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의미는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석가는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어떤 유대인이든 성서에서신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해냈다. 성서에는 끝이없다. 랍비들은 솔로몬 왕 역시 성서의 한 구절을 설명할 때마다3,000개의 비유들을 이용했으며, 각각의 비유마다 1,005개의 해석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성서의 각 구절마다.301만 5,000개의 해설이 가능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경전에 쓰인 말씀들은 끊임없는 해석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그래야만 토라에 숨어 있는 신의 존재가 드러난다. 미드라쉬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연구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미드라쉬는 현실에서 행동을 유발하도록 영감을 주어야 한다. 주석가는 토라를 특정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답을 줄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급박한 문제에응답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실생활에 적용시킬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경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하게 하는 부름이다. - P98
"누구든 너 (이스라엘 백성)를 해치는 자는 그의 눈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다." 유다는 이 구절에서 그의 눈‘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에이노(eyno)‘로 읽지 말고, ‘나의 눈‘ 이라는 의미의 ‘에이니(eyni)‘로 읽으라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든 이스라엘 백성을 해치는 자는 나의 눈을 상하게하는 것과 같다. " 성서에는 절대적인 해석이 있을 수 없다. - P105
무엇보다도 ‘연민‘은 미드라쉬 해석 원칙의 길잡이이다. 1세기초에 바리새파의 위대한 현자인 랍비 힐렐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건너왔다. 그의 바리새주의는 좀 더 엄격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이교도가 힐렐에게 와서 외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요약해서 말해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힐렐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 자신에게혐오스러운 일을 다른 이에게도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 가르침의 핵심이며,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오. 자, 이제 가서 당신 스스로 공부하시오. 토라의 핵심은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것에 대한 거부이다. 성서에 나와 있는 다른 것들은 단지 주해, 즉황금률에 대한 주석에 불과한 것이다. 앞 인용구의 마지막에 힐렐은 미끄라‘, 즉 행동으로 옮기라고 촉구한다. 가서 공부해라!‘ 랍비들은 토라를 공부하면서, 성서의 율법과 이야기의 기저에 있는연민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본문의 원래의미를 왜곡할지라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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