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관방도 없이, 구유에서... |
눅 2:1~7여관방이 없어, 구유에 태어난 예수....
“어디에 있는가?”라는 공간의 문제는 상징투쟁의 문제다. 어떤 공간을 얼마만큼 점유하고 있는가는 실존의 영역에서 자신이 가진 힘과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출생은 바로 이런 공간 점유를 통한 상징투쟁의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물어오신 것처럼 자신이 어디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중요한 문제다. 자신의 선 곳이 그 사람을 구성하고 만들어 가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때 생명의 힘도 있는 그대로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생은 “기원” 즉, 인과간계에 의한 결과의 관계를 담고 있다. 물론 그에 따라 부여된-가치를 의미한다. 한 인간이 시작된 지점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흐름의 연장으로써 앞선 흐름의 영향 아래 존재하게 되고, 그 자신 역시 그 이후의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느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 역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 강력한 현실적 힘에 의해 그 사람의 삶은 눌려있기 쉽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하던가... 이런 흐름 속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났음은 “공간”과 “기원”이라는 가치기준에 의해서 형성된 계층구조에 대한 역전이자 파괴를 의미한다. 중심의 파괴이자 상하구조의 해체인 것이다. 가장 낮고 천한 공간에 태어나 그 기원이 짊어지도록 한 현실의 무게를 그 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내는 예수의 삶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 변방의 천한 자리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현의 공간으로 회복시키고, 인과관계에 종속된 가치 형성의 폭력과 그 고리를 끊어내는 해방이다.
그렇게 변방과 천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재중심화하는 자기 발견은 현실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기득권자들을 파괴하고, 중심과 변방을 역전시키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정과 수용이라는 정신적, 심리적 차원의 변화가 현실의 구조적 차원에 대한 실천으로 전이되어 간다. 그렇게 예루살렘과 기득권자의 권력을 파괴한 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는 궤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게다. 현실과 권력의 중심을 해체시켜 수많은 변두리를 각자의 새로운 중심으로, 있는 모습 그래로, 처한 자리 그대로를 하나님께서 이미 임재해 계셨던 성현의 공간으로 새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시작이다. 그리곤 그런 받아들임을 감격하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중심을 파괴하며 또 다른 변방들을 각각의 중심으로 회복하는 열매가 맺혀야 한다. 그런 생명의 변화는 주검의 힘을 역류해 가는 연어처럼 역행하는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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