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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들은 아마도 행복이나 즐거움 등을 향해 있는 듯하다. 기다려지는 만남이나, TV에 마주앉아 돌리는 채녈도 걱정거리나, 아픔을 잊으려는 마음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인류사가 이어지는 동안 생겨난 다양한 문화들, 종교, 철학, 과학과 전통들도 '어떻게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것인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당연히 해결의 방법 역시 다양하지만 이들은 '고통을 마주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망각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냐'라는 두 가지 큰 부류로 나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후자만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 앞에 저자는 우리들이 가지않아서 <아직도 가야할 길>로 남겨져 있는 [고통과의 대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끌어안을 때, 오히려 고통은 줄어들고, 인생의 의미가 가득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만히 지난 고통들을 돌아보면 고통을 회피하려고 해서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는 점에 수긍하게 된다. 고통의 근원이 실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회피와 게으름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길도 그려준다. 사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런 과정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힘이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그 해결의 원동력인 사랑은 단순히 설레이는 감정이 아니라 영혼의 성장과 확장을 향한 의지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헐값으로 널려있는 사랑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면서 참된 자유와 의미를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또한 그는 무의식이 우리의 고통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준다. 그는 은총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이 인간에게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는 궁극적인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정신치료의 임상적인 과정을 통해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무한자나 혹은 신이라 불릴 그 존재로 인해 하나로 존재하게 되는 우주의 전일성에 대한 직관도 제공한다.
그의 생각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면, 인간의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게으름과 엔트로피를 언급할 때 이를 죄로 규정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분명 문제를 해결하고 내적인 성장을 이루데 있어서 심각한 장애물이다. 그런데 죄라는 단어는 보통 자의적인 잘못에 의한 죄책감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과연 게으름과 엔트로피가 자의적인 잘못이기만 할까? 게다가 게으름과 엔트로피는 우주만물이 존재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단지 이를 잘못 적용하고 집착하는 것에서 문제가 생겨날 뿐이다.
그리고 사랑을 '생산','성장','확대' 와 같은 용어로 설명하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적인 성장의 영역만을 강조한다. 이 용어들은 동적이고 수량적이며 효율성과 관련된다. 이는 사랑의 정적(靜的)이고 무위적(無爲的)인 측면을 간과하게 한다. 사랑은 그 대상과 주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또한 억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진득하게 기다리기도 한다. 사실 사랑의 이런 향내는 그의 용어에 담기기 어렵다. 이밖에도 은총이란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기 때문에 동양 종교나 철학으로 무의식을 풀어가는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부분적인 아쉬움일 뿐이지, 전체적인 흐름에 담긴 저자의 생각은 우리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보물을 기억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고통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 실은 고통을 더 썩게 만들고 있다. 안락함과 편리, 빠름, 효율성 등은 오히려 생명력과 우리가 딛고 선 흙을 파괴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음성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가락과 향기들까지 상실하게 한다. 언제나 <아직도 가야할 길>로 남겨진 그 길을 따라서, 고동치는 두려움의 박동을 가라앉히고, 고통이 전해주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맛보아야 하리라. 바로 그 길가에 진하게 베어나오는 삶의 충일함이 가득 피어있을테니....