의해서 형성된 계층구조에 대한 역전이자 파괴를 의미한다. 중심의 파괴이자 상하구조의 해체인 것이다. 가장 낮고 천한 공간에 태어나 그 기원이 짊어지도록 한 현실의 무게를 그 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내는 예수의 삶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 변방의 천한 자리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현의 공간으로 회복시키고, 인과관계에 종속된 가치 형성의 폭력과 그 고리를 끊어내는 해방이다.

그렇게 변방과 천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재중심화하는 자기 발견은 현실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기득권자들을 파괴하고, 중심과 변방을 역전시키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정과 수용이라는 정신적, 심리적 차원의 변화가 현실의 구조적 차원에 대한 실천으로 전이되어 간다. 그렇게 예루살렘과 기득권자의 권력을 파괴한 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는 궤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게다.
현실과 권력의 중심을 해체시켜 수많은 변두리를 각자의 새로운 중심으로, 있는 모습 그래로, 처한 자리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이미 임재해 계셨던 성현의 공간으로 새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이다. 그리곤 그런 받아들임을 감격하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중심을 파괴하며 또 다른 변방들을 각각의 중심으로 회복하는 열매가 맺혀야 한다. 그런 생명의 변화는 주검의 힘을 역류해 가는 연어처럼 역행하는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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