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6:1-6 [고향에서의 배척] |
자신의 고향에서 놀라운 가르침과 병고침의 기적을 보여주고도 달가워 하지 않는 의심의 눈초리만을 받고 떠나야 했던 예수의 이야기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주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같은 동네에서 비슷하게 자라났던 그 누군가가 뭔가 뛰어난 존재로 다시 나타날 때, 우린 보통 달가워하지 않고, 사실은 나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못한 점도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운이 좋았다거나 누군 좋겠다는 등의 시기심, 그 탁한 마음에 흔들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곤 한다. 이 이야기는 그런 우리의 벌거벗은 마음을 비춰준다.
[촛점없는 시선]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2절)" 먼저 이 질문이 눈길을 끈다. 이 질문은 상황에서 떼어내서 생각할 때는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문장이다. 지혜와 기적의 근원에 대한 탐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도는 시기심에 뿌리를 둔 욕심일 뿐이다. 3절 하반절에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묘사가 이를 뒷받임해준다. 그 대답을 원하기 보다는 상대를 깍아 내리려는 욕망이 더 강했던 것이다. 혹은 그 질문은 대답을 통해서 누군가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어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쓴 가면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는 생각은 그 근원에 어떤 욕망과 의도가 자리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을 만나면서 비판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세를 따르며 타성에 젖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오히려 그 욕망에 속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무의식의 덫, 기도는 그런 깊은 곳을 사랑으로 응시하는 시선이자 가면을 벗어던진 맨 얼굴이어야 할 것이다. 그 잔잔하고 깊은 눈빛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바라보는 촛점없는 시선일 것이다.
[전능과 무능]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5절)"
별 생각없이 스쳐가기 쉬운 이 구절이 바로 이 이야기의 마무리이다. 하나님의 아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그 전능한 존재가 무능한 모습으로 당황해하는 모습.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논리적이고 개념적 사고가 지닌 왜곡에서 시작된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의 사고는 유한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은 당연히 표현 그대로 그림자도 없고, 흠이 없는 최고의 존재일 거라고 추측된다. 이런 추론은 음과 양 중에서 양만을 지향하는 집착에 뿌리를 두고, 음에 대한 차별의 억압을 열매맺는다. 이런 관점에서 영생은 죽음을 통해 모두와 함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생명이다. 아니 죽음을 상실한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생존일 뿐이고, 혼자만 살겠다고 모두를 죽게 하는 암과 같은 것이다. 이런 추측은 모든 존재를 파멸로 몰아갈 불균형을 머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불안의 거센 손길에 떠밀려 확신이자, 진리로 변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우리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소한 것이나 죽음까지도 생명의 씨앗으로 볼 수있는 믿음의 사람이 없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예수의 모습, 모든 것을 다 알고 예측할 수 있을 거라던 예수가 의외라는 듯 당황하는 모습. 이것은 기적이 단순히 절대적 힘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억압적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어울어져 이뤄내는 자발적 사건임을 암시한다. 기적은 잔잔한 바람, 산뜻한 햇살, 말없는 바위, 지나가는 행인, 그에게 짙밟힌 잡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함께 한 흐름으로 어울어질 때에만 이뤄지는 축제인 것이다. 결국 이런 의외의 장면은 우리 모두가 온 우주와 함께 지금 이순간도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진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게 될 것같지 않은가? 모든 지 할 수 있으면 무엇을 해도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 그 능력 자체는 폭력일 수 있다. 오히려 기꺼이 무능해질 수 있는 여백이 생명과 기적의 자리인 것이다. 그렇게 전능과 무능이 균형을 이뤄야진 모습이 하나님의 뒷모습이자 그 긴 그림자이다. 가득함이 빈 것이듯, 전능함은 무능함인 것이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는 예수의 모습도 새로움을 준다. 예수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에게 어떤 매력이 있겠는가? 뭐든 지 다 알고 하는 행동, 뭐든 지 다 할 수 있는 힘으로 하는 행동에는 어떤 긴장도, 긴박감도, 힘겨움도 없지 않을까? 이것보다는 몸의 일부를 못쓰는 사람이 해내는 작은 일이 더 위대하지 않은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고통과 두려움, 분노와 짜증스러움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긴박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낸 "길"인 것이다. 그런 무능력한 예수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또한 그럴 때, 내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