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천문 입문
기천문본문 / 연구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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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로 기천문의 기초 과정을 얼마간 배운 적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사춘기 남자아이의 치기어린 관심은 이 사회가 가치를 부여해준, 그 '남성다움'을 향한,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열망에 붙들려있었다. 그런 관심이 무술을 배우게 했었다. 그 때 단전호흡이나 기타 여러 무술을 배웠었지만, 기천문은 그런 여타의 것들을 통해 배우지 못한-여타의 것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을 배웠던 수준에서 깨닫지 못했던 것이리라-전혀 다른 깊이를 내게 알려줬다.

기천문 무술의 중심에 '마음 공부'가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 것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수련법이자 기천문의 정수인 '내가신장'을 통해 잘 나타난다. 내가신장은 기마자세와 비슷하지만 그것에 역근이라는 독특한 원리를 적용한 정적인 자세이다. 처음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기 어려운 이 내가신장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4,5분을 버티기 어렵다. 그만큼 힘든 자세다. 처음 알려주신 분은 시작하기 전에 그 4,5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게 되었다.

그 자세를 취하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동적인 운동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마음때문에 자세를 풀면, 언제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금방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몸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마음의 집착을 만나다보면 나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얇팍하고 가벼우며 기만적인지를 당혹스러울 만큼 선명하게 맛보게 된다.

인간이 몸을 통해 맛보는 욕망의 그 참혹한 가벼움.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늘 겁탈하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에 붙들려 증오하고 경쟁하고 빼앗는 일상을 현실의 생존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금방 사랑했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식어지는 감정의 끊임없는 배반들 앞에서 계속 진실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 성적 욕망의 신화를 자유롭고 정직한 사랑이라고 맹신하곤 한다. 이런 마음의 얇팍한 기만과 위선은 수없이 많은 사건들 속에 늘 함께 뒤엉켜서 그 실체를 감추고 있다. 내가신자은 바로 이런 실상을 깊이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몸을 통해 마음을 비춰준다.' 그런 깨달음을 맛본 후로 다시 그 고통을 만나면 차차 마음의 소용돌이를 길고 깊은 숨결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고통에 떨고 있는 몸을 잔잔한 눈길로 바라보고 그냥 그대로 껴안아주는 '마음-다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일렁이는 욕망과 몸의 날뜀을 품어 다스리는 일에 눈길을 두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런 기천의 세계를 그것이 시작된 기원에서 부터 수련의 원리, 그리고 기초적인 수련방식들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런 기천의 맛은 직접 도장에서 사람의 숨결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기천이 앞서 말한 것처럼 몸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때문이다. 단지 이 책은 처음 입문하여 배우고 있는 님들이 조금 더 깊이 알아가는데 도움을 주거나, 기천에 대한 개략적인 안내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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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스 파시즘
노혜경.진중권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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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 한 편의 서평만이 올려져 있는, 나와 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되었다. 그러나 성폭력이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만의 문제일뿐 나와는 무관하다는 고상한 남성들과 뒤에서 무책임한 비난에만 머문채 공범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여성들의 방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혐의와 마주쳤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 쯤 버거운 짐 앞에서 서성이는 나의 발걸음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되는 성폭력과 그것을 말했을 때 벌어지는 집단적이고 잔인한 보복의 양상, 이를 방관하는 침묵들과 그 배후에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의 통치 전략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여 그 파시즘적 성향의 실체를 까밝힌다. 구조적 맥락에서 성폭력은 남성중심사회의 통치전략이자 남성중심의 가치관으로 날을 세운 치욕의 칼날로 여성을 순응과 복종 그리고 안락 안에만 묶어두는 계급폭력이며, 약자에 대한 언어적, 실제적 폭력을 통해 분배의 왜곡이나 중간층의 불만을 해소시켜 그 구조적 문제성을 무마시키는 전술이라는 점을, 게다가 이런 지배는 '힘에 근거한 위계적 구조를 고착시킴으로써 파시즘적 사회로가는 기름진 토양'을 만든다는 점을 폭로한다. 이런 억압의 구조는 급기야 진보 상업주의, 문화 특권주의라는 문학적 타락과 문화권력의 양상에 까지, 그리고 정숙한 여자와 창녀, 섹시한 여자와 아줌마 등의 가치대립적 구조를 통해 여성의 이미지마져 독점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심리적 차원에서는 군사문화를 통해 남성들 안에 구조화된 왜곡된 남성 이미지, 미숙한 자아정체성으로 인한 불안과 수치심을 수평적 폭력으로 해소하려는 병리적 심리구조 등으로 분석해낸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보복 속에는 여자를 지배하지 않고는 자기 확인이 안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왜소함을 웅변하고야 마는 남성들의 일그러진 자아'가 발끈하여 고추서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여성 자신들 조차 이런 썩어문드러진 구조의 악취를 맑은 공기나 아름다운 향기로 호흡하고 있고, 심지어 적극적 가해자의 자리에 앉아 그 남성적 폭력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의 이런 다양한 접근은 성폭력의 원인과 양상 그리고 그 심리구조에 대해 다차원적인 분석을 제공하여 그 안팍의 구조와 역학관계를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시선들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석뿐만 아니라 성폭력의 상처와 그 고통의 숨결이 담긴 고백조의 음성, 그리고 원시적 파괴본능을 드러낸 성폭력의 현장에서 느낀 당혹감과 분노, 그 모멸감까지 생생하게 울려오는 다양한 음색을 취하고 있다. 그로 인해 입체적인 지형도와 지층구조 위에 덧입혀진, 선혈이 낭자한 적홍빛 얼룩들과 쓰라린 눈물, 그리고 불안하고 왜소한 자아를 감추려는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자위행위의 그 거친 숨소리와 역겨운 정액의 악취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상의 도처에 무성한 성폭력의 가시넝쿨들이 저 음험한 무의식의 늪 깊은 곳에서부터 뻗어나온 파시즘이란 거목과 어떻게 뒤엉켜있지, 그리고 여성이란 대지를 짓밟고 서서 그 피를 빨아먹고 자라난 우리의 자화상과 우리의 고상하고 세련된 삶이 그렇게 억압하고 기생하여 얻은 비계들이며 스스로조차 기만하여 자해하는 어리석은 비계(秘計)임을 폭로한다. 그 뿌리 깊은 곳에 뒤엉킨 욕망의 지형을 살펴 전하는 음성은 애써 되삼키는 울먹임과 고통의 심음소리와 뒤섞여 그 고통을 생생하게 전하여 독자에게서 내용을 평가하기만 하는 객관적 거리를 앗아간다. 독자에게 그 성폭력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서있는 지리적 위치와 폭력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남성지배구조의 노예에 불과한 가해자나 직접적인 피해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길없는 길을 걸어들어가는 해방의 개척자로 성장해갈 것이지, 이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할 갈림길 앞에 함께 서도록 만든다. 지금 나는 나와 관련이 없다는 그런 이기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나의 왜소한 거시기에 비춰진 자아가 얼마만큼 성숙해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과 마주하여 그 버거운 무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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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 그랜드북스 51
헤르만 헤세 지음 / 일신서적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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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내가 던져져있는 삶의 자리를 발견하곤 스스로 갑자기 낯설어진 그 곳의 지형을 힘겹게 익혀갔던 사춘기 시절. 그 때 나를 비춰보고 고민하게 했던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였다. 그 역시 스스로 선택했다기 보다는 이미 그 속으로 던져져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동양, 그것도 한국이라는 땅과 하늘을 호흡하며 자란 내 몸이 자라면서 서양 종교의 옷은 점점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때는 그 어색함이 내 몸의 외소함과 부족함이자 급기야 죄라고 자책했었다. 당연히 맞지 않을 수밖에 없는 옷이었음은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은 서양 기독교의 틀을 자유롭게 벗어나 너무나 편안한 동양 종교의 품에서 자유로운 춤사위에 어깨 들썩이는 삶을 꿈꾼다. 이런 변화와 성장은 오랜 시간동안의 고민과 방황, 삶의 체험 속에서 내 안에 스스로 자라난 이 땅의 혼이 자라나는 것이었다.

이런 동양인의 혼이 서양 종교의 틀을 벗어나려는 여정에서 이 책 <싯타르타>는 서곡이었다. 첫 걸음을 떼던 그 때에 아름답고 신비롭게 들리던 동양의 가락이었다. 이 책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깊이가 담겨있었기에 더더욱 나의 영혼이 그 신비에 매력을 느꼈었고, 서양인이 이해한 동양의 가락이었기에 기독교인인 내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물론 동양의 혼으로 바라본 기독교도 이젠 다른 깊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와는 다른 불교의 매력이 그 속에서 풍겨났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전통의 수련과 지식을 세련되게 완성하고 어떤 경지를 소유하는 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계속 다른 공부를 위해 떠나던 모습, 오히려 삶의 질곡과 땀, 욕정과 증오, 애증을 다 맛보고 그 척박한 삶의 땀과 눈물의 냄새를 한 껏 들이킨 후에야 깨달음에 이르는 모습.

지식이나 경지 따위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온 몸으로 삶을 살아내고 그 삶 속에서 온 몸을 통해서 깨닫는 자유한 영혼, 싯다르타의 그런 모습은 교회를 오가고 몸이 터져라고 기도하던 내 신앙을 비춰보게 한 동양의 깊고 검은 거울이었다. 내 안에 있는 영혼은 그런 깊이의 차원과 넓은 평지를 온몸으로 걷는 넓이의 차원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지식을 높이 쌓아올려 그 웅장함에 압도되려는 새디즘적 종교의식으로 왜곡되어 있던 당시의 기독교신앙은 그렇게 조금씩 금이 가고있었다.

그렇게 삶의 현장, 그 먼지 날리는 땅으로 스며 녹아내리는 깨달음을 동경하게 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를 먹고 생존의 장에서 숨가쁜 달음질로 살아가는 지금도 참된 생명과 자유의 깨달음을 깊이 사랑했던 싯다르타의 영혼은 단단해진 내 혼을 두드려 깨운다. 일상과 생존의 장이 바로 삶의 진리를 연단하고 깨달아가는 바로 그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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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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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라는 글로 시작해서 '아직도 교회에 다닙니까?'라는 글로 마치기까지, 한국 기독교가 대부분 절대적 진리로 믿는 것들에 대해 딴지를 건다. '성경만, 예수만, 기독교만, 우리 교단의 신학만' 유일한 절대적 진리이고, 성경무오설, 동정녀 탄생, 예수의 육체 부활과 재림, 심판 등을 문자 그대로 의심없이 믿으면 '잘믿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보는 한국 교회의 신념체계들을 뒤집어 엎는다.

최근의 굵직한 정치사회적 사건들에서 기독교인이 주범인 경우가 많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치경제적 부패가 팽배했던 때와 정비례로 교회도 전례없는 성장을 이뤘다. 그래서 그런 파행들과의 유착관계나 방관적 공범이란 혐의를 벗기 어려웠고 타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적 태도와 기독교의 부정적 행태가 드러난 사건들이 이어졌다. 결국 많은 안티기독교 사이트들과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기독교 죄악사> 등의 기독교 비판서들이 줄잇고 있다. 이렇게 증가하는 비판은 교회의 부패로인한 당연한 결과다. 허나 단단하게 굳은 주검의 땅이 된 기독교를 갈아엎은 후에 그 위에 씨앗을 심는 사랑의 손길은 찾기 어렵다. 대부분은 저급한 비난과 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죽이기 논리의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무책임하고 증오어린 비난이 아니다. 삶과 종교에 대한 깊은 경륜이 베어나는 글과 쉽고 재미난 우화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의 결에서 기독교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꼭막힌 기독교'가 되어 덩치만 큰 어른-아이로 성장을 멈춰버렸다고 본다. 이런 '꼭막힌 기독교'는 구미지역에서는 드물고, 교육과 경제수준이 극히 낮은 곳과 그 곳 출신의 꼭막힌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한국, 아프리카 등에서나 서식하는 기형적 현상이라고 본다. 물론 한국 교회의 믿음은 신앙이 성장하는 한 단계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런 유아기적, 식민적인 신앙에 고착되는 것은 큰 문제고, 시원함과 툭트임을 주는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시대적 필요를 따라 고정시킨 예수는 우상일 뿐,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을 시작으로 성장을 막는 것들을 하나씩 갈아 엎는다. 우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틀리지 않다고 보는 것은 신앙의 성장을 막는 많은 모순을 가졌고 게다가 사람을 죽이는 신앙을 만들 위험성도 지녔음을 보여준다. 성경은 지식을 주는 책이 아니라 문자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그 깊은 의미를 맛볼 때 궁극적 변화를 일으키는 책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 속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고, 의식 구조와 가치관을 변화시켜 삶이 더욱 풍요롭고 자유롭게 하는 절대적 힘을 가졌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기적이나 성경을 머리로써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여 절대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와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배타적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깊숙한 내면을 성경의 깊은 의미에 비춰봄으로써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내적 변화의 차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져 성숙해지면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이해가 변해 '지금, 여기'에서 모든 존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相生의 존재, 곧 성숙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국 그 무한한 상상력과 체험의 보고인 경전을 통해 스스로의 체험 속에서 절대자를 맛보고 이로 인해 모든 존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근본적 변화(회개, 메타노이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오히려 다른 신앙과 종교도 오히려 아름답게 바라보고 서로 배우게 된다.

이 책은 한국 교회의 교리와 신앙의 문제점을 깊은 애정으로 뒤집어 엎고 그 비판들로 부서진 폐허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날, 새로운 생명으로 가득한 풍경까지 보여준다. 그 풍경 속에는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인 신앙 모두가 함께 어울어져 춤추고 있었고 저자의 표현대로 십자가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십자가를 지고 모든 존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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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4-13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다룬 여러 통로를 통해 굉장히 기대하고 읽었는데, 저로서는 그 문제의식이나 비판 수위가 오히려 너무 완만한 것 아닌가 느껴져, 에이~ 아직도 이 정도로 놀라나... 하고 쪼금 실망했답니다.^^

물무늬 2004-04-1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완만해서 실망하셨다니 전 그런 님의 실망이 또한 반갑군요. 열린 신앙을 나눌 수 있는 님들은 특히 개신교 안에서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미덕은 보수적인 신앙의 틀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풍토를 향해 문제의식을 안겨줄 수 있었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님의 느낌처럼 문제의식이나 비판의 수위가 완만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안타가운 것은 그럼에도 이 책 정도의 수준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직도 먼 얘기라는 점이죠.

아라비스 2004-04-13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님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죠.
 
스캇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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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들은 아마도 행복이나 즐거움 등을 향해 있는 듯하다. 기다려지는 만남이나, TV에 마주앉아 돌리는 채녈도 걱정거리나, 아픔을 잊으려는 마음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인류사가 이어지는 동안 생겨난 다양한 문화들, 종교, 철학, 과학과 전통들도 '어떻게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것인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당연히 해결의 방법 역시 다양하지만 이들은 '고통을 마주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망각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냐'라는 두 가지 큰 부류로 나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후자만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 앞에 저자는 우리들이 가지않아서 <아직도 가야할 길>로 남겨져 있는 [고통과의 대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끌어안을 때, 오히려 고통은 줄어들고, 인생의 의미가 가득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만히 지난 고통들을 돌아보면 고통을 회피하려고 해서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는 점에 수긍하게 된다. 고통의 근원이 실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회피와 게으름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길도 그려준다. 사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런 과정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힘이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그 해결의 원동력인 사랑은 단순히 설레이는 감정이 아니라 영혼의 성장과 확장을 향한 의지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헐값으로 널려있는 사랑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면서 참된 자유와 의미를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또한 그는 무의식이 우리의 고통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준다. 그는 은총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이 인간에게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는 궁극적인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정신치료의 임상적인 과정을 통해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무한자나 혹은 신이라 불릴 그 존재로 인해 하나로 존재하게 되는 우주의 전일성에 대한 직관도 제공한다.

그의 생각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게으름과 엔트로피를 언급할 때 이를 죄로 규정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분명 문제를 해결하고 내적인 성장을 이루데 있어서 심각한 장애물이다. 그런데 죄라는 단어는 보통 자의적인 잘못에 의한 죄책감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과연 게으름과 엔트로피가 자의적인 잘못이기만 할까? 게다가 게으름과 엔트로피는 우주만물이 존재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이를 잘못 적용하고 집착하는 것에서 문제가 생겨날 뿐이다.

그리고 사랑을 '생산','성장','확대' 와 같은 용어로 설명하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적인 성장의 영역만을 강조한다. 이 용어들은 동적이고 수량적이며 효율성과 관련된다. 이는 사랑의 정적(靜的)이고 무위적(無爲的)인 측면을 간과하게 한다. 사랑은 그 대상과 주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또한 억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진득하게 기다리기도 한다. 사실 사랑의 이런 향내는 그의 용어에 담기기 어렵다. 이밖에도 은총이란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기 때문에 동양 종교나 철학으로 무의식을 풀어가는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부분적인 아쉬움일 뿐이지, 전체적인 흐름에 담긴 저자의 생각은 우리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보물을 기억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통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 실은 고통을 더 썩게 만들고 있다. 안락함과 편리, 빠름, 효율성 등은 오히려 생명력과 우리가 딛고 선 흙을 파괴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음성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가락과 향기들까지 상실하게 한다. 언제나 <아직도 가야할 길>로 남겨진 그 길을 따라서, 고동치는 두려움의 박동을 가라앉히고, 고통이 전해주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맛보아야 하리라. 바로 그 길가에 진하게 베어나오는 삶의 충일함이 가득 피어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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