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자들은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지만, 다른 성서학자들은 평화의 영성 안에 더욱 전통적인 성서적 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썼다. 1940년대에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 ~1965년)는 성서란 사람들이 신이 부재하는 것처럼 느꼈던 바로 그시기에 현존하고 있었음을 증언한 경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소통을 말하고 있기에, 성서주석 역시 고정되지 않은 것이었다. 성서 연구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성서를 펼쳐서 말씀을 들음으로써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부버는 랍비들이 성서를 ‘부름‘이라는 의미의 ‘미끄라‘라고 부르는 것에 놀랐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추상화시키는 것을 허락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훈련시켜 현재의사건들에 맞서고 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부름이었다.
- P254

성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에서 다른 시점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또한 그들의 주석도필연적으로 각각의 독특한 환경 속에서 다르게 채색되었다. 만약해석이 오직 성서의 저자가 원래 말한 뜻이 무엇인지에만 집중된다면,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이해했던방식에 대해서 무시한다면, 이는 성서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 P259

현재 우리는 종교적, 세속적 영역 모두에서 과도한 확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동성애자, 자유주의자, 여성 성직자들을 비방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하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의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서 주석가는 언제나 본문의 가장 너그러운 해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 해석가들은 성서를 과거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미드라쉬의 본래의미, 즉 ‘무언가를 찾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석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모험이다. 부버는 각각의 독자들이성서를 대할 때 마치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던 것과 같은태도로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의 깊게 듣고, 과거의 편견들을 버리게 하는 계시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종교체계를 거스르는 행위라면, 발타자르가 주장한 대로 종교기관들역시 성서의 미끄라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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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동이란 예술 작품 뒤에 모습을 감춘한 인간을 향한 진한 감정 같은 것이었죠. 예술은 비범한 천재가 만들어 낸 기적적인 무엇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조건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없는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이, 어쩌면 평범 이하로 과민하고 나약했을지 모를 개인이 세상에 남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교신이 아닐까요?
...
노동의 고단함, 노화를 통해 겪는 허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회와 제도, 시대와 계급에 얽매일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목소리가 예술 작품의 형태와 색깔 속에 살아있을 때, 관객은 작품 너머에 숨겨진 예술가의 존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진지한 갈등과 삶에 대한 애착이 한 편의 그림이 되어 말을 걸어올때, 관객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예술적 체험은 누군가의 삶의고뇌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음을 느끼는 순간의 경험이 아닌가 합니다.
- P10

화가는 이 보이지 않는 마음속 사건들을 보이는 이미지로바꾸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이해해 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뭉크가 진실하게 그려 낸 삼각관계 속 질투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인간의감정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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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시내산에 관해 읽는 것이 아니라, 시내 산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
하시딤은 마음속에서 성서를 위한 고요한 장소를 만들면서 각자의 거룩한 성서 독법인 렉치오 디비나를 발전시켰다. 하시딤은 본문을 분석해서 여러 갈래로 찢어놓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비판적인 생각들을 잠재웠다. 도브 베르는 종종 ‘토라를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지(의식하지) 않고, 말하고 있는세계의 잠잠한 음성에 귀 기울이며,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서 주석가는 신적인 현현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마치 토라의 악기인 것처럼, 그것을 반드시 자신을 통해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 P223

이와 같이 하나의 본문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점차 성서를 영성의 핵심으로 삼기 시작하자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관련된 신학을 만들기 위해 성서에 의지하자,
KKK단(Ku Klux Klan[큐 클럭스 클랜]) 은 성서를 이용해 흑인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항한 이스라엘인들은 결국 제거되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전멸했다. 흑인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신은 그들의 딸들을 노예로 파는 것을 허락했으며,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이집트인 노예 하갈을 광야에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주장했다. 5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은 사람들의 관심을 성서로 돌릴 수는 있었으나, 절대적인 조항들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성서의 본문들을 찾아내어 사용했다. 17세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사람들은 성서가 매우 난해한 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명확성과 합리성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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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옛 유대교 경전들을 존중했기만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저자이자 편집자들은 주해에서『 미쉬나』의 율법적 판단을뒤집기도 했으며, 한 랍비의 의견을 다른 랍비와 비교하며 『미쉬나』의 논점 가운데 심각한 맹점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서 또한 똑같이 대했다. 성서 원문에서 누락된 부분들을 언급하기도 하고, 신의 영감을 받은 성서의 저자들이 무엇을 말했어야 하는지‘를 제시하기도 했으며, 성서의 율법을 좀 더 자신들의구미에 맞게 바꾸기도 했다. 신약 성서가 그리스도인들의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를『바빌로니아 탈무드』 옆에 놓고 같이 읽으면 완전히 다르게 읽혀질 것이었다. - P118

... 활기차게 토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확답을 주지 않는다. 논쟁이 막다른 골목에서끝나면 학생은 선생과 더불어 만족스러운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최초의 ‘쌍방향 경전‘ 이며, 이 방식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학생들 역시 랍비들이 했던 것과 같이 토론에 참여하여 자기 나름대로 경전 해석에 공헌했다. - P119

학생들은 바벨로니아 탈무드를 통해 성서를 공부하면서 누구의 말도 최종적인 발언이 아니라는 점, 진실은 계속변화한다는 점, 전승은 신비롭고 가치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자신의 판단을 옭아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학생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게마라를 성스러운 페이지에 더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전승의 계승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무엇이 토라인가?‘를 묻는다. 그 답은 ‘토라의 해석‘이다. - P120

성서의 영적인 해석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변화시키기 힘든 자신의 자아를 바꾸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바꾸어야 한다. 성서 해석은 최고의 순결과 깨어 있음, 그리고....... 수많은 철야‘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기도와 덕행을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도 다른데, 왜냐하면,
더 많은 직관적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이 "끈기 있게 계속 모든 정신과 합당한 존경을 다하여 공부할 경우에는 신의 숨결이 그의 마음과 감각에 닿게 될 것이며, 그가 읽은 말씀들은 인간의 것이 아닌 신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133

주석은 언제나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 주석은 오리게네스에게테오리아(theoria, 명상)‘를 의미했다. 독자들은 스스로 ‘진실의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 구문을 명상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신을 향한 새로운 방침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는 종종 확실한 결론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스스로 마지막 단계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석은 단지 그들을 영적인 면에서 바른길로 가게할 뿐이지 대신하여 명상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의
‘명상‘을 통하지 않고서 그의 주석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 P136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서 예수를 찾은 후에는 세상으로 돌아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사랑의 봉사를 함으로써 그를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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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의미는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석가는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어떤 유대인이든 성서에서신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해냈다. 성서에는 끝이없다. 랍비들은 솔로몬 왕 역시 성서의 한 구절을 설명할 때마다3,000개의 비유들을 이용했으며, 각각의 비유마다 1,005개의 해석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성서의 각 구절마다.301만 5,000개의 해설이 가능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경전에 쓰인 말씀들은 끊임없는 해석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그래야만 토라에 숨어 있는 신의 존재가 드러난다. 미드라쉬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연구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미드라쉬는 현실에서 행동을 유발하도록 영감을 주어야 한다. 주석가는 토라를 특정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답을 줄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급박한 문제에응답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실생활에 적용시킬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경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하게 하는 부름이다. - P98

"누구든 너 (이스라엘 백성)를 해치는 자는 그의 눈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다." 유다는 이 구절에서 그의 눈‘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에이노(eyno)‘로 읽지 말고, ‘나의 눈‘ 이라는 의미의 ‘에이니(eyni)‘로 읽으라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든 이스라엘 백성을 해치는 자는 나의 눈을 상하게하는 것과 같다. "
성서에는 절대적인 해석이 있을 수 없다. - P105

무엇보다도 ‘연민‘은 미드라쉬 해석 원칙의 길잡이이다. 1세기초에 바리새파의 위대한 현자인 랍비 힐렐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건너왔다. 그의 바리새주의는 좀 더 엄격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이교도가 힐렐에게 와서 외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요약해서 말해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힐렐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 자신에게혐오스러운 일을 다른 이에게도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 가르침의 핵심이며,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오. 자, 이제 가서 당신 스스로 공부하시오. 토라의 핵심은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것에 대한 거부이다. 성서에 나와 있는 다른 것들은 단지 주해, 즉황금률에 대한 주석에 불과한 것이다. 앞 인용구의 마지막에 힐렐은 미끄라‘, 즉 행동으로 옮기라고 촉구한다. 가서 공부해라!‘ 랍비들은 토라를 공부하면서, 성서의 율법과 이야기의 기저에 있는연민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본문의 원래의미를 왜곡할지라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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