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1-13 [표징을 거절하시다]

1. 감춰진 욕망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향을 바꾸고, 앞으로의 삶 전체를 걸어야할 결단은 그만한 무게의 이유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단의 근거, 증거에 대한 필요를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음흉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는 특정한 때에만 이런 고민을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그런 근거를 찾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검증하거나 확인하지 않은 수많은 전제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거나,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덩달아서.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욕망을 채우려는 집착에 붙들려 있을 뿐, 그 욕망의 근원이나 방향,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는 모습은 흔치 않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 욕망을 포기해야하는 결단이 요청되면, 완벽한 근거, 증거를 요구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증거없이 살아왔으면서도. 얼핏 보면 완벽한 근거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질문은 자기기만이자 위선이다. 그 질문은 진실하게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착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표적도 해답이 될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의심의 눈으로 노려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당연히 그런 증거가 필요하고, 상대는 그런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래서 난 믿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여긴다. 그것이 바로 자기기만이다. 바로 이 기만 때문에 당시의 세대나 오늘 우리 세대도 표적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위선과 기만은 단순히 표면적인 선악의 구분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 본문에서 예수를 시험하고 거부하는 집착에만 이런 기만적 질문이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자신이 정립한 신앙의 내용과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고 확실한 근거를 대라고 반문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신념체계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진리를 외면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정된 신념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000 여년의 역사 속에 굳어진 기독교가 오늘날 새롭게 주어진 계시에 대해서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면서 이단으로 낙인 찍고,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히 돌아봐야 할 것이다.

2. 표징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까지. 그러나 그 표적을 본 사람들조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거나 적어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서 놀랍고 기이한 기적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설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례자 요한에게 말한 것처럼 수많은 표적이 있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복음 7:22)
예수는 이런 일들이 충분한 표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람들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곤 더 놀라운 무엇인가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에 대해서는 그 무엇을 보인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격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않은가? 게다가 사람들은 사건들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똑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서로 말하는 것은 제각각이지 않은가?
결국 우리에겐 표증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흔적이요 음성이건만 따로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일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무늬를 발견하고 매만질 수 있는 깨인 시선이 있어야만 우리는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시선에게는 새순이 돋는 것이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 만큼이나 큰 기적이요 감동이다.
그렇다면 그런 깨인 눈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다양한 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분명한 길은 이웃-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는-의 절망에 함께 참여하는 삶에 놓여있을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 죽음의 그림자에 함께 공명하여, 그를 위해 내 생명을 내놓는 순간 그 길은 밝히 보일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상대의 생명이 되살아나고 치유될 것이고, 그 부활이 바로 내 기쁨이 될 것이다. 바로 그 기쁨은 내 아픔을 맑끔히 잊게 하고, 죽음을 극복해내는 모든 생명의 율동을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하게 할 것이다. 또한 생명들을 치유하고 살아숨쉬게 하는 모든 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바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체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어떤 변증을 시도하기 보다는 내가 길이니 나를 따르라고 하였고, 그 길에서 체험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예수가 바다를 건너가고 남겨진 빈 자리에서 그에게 던졌던 질문과 요구를 거두고, 내 안에 감춰진 기만적인 욕망이 없는지 반문해야 한다. 그리고 건너편에 이미 도착한 예수를 쫓아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비록 그 사이에 놓인 바다를 건너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삶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바로 그 불안의 물결 위를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 새로운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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