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에게 나타나신 예수 |
고전 15:3~11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15: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 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15: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15:6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f)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f. 그) 잠들었지만) 15:7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5: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5: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5: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늘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입니다. 15: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다 같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부활 하셔서 게바와 열두 사도, 그리곤 후에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고 결국엔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바울에게도 나타나신 예수. 마침내 못난 자신 앞에도 나타나신 예수가 마침내 바로 지금 나에게도 나타나야 할텐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돌이켜보면 내게도 나타나셨다. 헤아리기 어려운 삶의 질곡 속에서도 못난 아들을 사랑해주신 어머니의 삶 속에, 전신 마비의 몸으로 십 년동안 죽어가신 아버지의 고독한 절규 속에서 예수는 나타나셨다.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과 그 속에서도 나를 사랑해주시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고통에 통참하는 부활을 발견하게 된다. 그 깨달음이 내가 이 모든 세상보다 더 귀한 존재였음을 탈은폐시켜 주는 은혜인 것이다. 바로 이런 체험이 오늘도 어제도, 아니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존재들 속에 그 몸으로 함께 계신 하나님의 성육신을 계시해준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을 일상 속에서 새롭게 깨닫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주검의 신앙일 뿐이다. 단지 어떤 지식-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을 주문처럼 되뇌이며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게 될 뿐이다. 거기에서는 예수처럼 사는 삶이 잉태될 수 없다. 이런 정황 속에서 어떻게 오늘의 삶, 그 일상의 현장에서 예수를 볼 수 있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움터온다. 그렇게 열매없이 썩어가는 신앙인들의 부폐된 삶이 거름되어 새로운 생명이 움터온다. 사실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어디에도 그 모두가 예수를 봤다고 되어있지는 않다. 오늘 이 순간도 모두에게 나타나시지만 모두가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는가? 성경 속에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막16:7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십시오. 그는 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우선 무엇보다 위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서 만나 볼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바로 중심이 아닌 변두리, 낮고 천한 곳, 고통과 신음 소리가 가득히 맺히고 고여 썩고 있는 곳에 이미 가 계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갈릴리의 또 다른 십자가에서.
눅 24:15,16, 30,31 24: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몸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24: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24: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24: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 속에 이미 임재해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가리운 눈, 그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 어느 구석, 혹은 하나님의 우편에 자리잡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이미 태초에 그분을 통해서 모든 존재가 창조되고, 모든 존재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눈이 가리워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끈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가리고 있다. 그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 속에서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보지 않으려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어두움을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
빌립보서 2:13 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는 우리가 지나는 객에게 음식을 베풀 때, 빵을 나누는 행위 속에 함께 계시는 모습을 살며시 드러낸다. 그리곤 부끄러운 듯, 그득하게 채우시곤 홀연히 사라지신다.
이처럼 예수는 오늘도 갈릴리처럼 낮고 천한 고통의 시궁창에서 아픔 속에 임재해 계시고, 그 속에서 서로를 치유하고 나누는 손길 속에 함께 계신다. 물론 내 고통을 치유해주는 타인의 손길 속에서 먼저 찾기 쉽겠지만 그 손길은 바로 나의 손일 수도 있고, 타인의 손길일 수도 있다. 나를 돕는 손길 속에서 만난 예수는 다시 내가 나서서 나누고 돕는 손길 속에서도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들 서로 속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또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는 손길로서 예수를 비춰 보여줘야 한다. 그 실천 속에서 우린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홀연히 지우고 예수만을 남겨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